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어서 트리샤를 쫓아야 한다는 디아나의 고집에 결국 에드윈이 지고 말았다. 에드윈은 수도원의 작은 마차 두 대를 빌려서 공작저로 출발했다.
디아나는 사라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이 컸는지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다가 이내 에드윈의 무릎을 베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니…….”
에드윈이 낮은 혼잣말을 뱉었다. 디아나는 분명 사라에게 트리샤가 빙의된 순간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끔찍한 광경을 혼자 지켜보게 하다니,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딜런의 보고에 따르면 정찰을 나갔던 기사 둘의 종적이 묘연했다. 트리샤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들을 이용해서 수도로 돌아가고 있을 게 뻔했다.
“진작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에드윈이 후회의 말을 입에 담았다. 디아나가 트리샤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죽였어야 했다. 설령 디아나의 뜻과 다르더라도 그때 에드윈이 나섰다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그 후에 디아나의 원망을 산다고 해도 그게 나았을 거다.
“그렇지 않아요, 전하.”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디아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디아나는 여전히 에드윈의 무릎에 고개를 눕힌 채로 살며시 눈을 떴다.
“혼잣말이었다.”
“그래도 이미 들었는걸요.”
디아나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에드윈이 만류하듯 백금발을 쓰다듬었다. 무서운 일을 겪었으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디아나는 잠자코 에드윈의 무릎에 누운 채 그의 흑안을 올려다봤다.
“아직 죄인이란 증거가 없는 사람을 죽이면, 전하는 살인자가 돼요.”
“상관없다.”
“아뇨. 전하를 그렇게 만들면 절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디아나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생각이었다. 몇 번의 생을 거듭했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과거 트리샤가 자신을 살해했고, 마녀의 힘을 썼지만, 그전까지 트리샤는 영악한 소녀에 불과했다.
“제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시지요?”
누군가는 디아나를 바보 같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약해 빠졌다고, 그러니 매번 트리샤에게 당하는 거라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디아나는 각성하기 전의 트리샤를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건 단죄가 아니라 살인이 된다. 그래서는 트리샤와 다를 것이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순진하다고요.”
디아나가 에드윈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백금발을 어깨 뒤로 넘기며 에드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떤 악연은 반드시 정면으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디아나가 살아갔던 기억에서 트리샤를 살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이어지는 하나의 의지였다. 항상 같은 악연으로 엮이는 운명의 커다란 흐름처럼, 디아나는 하나의 의지를 간직하고 싸웠다.
그 결과가 늘 패배였다고 해도, 디아나는 끝까지 트리샤보다 못한 인간이 되는 것을 택하지 못했다. 어떤 운명은 반드시 정해진 방법으로 맞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우유부단한 것도 순진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여.”
누구에게도 이해를 바라지 않았던 마음이다. 그러나 에드윈은 담담히 디아나를 봤다.
“오히려 그대의 마음을 본받고 싶군. 상대가 사악한 마녀인데도, 그대는 끝까지 한 사람으로 싸우고 있어. 그것도 굳은 의지를 가지고 말이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난 그대가 그런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물을 상대하느라 똑같은 마물이 된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에드윈은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마물에 홀려서 똑같은 마물이 된 사람들을. 에드윈의 어머니도, 드노아 경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루카스 또한, 그런 환경의 희생양이었다.
모두 그렇게 자신이 상대하던 괴물의 모양이 되어 간다. 그들은 이겼을지 몰라도 영원히 패배한 거나 다름없었다.
“디나, 그대는 강한 사람이다.”
에드윈이 손을 뻗어 디아나의 뺨을 감쌌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사라의 비정상적인 죽음을 목격하고 이렇게 바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태 디아나가 거쳐 온 과정이 전부 그랬다.
“하지만 이제 상대는 명백히 사악한 힘을 쓰는 마녀. 혼자서 너무 앞서나가는 건 금지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대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사악한 것을 멸할 거다.”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생에서 디아나가 너무 쉽게 허를 찔린 것은 늘 혼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랐다. 사라의 병이 깊었기에 트리샤의 각성을 늦추는 것은 한계였지만, 여태까지의 모든 생에서 이만큼 트리샤를 따라잡은 적은 없었다. 아직, 승패는 갈리지 않았다.
“제게 몇 가지 생각이 있어요.”
언제까지나 트리샤의 기이한 힘을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전하의 기사단원 둘이 사라졌으니 아마 트리샤는 그들을 이용해서 바로 황실에 돌아가고 있을 거예요.”
“황실이라고 특정할 수 있나?”
“네. 제가 아는 트리샤라면 반드시…… 그것도 황태자 전하에게 돌아가겠죠.”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엔 확신이 있었다. 에드윈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디아나가 너무 확고한 탓에 반문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절 공격할 거예요.”
디아나는 바로 북쪽으로 떠날 계획을 수정했다. 트리샤가 원하는 것은 황태자비를 제치고 황태자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사라의 죽음 직전, 트리샤는 디아나를 향한 강한 암시를 남겼다.
“트리샤가 원하는 것 중에는 저 자신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대가 원한을 샀을 리는 없다고 보는데.”
“원한과는 달라요. 저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종류의 집착 같아요.”
트리샤의 집요한 감정을 설명할 단어가 달리 없었다. 트리샤의 목적이 디아나 자신에게 있는 한은 당장 북쪽으로 떠나는 게 정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사이에 트리샤의 힘이 강대해져서 루카스를 완전히 지배하에 둔다면, 훗날 닥칠 위험이 더 컸다.
“북쪽으로 떠나서 카를을 다스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어요. 당장 트리샤에게서 멀어지는 건, 도망치는 꼴이에요. 그랬다간 아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지도 모르고요.”
“그 부분엔 동의한다. 특히 그녀가 사악한 힘을 손에 넣은 이상, 매듭을 짓지 않고 떠날 정도로 내가 안일하지 않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의 유언대로 니콜라를 데리고 있는 게 뭔가 도움이 될 거예요.”
두 사람이 탄 마차의 뒤를 따르는 마차 한 대엔 니콜라와 그를 보살피는 하녀가 함께 타고 있었다.
“그리고 제롬 경이 동쪽 땅에 조사를 나간 지 꽤 됐으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길 바라야죠.”
“그가 답을 찾을 거라 생각하나?”
“네.”
디아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제롬 하이든의 능력 자체도 출중했지만, 그에겐 그 나름대로 이 일을 밝혀야 할 삶의 이유가 있었다. 그의 능력에 이유가 더해졌으니 반드시 진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루모스 기사단을 더 보내고 싶지만…….”
“아뇨.”
에드윈의 기사단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였다. 게다가 루모스 기사단의 본래 소임은 대공을 수호하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생각하면 여기서 인원이 더 빠지는 것도 곤란했다.
“카를의 발루아 기사단을 불러들였어요.”
“……수도로, 말인가.”
“네. 당장 제가 영지로 향할 수 없으니 현자 오웬 경을 통해 제 뜻대로 통치하고, 주요 가신과 기사단은 수도에 와서 충성을 맹세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제왕학을 배웠을 리도 없는데, 이 상황에선 에드윈도 선뜻 내리기 어려운 대담한 결정이었다.
“기사단을 다루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그것도 그렇게 유서 깊은 기사단이라면.”
“그렇겠죠. 제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도 있을 테고, 전하처럼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사이가 아니니까요.”
실제로 발루아 기사단에게 디아나는 타인과 마찬가지였다. 에드윈과 루모스 기사단의 유대감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노력해 보려고 해요. 루모스 기사단이 전하에게 충성하는 이유가 있듯, 발루아 기사단도 저에게 충성할 이유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기사단 하나 복종시키지 못한다면, 어차피 전 제대로 된 공작이 될 수도 없을 거예요.”
디아나는 자기 자신에게도 냉정한 잣대를 들이댔다. 상황이 나쁠수록 현실적인 시선을 갖는 게 좋았다. 이것도 반복된 생에서 배운 것이다. 막연한 희망이나 어설픈 기대감은 디아나의 허점이 될 것이다.
“물론, 기사단이 제롬 경의 조사를 도울 수는 없을 거예요. 그건 제롬 경 스스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할 일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힘이 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해요.”
“그렇겠군.”
에드윈은 디아나의 눈동자에 맺힌 결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인으로서 바라보던 디아나와는 새삼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담긴 건 뺨을 장밋빛으로 붉히고, 제 아래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여인이 아니라 제 운명과 맞서는 한 사람의 의지였다.
“난, 뭘 하면 되지?”
“황실의 변화를 주목해 주세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요.”
“트리샤가 황실로 들어가게 둘 셈인가?”
“어차피 트리샤의 자취는 놓쳤죠.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보다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게 하는 게 나아요. 그리고 트리샤가 성공한다면, 곧 황실에 변화가 생길 거예요.”
에드윈은 얼핏 루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디아나의 예상대로 트리샤의 목표가 루카스라면 제국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이자 안하무인에 난폭한 루카스가 트리샤의 조종을 받게 되면 제국의 미래도 위협받을 것이다.
“다른 건?”
“아뇨, 그걸로 충분해요. 지금도 자꾸 전하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그만.”
에드윈이 손가락으로 디아나의 입술을 막았다.
“그런 말은 이제 듣고 싶지 않다. 잊은 건가? 결혼식을 치르지 못했을 뿐, 우리는 이미 서로의 반려라는 것을.”
에드윈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절절하게 울렸다. 디아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먹먹해진 눈동자로 에드윈을 바라봤다. 지금 디아나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난 내 유일한 반려를 지키지 못할 만큼 무력한 남자가 아니다.”
그러나 에드윈이 디아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당장도 트리샤를 쫓다가 소중한 기사단원을 둘이나 잃었다. 그건 에드윈이 디아나와 만났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공으로 살았다면 그에겐 닥치지 않았을 시련이 너무 많았다.
“그대 때문이 아니야. 전부 내가 그대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툭, 디아나의 뺨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