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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38화 (138/184)

138화

황제의 침전에 손을 쓸 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너무 주저하고 고민하다가 맞이했던 결과가 처참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어요. 조금 더 빨라졌을 뿐, 황태자 전하가 선위를 받는 건 예정된 순서니까요.”

에드윈은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루카스에겐 군주의 자질이 없었다. 황후와 외척 세력이 휘어잡고 있는 제국의 정치에 루카스의 존재가 더 해진다면 제국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렇기에 당장 북쪽으로 몸을 피해도 마찬가지…… 아니,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디아나는 이미 루카스가 자신에게 집착할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곁에서 트리샤의 미혹이 더해지고, 에드윈과 묘한 기류를 눈치챈다면 열등감에서라도 더 집요하게 굴 것이다.

아무리 남의 눈을 피해 밀회를 나눠도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디아나는 공작 즉위식에서 입었던 문제의 하얀 여우 모피와 의회에서 자신을 감싸던 에드윈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 관계도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을 테고요.”

“그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감히 대공의 여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어.”

에드윈은 이참에 둘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여태껏 그가 바랐던 일이었고, 혹여나 루카스가 다른 마음을 먹었을 때 자신이 당당하게 나서 디아나를 보호하고 싶었다. 디아나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떠나, 에드윈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지키고 싶은 존재였다.

“난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

사랑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다채로운 면을 가지고 있어서 성숙한 여인의 모습에 매혹되다가도 때론 어린아이처럼, 마치 제 가장 아프고 연약한 손가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여 상처라도 입을까,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서질까,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에드윈은 깨닫지 못했지만, 보호 본능이었다. 누군가를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게 되면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게 그들을 더 자극할 수도 있어요. 황태자 전하의 성정을 아시잖아요.”

에드윈이 쓴 입맛을 다셨다. 자격도 없는 놈이 황제가 되는 것도 탐탁지 않은데 디아나를 집요하게 좇던 그 녹안을 떠올리자 이젠 대놓고 증오심이 들었다. 이건 수컷만이 알 수 있는 본능이었다. 분명, 루카스의 녹안에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

“내일 발루아 기사단이 공작저에 도착할 거예요.”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현자 오웬이 제대로 전달했는지, 이미 서신을 보낸 가신도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던 전임자 아론에게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카를 공작령에선 새로운 공작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보다 위대했던 아서 공작의 유일한 후계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제 영지를 돌보려는 마음에 더 주목했다.

“카를은 그동안 군주의 무관심 때문에 모든 무력을 기사단이 대신해서 이끌어 왔어요.”

현자인 오웬에게 여러 가지 배운 것이 생각보다 빨리 도움이 됐다.

“기사단을 복종시킬 수 있다면, 카를의 무력을 전부 갖게 되는 거예요.”

에드윈은 꽤 복잡한 표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디아나는 에드윈이 아는 누구보다 영명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초면인 기사단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군부의 수장이라면 회유할 수 있겠지만, 기사단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쉽지 않을 텐데.”

유서 깊은 기사단일수록 폐쇄적이었다.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에 디아나의 존재는 없었다. 기사단의 충성은 군주가 된다고 해서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어요. 갑자기 나타난 군주에게 바로 충성을 바치면 그건 훌륭한 기사단이 아니겠죠.”

디아나는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무리 공작위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극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건 무리다. 그건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판단한 후에 조금씩 진전시켜야 할 관계였다.

“다행히 전 선친에게 많은 유산을 받았어요. 이번에도 그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에드윈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됐든 디아나의 기사단이었고 에드윈이 참견할 자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디아나라면 분명 어떤 생각이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나선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도 대공가의 모든 무력을 결집하겠다. 전시 체제나 마찬가지니까.”

“전하, 그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닐까요? 때에 따라선 반역의 징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디아나는 에드윈이 더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게 싫었다. 하지만 이미 에드윈의 눈빛은 단호했다.

“조금 전까지 말했잖나. 이건 이미 그대만의 일이 아니야. 이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모두의 일이다.”

물론 에드윈은 디아나만을 위해서라도 군사를 일으킬 각오가 있었다. 다만, 디아나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부담을 갖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현실을 상기시켰다.

루카스가 황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미래가 걱정스러운 판국에 사악한 힘을 쓰는 마녀가 그 곁에 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운명이 너무 가혹하네요.”

디아나가 긴 한숨을 쉬었다. 무엇 하나 디아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문제에서 주인공이 됐다.

어찌 보면 억울하기도 했다. 그저 이 책으로 들어와서 디아나가 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는데 매번 이렇게 큰 벽을 마주하게 됐다.

“결국, 어떤 건 바꿀 수 없나 봐요.”

하긴, 이건 원래부터 한 권의 책이었다. 주인공들이 마주치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이 책에 들어왔을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전개였다. 남은 방법은 정면으로 맞선 후에 페이지가 넘어가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본래 바뀌지 않기에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지.”

에드윈의 우문현답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의 운명은 나와 함께한다. 가혹한 일을 넘기고 나면, 반드시…… 내 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엔 뚜렷한 확신이 담겼다. 어떻게 저리 의연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믿기지 않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제국을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조차 에드윈은 자신의 운명을 믿었다. 그가 택하고 정한 디아나라는 운명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운명은 내 편이니까.”

에드윈이 디아나에게 다가와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에드윈에겐 언제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아무리 알 수 없는 상대를 대적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흑안으로 굳은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인간인 이상 미지의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 없는데, 심지어 몇 번이고 겪은 디아나조차 아직 두려움을 채 떨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올곧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가르쳐 줘요. 어떻게 그렇게 항상……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을 수 있는 건지.”

디아나의 물음에 에드윈은 사랑스러운 시선과 함께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믿는 것이다. 난 다른 것은 할 줄 몰라.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랐고 살아왔지.”

언뜻 대수롭지 않은 말에 에드윈의 지난 인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매 순간 치열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한 가지 비밀이 있긴 한데.”

에드윈이 살짝 뜸을 들였다. 디아나가 바라보자, 에드윈이 잡은 디아나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주 강한 힘을 가진 별이 태어났다더군.”

“……네?”

뜻밖의 말에 디아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신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에드윈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우스웠다. 아마 나름대로 디아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말일 테다.

그 마음 씀씀이가 오늘따라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기골이 장대하고 차가운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가 자못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정말이다. 내 운명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했어.”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끌어다 살며시 입을 맞췄다.

“우리는 같은 운명을 살 테니, 그대의 운명도 그만큼 강한 거야. 그렇지?”

실제로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수도 없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가 태어날 때 남모르게 천문을 관측하는 사제에게 알아본 것이라고 했다.

에드윈의 별은 너무 강한 나머지 루카스가 타고난 운명을 가릴 정도로 빛난다고 했다. 에드윈은 그런 말 따위에 딱히 신경을 쓴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 디나 그대를 만나고 운명을 믿게 됐다.”

에드윈은 처음으로 자신이 타고났다는 강한 별의 수호를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리 강한 빛이라면, 에드윈의 반려인 디아나까지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전 이미 오래전부터 믿고 있었어요.”

디아나가 가만히 에드윈을 눈에 담았다. 지금의 에드윈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생부터 디아나는 운명을 믿고, 그에게 끌림을 느꼈다.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고 디아나는 에드윈의 손을 잡은 후에야 지독했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디아나의 눈에 옅은 물기가 고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은 고스란히 에드윈의 심장에 새겨졌다. 에드윈은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디아나를 꽉 끌어안았다. 쿵쿵, 서로의 박동이 살갗 아래로 느껴졌다.

“아마 나도 그랬을 거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체온보다 더 뜨겁게 스며들었다.

“내가 살아왔던 건 모두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진심이었다. 에드윈은 처음 디아나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강력한 끌림을 느꼈다. 단지 디아나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막연히 상상했던 운명은 그저 첫눈에 깨달을 수 있는 거였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어떤 이유가 없어도, 에드윈은 처음 디아나를 본 순간 함께 걸어가는 미래를 느꼈다.

“내가 대공으로 태어난 것도, 여태 해 왔던 모든 것들도…… 전부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디아나를 만나기 전까지 에드윈의 삶은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고귀한 대공가의 후계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의 인생에 주어진 유일한 소명이었다.

한때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단조로운 인생이건만, 그것이 대공이 져야 하는 무게라 여겼으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 디아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난 분명히 지금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그대를 지키고, 언젠가 그대와 가족이 되기 위해서 살아왔던 거다.”

그건 대공의 의무가 아닌 에드윈이란 한 남자의 인생이었다. 전부 디아나가 바꾼 것이었다. 디아나가 루카스를 버리고 에드윈의 손을 잡았을 때, 이 책의 주인공도 바뀌었다. 에드윈은 이제 안타깝게 사라지는 조연이 아니라 디아나와 함께 이 책의 운명을 걸어가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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