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 순간, 디아나는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그저 사라의 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
디아나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어, 벌써 눈치챘어?”
키득, 사라가 웃었다. 아니. 이건 사라가 아니다.
“하마터면 내가 늦을 뻔했네. 그래도 우리의 원래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 게 운명인가 봐?”
“트리……샤.”
“역시 너도 다 알고 있었구나.”
자꾸 키득이는 웃음이 소름 끼쳤다. 사라의 마른 얼굴에서 유난히 눈동자만 빛나는 게 기이하게 보였다.
“이쯤 되면, 너도 날 사랑하는 거 맞잖아.”
“끔찍한 짓 그만해!”
디아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잘해 줬는데 아쉽지만, 이번에도 내 승리야.”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사라의 희번득한 안광이 돌아왔다.
“이런…… 그, 그만! 나가!”
발작보다 강한 힘이었다. 앙상한 팔이 너무도 쉽게 구속하고 있던 끈을 끊어 버렸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라는 괴로움 끝에 쿨럭, 검은 피를 뱉었다. 그리고 그 피로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라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디아나는 그녀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게, 내 마지막…… 주술……. 시간이 없어. 니콜라, 니콜라를…….”
“부인!”
“트리샤를 멈추려면 니콜라를 지켜야 해.”
디아나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죽어 가는 사라가 한 마디라도 더 남길 수 있도록.
“잘 들어, 우리 일족의 저주는…… 동쪽 땅의 붉은 제단 아래…… 아아, 어머니…….”
마지막 말은 거의 꺼져 갈 것같이 작았다. 그러나 그 말조차 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사라의 눈이 감겼다. 짐작건대, 그녀의 마지막 숨결이었다. 그것은 부자연스럽게 뚝 끊어졌다. 그 순간 이곳에 존재하던 기이한 느낌이 사라진 것 같았다.
“공작님!”
병상 안이 지나치게 고요해지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레이가 다가왔다.
“이미…… 죽었군요.”
“그래.”
축 늘어진 사라 블랑의 손끝엔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방금 숨을 거뒀어. 적어도 마지막엔 그녀 자신이었겠지.”
그레이는 디아나의 묘한 말에도 되묻지 않았다. 그레이는 침착했다. 그는 황망하게 서 있는 디아나를 대신해서 사라의 손이 그린 문양을 수첩에 똑같이 베껴 그린 후 물로 흔적을 지우고 수도사를 불러왔다.
“부인이 숨을 거뒀군요.”
늙은 수도사는 놀랍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만큼 그녀의 수명이 다해 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달리 유언이 있었습니까.”
“내게 니콜라를 부탁했다. 그 뜻을 들어줄 생각이다.”
“공작님의 자비로움에 부인의 영혼도 감사할 겁니다.”
디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도사는 하얀 면포를 가져와서 사라의 시신을 덮었다.
“조용히 장례를 치러 주도록. 그 후엔 본래의 수도원으로 돌아가시게.”
그레이가 디아나의 뜻을 대신해서 마무리했다. 그때 창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가 원치 않던 에드윈의 행차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지금 그 사실에 안도를 느꼈다. 사라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목격했던 기이하고 끔찍한 광경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디아나!”
오래지 않아 등 뒤에서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제야 지독한 피로와 충격이 몰려왔다. 디아나가 풀썩 쓰러지기 직전, 에드윈이 그 몸을 끌어안았다.
“에드…….”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를 보자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과 품이 느껴지자 죽음의 냄새가 멀어졌다.
“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남긴 디아나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덩굴나무 아래에 몸을 숨긴 트리샤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며칠 내내 숲을 거쳐 오느라 행색은 엉망이었지만,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영롱한 붉은색으로 빛났다.
“마지막 목숨을 그렇게 낭비하다니, 한심하게도…….”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냉소적인 혼잣말이었다. 사라는 트리샤의 정신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다 죽어 가는 목숨에 주술을 사용했고,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로 죽었다.
비록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트리샤는 그 죽음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강력한 힘이 차오르는 마법 같은 이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하긴, 다 죽어 가는 주제에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지. 그건 일족이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하는 건 트리샤이자, 트리샤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강대한 마력이 흘러들어 온 순간, 트리샤의 영혼은 그 힘과 일부가 섞였다. 그건 트리샤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분리되지 않을 결속이었다.
“이제…… 전부 이해할 수 있어.”
트리샤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숲을 헤치고 오느라 거칠어진 손은 예전의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매일 약초를 구하러 다녔던 고생, 의미도 알 수 없는 책을 달달 외우게 시켰던 사라의 지독한 강박.
“후, 그것만은 고맙다고 해야겠네.”
괴상하게 생긴 도형과 뜻을 알 수 없는 문자들의 나열, 그 책을 베껴 쓸 수 있을 정도로 외우느라 밤을 새웠던 나날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됐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더 괴로웠던 일상의 모든 기억이 제대로 된 규칙과 진리로 늘어서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어머니, 당신은 너무 유약했어.”
트리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력과 함께 선대의 모든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어떤 것은 희미하게 한군데 뭉쳐 있었고 사라처럼 가까운 사람의 것은 제법 뚜렷했다.
동쪽 땅의 이단 심문을 피해서 도망친 사라,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붙잡은 블랑 남작, 일족의 저주를 증명하듯 붉은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난 딸. 사라의 모든 희망과 절망이 섞인 대상은 바로 트리샤 자신이었다.
“진작 날 죽였어야지.”
트리샤의 미소는 입꼬리만 올라간 반쪽짜리였다. 신랄한 말을 하면서도 그 눈동자가 허망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늘 방관하며 자라게 했던 어머니를 증오했던 만큼, 그리고 동정했던 만큼.
“당신도 자기 어머니를 죽였으면, 더욱.”
웃고 있는데, 원래 얻어야 할 힘을 쟁취했는데, 어쩐지 혼잣말이 쓸쓸히 울렸다. 사라도 제 어머니를 죽게 했다. 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모두 같았다.
트리샤의 일족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딸이 자랐을 때 죽음을 맞았다. 그건 한 개인의 의지가 아닌,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피에 담긴 저주였다.
“바보같이, 평생 그걸 후회하고 있었나…….”
사라는 마지막에 자신의 어머니를 불렀다. 사라의 기억은 어머니의 화형을 지켜보는 데서 시작했다. 아마 그 원인 일부가 사라였을 것이다. 트리샤는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난, 아니야.”
트리샤가 눈을 똑바로 들었다.
“난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절대, 후회 같은 건 안 해.”
그제야 트리샤의 목소리에 제대로 힘이 실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바닥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험한 길을 헤치다 난 상처인지, 트리샤 자신이 세게 말아 쥔 주먹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용도라면 분명했다. 마침, 근처를 수색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트리샤는 손바닥 위의 피로 제 기억 속의 도형과 문자를 덧그렸다. 그건 본능처럼 너무 익숙하고 쉬웠다.
“저기요, 기사님들.”
트리샤가 덩굴을 헤치고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은 즉각 칼을 뽑아 들었지만, 그 칼은 허공에서 멈췄다.
“혹시, 누굴 찾고 있나요?”
“우린 붉은 머리의 여인을 찾고 있었어.”
기사 중 먼저 칼을 뽑은 쪽이 홀린 듯 대답했다.
“그래, 대공 전하의 명으로 도망친 시녀를 찾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혐의가 있다고 했어. ……우리는 루모스 기사단이거든.”
묻지 않은 진실까지 술술 대답하는 기사들은 이미 트리샤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힘을 직접 사용하기 전까진 반신반의했지만, 이제 트리샤는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찾았나요?”
“아니…….”
두 기사 모두 같은 말을 했다.
“기사단이라니 정말 멋져요. 그럼, 혹시 저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나요?”
“물론…… 물론이야.”
기사들이 칼을 집어넣고는 트리샤를 향해 관대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예전의 트리샤가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었다. 늘 자신을 경멸의 시선으로 보고 무시하던 기사단원들이 이젠 자신의 개처럼 굴다니, 이 멋진 힘을 왜 마다할까.
“그럼, 황궁으로 돌아가 볼까요?”
싱긋, 트리샤가 웃었다.
***
디아나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땐, 에드윈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디아나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에드윈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디아나를 말렸다.
내내 곁에 서 있던 그레이가 수도사를 불러왔고, 하녀가 디아나의 입술을 적셔 줬다. 수도사는 신중히 디아나의 상태를 살피고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스스로 상체를 일으켜 앉은 디아나가 제 손으로 물을 한 컵 전부 비워 냈다.
“전하.”
에드윈은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는 원망이나 질책이 한 조각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제가……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아요.”
트리샤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언제까지나 에드윈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가책이 디아나를 홀로 여기까지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사라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지만, 그 기괴하고 두려운 광경까지 혼자 지켜본 셈이 됐다.
“괜찮다. 그대의 선택이라면 뭐든 옳았을 거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디아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그레이는 두 사람을 보며 수도사를 내보냈고, 자신도 눈치껏 물러나려고 했다.
“그레이, 거기 있어.”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디아나의 발치에 걸음을 멈췄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할 거예요.”
디아나가 다시 에드윈을 보고 말했다. 마녀도 마법도 이상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여태까지 트리샤의 존재나 힘이 막연하게 사악하고 어두운 것으로 느껴졌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는 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디아나는 과거의 생에서 이미 트리샤의 농간으로 살해당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식을 초월하진 않았다.
“난 이미 디나 그대를 믿는다. 그 아무리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해도,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믿겠다.”
에드윈은 제롬과 달리 진실이나 증거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가 믿는 것은 그저 디아나였다. 근거가 없기에 더욱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레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주군인 디아나를 믿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대답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우선, 트리샤에게는 이미 사악한 힘이 생겼을 거예요. 이제 그건 막을 수 없어요.”
두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디아나가 정신을 잃은 사이 정찰을 나갔던 기사단원 둘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트리샤의 힘은…… 아마 우리 모두가 생각한 것보다 더 끔찍한 것 같아요.”
디아나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지만, 자신이 목격한 사라 블랑의 죽음과 유언, 무엇보다 기괴하고 소름이 끼쳤던 트리샤의 존재를 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