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수도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트리샤는 자신이 홀린 기사들에게 그나마 황실 사냥터로 출입하는 것이 쉽다는 정보를 듣고 발을 옮겼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입궁했다가 자칫하면 비비안을 먼저 만나는 수가 있었다. 그건 트리샤가 원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은 준비성이 철저해야지.”
트리샤는 루카스의 개를 홀렸던 가루약을 품에서 꺼냈다. 마침 바람이 부는 방향이 좋았다. 이 정도 양을 한 번에 사용한다면 개들은 우리를 부숴서라도 트리샤에게 올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트리샤가 유인하는 것은 루카스였다.
“음, 당신들은…… 저 숲으로 돌아가요.”
트리샤가 기사 둘을 보고 싱긋 웃었다. 이제 필요가 없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서로 죽을 때까지 싸워 보는 건 어때요?”
붉은 눈동자가 두 기사를 번갈아 봤다. 주술은 조종하는 이가 가까울 때 그 효과가 확실해졌다. 멍한 표정의 기사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을 때까지…….”
“네, 하지만 여기서 말고 저 숲으로 돌아가서.”
트리샤의 손가락이 방금 건너온 숲을 가리켰다. 오늘 밤, 황궁의 소란은 자신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기사 둘은 너무도 쉽게 트리샤의 조종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트리샤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바람의 방향을 다시 확인하고, 개를 끄는 가루를 한 움큼 뿌렸다.
“자, 어서 오렴.”
붉은 힘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와 가득 채웠을 때, 트리샤는 전에 없는 환희를 느꼈다. 그것을 기점으로 세상은 완전히 변했다. 마녀인 자신의 말은 이제 주문이었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귀한 자라고 해도 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건 저주가 아니야.”
트리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곧 개들이 소란을 피우면 그 주인인 루카스가 나설 테고, 트리샤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원할 것이다.
일단 루카스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그를 미혹시키는 것은 쉬울 것이다. 마치, 서로 죽이기 위해 싸우러 간 그 기사들처럼 말이다.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다고.”
트리샤는 어머니처럼 한심하게 살지 않을 거다. 이 힘을 저주로 여기던 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숨기며 고작 한량밖에 안 되는 아버지에게 맞고 살았지만, 트리샤는 아니었다.
붉은 일족의 힘은 트리샤에게 찬란한 미래를 보여 줬다. 루카스를 제 손아귀에 빠트린 후에 받는 후작위는 달콤할 것이다.
“그래, 금방이면 돼.”
그 어떤 마법보다 잊고 있던 기억 속에서 떠오른 자신의 모습이 강력한 힘을 주고 있었다. 루카스 곁에서 이 제국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제치고 더욱 반짝이던 자신의 모습은 꿈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시작하는 거야.”
트리샤의 인생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
며칠 후, 드디어 트리샤의 움직임이 잡혔다. 샤리즈 후작이 연금을 당한 것이다. 에드윈이 내밀히 알아본 황실의 상황은 더 심했다. 루카스가 황태자비를 심하게 질책하고 마찬가지로 처소에 연금했다는 내용이 들렸다.
“트리샤가 황실에 돌아갔군요.”
디아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크게 뭔가를 바꾸지는 못한 것 같아. 아무래도 전능한 힘은 아닌 모양이지.”
에드윈이 덧붙였다.
이른 오후였다. 언제나 남의 눈을 피해서 만났던 것이 무색하게 에드윈은 버젓이 공작저의 응접실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었다. 이미 선대공비에게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지만, 디아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실종됐던 기사들을 심문한 딜런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루모스 기사단은 정찰을 나갔다 사라진 기사들을 쫓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발견됐는데, 어째서인지 진검으로 결투를 하던 중이었다.
“최면 내지는 문자 그대로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주술이겠지. 하지만 그 효과가 절대적이진 않은 것 같더군. 기사 중 한 명은 결투 중에 제 의식을 찾고 상대를 말리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둘 다 목숨을 구한 셈이지.”
“그건 트리샤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일까요, 그 기사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일까요?”
“두 사람 모두 의지는 강했다. 우연인지 먼저 치명상을 입은 쪽이 의식을 찾았다. 그게 어떤 전환점이었을 수도.”
“그래요.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사악한 힘이니까요.”
디아나는 잠시 입을 닫고 차를 머금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날, 수도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깨어나자 곧 에드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채비를 했다.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에 트리샤가 할 일을 알아야 해요.”
디아나가 천천히 생각을 되새기듯 말했다. 트리샤처럼 마법을 부릴 수도 없으니 혼란스러운 문제였다.
“저는 트리샤를 떠올릴 때, 감정을 배제할 수가 없어요.”
디아나는 여태 너무 다양한 트리샤의 모습을 봐 왔다. 정말 친구의 구원을 바라던 순수한 소녀의 모습부터 자신을 살해하며 웃던 모습까지. 어쩌면 가장 트리샤를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반대로 지금의 트리샤에게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전하는 아니죠.”
다행히 눈앞에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자가 있었다.
“만약 전하가 트리샤의 처지라면, 갑자기 그런 힘을 얻게 돼서 황실에 들어갔다면…… 무엇부터 할 건가요.”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군.”
이번에는 에드윈이 생각에 잠겼다. 트리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미 상식을 벗어난 힘을 얻은 사악한 마녀를 어떻게 대공으로서만 살아온 에드윈이 가늠하겠는가.
“어려운 문제다.”
“트리샤가 가진 힘과 지금의 환경만 생각해서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건요? 전하는 황태자 전하를 잘 아시잖아요.”
“흐음.”
에드윈이 애매한 소리를 냈다. 루카스를 떠올리자 절로 그의 눈살이 찌푸려 들었다. 그 난폭하고 저열한 취향을 생각하면 혈연이라는 것이 역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루카스의 나약한 면도 잘 알고 있었다.
“실종됐던 기사들의 상황을 보면, 주술이 완벽하게 사람을 인형처럼 조종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바로 황태자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모험은 못 할 거다. 그 성정을 안다면, 더욱.”
루카스의 곁에 있는 트리샤가 모를 리 없었다. 루카스가 상대라면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래요. 트리샤는 눈치가 빠르니까 모를 리 없겠죠.”
“아마 훨씬 더 공을 들이겠지. 내 기사들처럼 일회용으로 소모할 상대가 아니니까.”
자신의 기사단원이 당했다는 것 때문에 에드윈은 이미 분노를 품고 있었다.
“어느 정도 환심을 사고, 바로 곁에서 조종하려 들 거예요. 먼저 내궁에서부터 활개를 치겠죠. 황태자비를 배척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니까요.”
디아나가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덧붙였다. 이제 조금씩 트리샤가 할 행동의 가닥이 잡혔다.
“……그럼 위험하군.”
에드윈이 여태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건, 우리의 일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어.”
“네?”
에드윈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었다. 디아나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치며 그에게 되물었다. 에드윈은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사악한 주술을 쓰는 자라면, 혹시 손쉬운 독살도 가능한가?”
“네, 그럴 거예요.”
이전의 생에서 디아나는 트리샤의 극독에 당해서 고통 속에서 죽어 갔다. 트리샤의 술수가 얼마나 잔혹했던지, 몸과 입을 마비시키고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고통만 느끼도록 극독을 피부로 흡수시켰던 걸 잊을 수가 없다.
“아니, 확실해요. 본래도 약초를 다루는 데 아주 능숙했고, 제 어머니에게 배웠다고 했으니. 하지만 황태자 전하를 독살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잖아요.”
“내가 걱정하는 건…… 황태자가 아니다.”
“그럼요?”
에드윈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오래전의 일이라 그대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선 한 번 발작을 일으키신 후로 병상에 누워계신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라 황후 폐하가 직접 돌보는 것 외에는 모든 접촉이 차단된 상태지. 하지만 친아들인 황태자 전하의 알현까지 배제하진 않을 거다.”
“설마.”
“그것이 황태자를 조종할 수 있다면, 최악의 경우엔…… 황제로 만들 수도 있어.”
무거운 말에 공기가 굳어졌다. 디아나의 기억에 황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드윈의 설명을 듣자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루카스가 자처해서 부황을 보러 갈 리가 없었으니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황제는 병세가 깊어져서 목숨을 잃고, 자연히 루카스가 황제가 됐다. 그러나 트리샤는 그걸 앞당길 수 있었다.
“즉, 제국 전체의 위협이 된다.”
황태자인 루카스를 억지하는 것은 황후였다. 그러나 황제가 된 루카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태 구속처럼 여겼던 제 어머니는 물론이고 드노아 경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황후와 외척 세력은 의식이 없는 황제를 둔 채 선위를 미뤄 왔다.
“최악의 조합이군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폭군과 그를 미혹하고 기분을 맞출 수 있는 마녀가 함께라면 당장 제국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전에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건 디아나일 것이다.
“그걸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에드윈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실의 일, 특히나 병상에 있는 황제에 대한 문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제의 병상이 어디에 있는지는 황후와 황태자만이 알았고 입에 올릴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대공이라도 참견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겠네요.”
“그래,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불경죄가 될 수 있으니까.”
가슴이 확 답답해졌다. 트리샤가 무슨 짓을 할 줄 예상하면서도 이대로 손을 놓고 봐야 한다니. 이러다 정말 루카스가 황위에 오르면 디아나가 불리해질 것이다. 그나마 루카스를 누르고 있는 황후와 그 세력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치세가 펼쳐질지 뻔했다.
“어쩌면, 처음에 했던 생각처럼 북쪽으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에드윈은 진심으로 디아나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몇 번 안 되는 공식 석상에서 디아나를 집요하게 좇던 루카스의 녹안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눈빛에선 욕망과 비뚤어진 집착이 강하게 묻어났다. 어릴 적부터 루카스를 봐 온 에드윈이기에 오해했을 리는 없었다.
“그것도 문제지만, 루카스 그놈 자체도 만만치 않은 문제야.”
이제 에드윈은 대놓고 황태자를 낮춰 말했다. 디아나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을 볼 때부터 에드윈의 마음은 루카스를 완전히 적으로 식별했다.
“그 미친 자식이 그대를 황실로 불러들인다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건 디아나가 여태 해 온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아마 트리샤는 세 사람의 원점을 원할 것이다.
원점, 바로 그 비참한 죽음을 불러온 끔찍했던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