139화
디아나는 한참을 에드윈의 품에 기대고 있었다. 더는 아무런 말이 없어도 좋았다. 그저 체온을 맞대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안이 됐다. 여전히 미래가 두려웠지만, 맞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응접실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가 울렸다. 디아나는 약간 아쉬움을 남기며 에드윈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드윈도 못내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계속 만지작거리던 디아나의 손을 놓았다.
“들어와.”
디아나의 말에 샬롯이 응접실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물론, 그 후에 둘의 거리가 적정한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드윈은 샬롯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에도 느끼지 못했던 괜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누가 안다면 믿지도 않을 사실이었다.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 샬롯?”
“니콜라의 열이 좀처럼 내리질 않는다고 해요. 아무리 봐도 감기는 아니고요.”
디아나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분명 니콜라와 트리샤의 마력은 어떤 관계가 있었다. 사라의 유언을 채 끝까지 듣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역시, 트리샤와 관련이 있겠지. 그게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트리샤가 마력을 쓰면 니콜라에게 영향이 가는…… 그런 것 같아.”
에드윈은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내가 있으니 직접 들여다보는 건 어떤가.”
샬롯은 디아나가 니콜라와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사라의 비정상적인 죽음을 전해 들은 후에 니콜라도 같은 증상을 보일까 봐 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니콜라는 요양원에서 보살펴 주던 하녀와 단둘이 공작저의 외진 곳에서 엄중한 경비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대공 전하와 함께라면 그나마 안심이지요.”
그러나 직접 눈으로 봐야 아는 것도 있었다. 샬롯은 그런 면에서 에드윈을 굳게 믿었다. 비록 밤손님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디아나를 위하는 마음에선 자신 못지않다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덕이다.
“그럼, 지금 가보자.”
“네, 공작님.”
샬롯이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공작저의 외진 별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굳이 찾을 것도 없이 아이가 떼를 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샬롯이 노크하고 디아나와 에드윈이 들어오자 하녀는 황급히 예를 갖추려 했지만, 디아나가 손짓으로 만류했다. 솔직히 니콜라를 두고 도망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저어, 시녀장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니콜라의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요.”
하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디아나는 하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처음 낙엽에 뒹굴던 니콜라를 봤을 때 소리치던 하녀는 나이가 꽤 많았는데, 지금의 하녀는 디아나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라의 요양원을 중간에 옮겼을 때 바뀐 모양이었다.
“요양원을 옮기면서 니콜라를 맡게 된 건가?”
“네, 저는 원래 수도사님의 하녀인데…… 아무래도 니콜라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저더러 함께 가라고 하셨어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사가 나름대로 마음을 써 준 것이다. 그는 환자를 돌보는 의원의 역할을 맡았지만, 애초에 한 명의 사제였다. 사라의 기이한 행동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말이 새는 것을 염려해 준 것 같았다.
“수도사에게 신세를 많이 지게 됐어. ……이름은?”
“셀린이라고 합니다, 공작님…… 그리고 대공 전하.”
셀린이 무릎을 굽혔다가 눈치를 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원래 모시던 수도사는 셀린에게 이 일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것과 입단속을 할 것을 당부했다. 물론 질문도 포함이었다.
“누, 누나! 니콜라 아파, 아프단 말이야!”
잠깐 조용한가 싶더니 귀에 거슬릴 정도로 악다구니를 써 대는 니콜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모두는 말없이 셀린에게 존경심을 가졌다. 잠시 겪어도 심장이 쿵쾅댈 정도로 아이의 떼가 대단한데 종일 돌보는 건 정말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 니콜라를 안고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나마 안아 주면 조용해져서…….”
“물론.”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샬롯은 손수 니콜라를 데려와 주기까지 했다. 디아나는 적극적으로 셀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셀린은 황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재차 디아나가 권하자 하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니콜라를 무릎에 앉혔다.
“편하게 있어. 가뜩이나 힘들 텐데.”
“아, 아닙니다…….”
니콜라가 자꾸 칭얼거리면서 누나라는 단어를 반복했지만, 셀린은 익숙하게 니콜라를 추슬러서 안고 등을 도닥였다.
하는 짓은 완전 어린아이였지만, 문제는 니콜라의 체구만큼은 8세 그대로라는 거였다. 셀린이 품에 안기조차 버거운 아이가 떼까지 써 대니, 보는 사람의 숨이 다 막혔다.
“항상 이런 식인가?”
“깨어 있을 때는 거의 비슷해요. 그런데 열이 나는 건 아이의 모친이 돌아가신 후예요. 아직 그 사실을 이해하진 못한 것 같지만…… 그 후로 갑작스러운 열이 나곤 해요. 지금도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았고요.”
디아나는 니콜라의 상태가 트리샤와 연관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트리샤가 마력을 사용하고부터 열이 났다는 말이 되는데, 여러모로 아귀가 맞았다.
“어린아이에게 흔한 일이긴 한데, 유독 오래가고 무엇보다 해열제가 듣질 않아서 좀 이상한 것 같아 시녀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잘했어. 사소한 부분이라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니콜라는 손가락으로 셀린의 머리카락을 꼬아 대고 있었다. 그러다 마구 당기고 조금 더 칭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셀린은 그 상황에서도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존경심이 드는 대목이었다.
“니콜라, 우리 낮잠 잘까? 낮잠 잘 시간이야.”
“우…… 나 안 졸려요.”
“낮잠 자고 나면 쿠키 먹을 건데. 그럼 니콜라는 못 먹겠네.”
“아니야, 나 잘래!”
셀린은 능숙하게 아이를 다뤘다. 니콜라가 자진해서 벌떡 셀린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주위에 평소 못 보던 사람들이 몇이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을 주지도 않았다. 확실히 8세의 지능에 못 미치는 것이다.
“잠옷 갈아입을까?”
“아니, 니콜라가 입을 수 있어!”
쪼르르 안쪽으로 달려가는 니콜라를 보자 퍽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 트리샤의 남동생이다. 그러나 채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조금 나아졌어요. 스스로 옷도 입을 수 있게 됐고요.”
셀린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도대체 나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지만, 셀린만은 다른 것 같았다.
“그나마 낮잠 시간도 지킬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이에요. 공작저로 오고 나서 훨씬 나아진 거죠. 알 수 없는 열을 앓게 됐지만요.”
저게 나아진 상태인가. 에드윈은 혼란스러워 입을 닫았다. 디아나에게 전해 듣고 상상했던 상태보다 훨씬 심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할 줄 알았던 기대는 손가락을 빠는 니콜라를 보자마자 무너졌다.
“니콜라는 곧 잠들 거예요, 이제 꽤 습관이 되어서요. 그때 보여 드릴게요. 아무래도 깨어 있을 때는 자기 몸을 보는 걸 싫어해요.”
모두 전적으로 셀린의 의견에 동의했다. 니콜라의 문제에 있어서 셀린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열은 항상? 어느 정도지?”
“아니요. 제가 니콜라를 돌보며 일지를 기록하는데, 시녀장님께 드렸어요. 아무 규칙성이 없어요. 갑자기 열이 났다가 또 괜찮아지고를 반복해요. 해열제는 여러 개를 써 봤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차가운 것을 이마에 대 주거나 하면 그나마 덜 칭얼대는 것 같아요.”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디아나가 반문하자 셀린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열이 급격히 오를 수 있어요. 그건 아주 치명적이고요. 지금 아무 해열제도 듣지 않으니 이보다 열이 더 오르면 어떻게 할지…… 아직 위험할 정도의 고열은 없었지만요.”
“그런 건, 수도사에게 배운 건가?”
“그것도 있지만, 제 동생이 어릴 때 갑자기 열이 치솟더니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 후로 많은 장애를 갖게 됐거든요.”
셀린이 니콜라를 능숙하게 다루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젊은 여인이 외진 수도원에서 일하는 것엔 다 사연이 있는 거다.
“동생은 그 후에 돌림병으로 죽었지만, 니콜라는 적어도 몸은 건강했어요. 그런데 열이 나기 시작하니 덜컥 걱정돼서요.”
디아나는 셀린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며 자책감을 느꼈다.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들여다보지도 않는 트리샤가 냉혹하다고 생각했지만, 디아나도 니콜라를 한 명의 아이로 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니콜라를 한 명의 아이로 대해 주는 사람은 셀린이 유일할 것이다. 다른 어른들이 각자의 이유로 외면한 아이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디아나 역시 그 어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책감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보여 주고 싶다는 건 뭐지?”
“아, 이제 잠들었을 거예요. 잠시, 이쪽으로…….”
셀린이 조심스럽게 기척을 죽이고 잠든 니콜라에게 안내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셀린은 등을 돌리고 잠든 니콜라의 잠옷을 살짝 들쳤다. 등엔 붉은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디아나는 샬롯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외면하고 한 발짝 더 다가서 그 자국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확인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다시 침실을 나섰다.
“두드러기는 아니었어.”
“네, 공작님 바로 보셨어요. 피부병도 아니고, 언제부턴가 붉은 점…… 같은 것들이 늘어나서요. 열을 앓고는 점점 선명해져요.”
니콜라의 등은 붉은 점들이 빼곡히 차서 퍽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염증이나 도드라진 부분도 없었다. 그저 붉은 점이 너무 많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시녀장님께 건넨 일지에 그 모양을 그려 뒀어요. 가끔 니콜라가 하는 이상한 말도요.”
은인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디아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셀린을 봤다. 셀린은 모두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면서도, 유일하게 니콜라를 돌봐 주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버린 의무였다.
“셀린이라고 했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맡아 줘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아뇨, 전 동생을 돌보느라 익숙해서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한심한 어른들을 대신해서 이런 일을 맡아 주다니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니콜라를 거두는 은혜는 공작님이 내리신걸요.”
그건 트리샤에게 대항할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디아나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위선자가 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셀린에게 감사하는 것이 떳떳했다.
디아나는 앞으로도 니콜라의 존재를 이용해야 했다. 트리샤가 가진 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사라의 유언을 추적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디아나는 니콜라에 대한 양심을 셀린에게 맡기기로 했다.
디아나는 완벽하고 고결한 인간이 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했다. 니콜라를 이용하는 게 죄가 된다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트리샤를 막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