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에드윈이 급하게 사라의 요양원으로 향했을 때, 디아나 일행은 이미 도착한 후였다. 현장 근처를 지키던 루모스 기사단원은 그레이와 몇 마디를 나누고 사라의 무사를 확인했다. 디아나는 그제야 정신없이 달려왔던 말에서 내려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수상한 접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근처 숲을 수색하는 중이라고도.”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예. 사라 블랑도 요양원을 떠난 적이 없고, 이 정도 경계면 누구도 감히 접근할 수 없을 겁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평소 과묵한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사라 블랑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답니다. 자세한 것은 수도사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야겠어.”
디아나가 후드를 벗고 요양원 안으로 들어섰다. 애초에 사라 블랑만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인 만큼 규모는 일반 가정의 주택과 비슷했다.
“공작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이곳을 맡긴 수도사와 하녀는 갑작스러운 디아나의 출현에 바쁘게 예를 갖추고 차를 내왔다.
“내가 갑자기 온 거니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
“불을 좀 쬐시지요. 저는 사라 블랑의 증세를 기록한 일지를 가져오겠습니다.”
벽난로의 온기를 쬐자 제 뺨이 거의 얼어붙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지만, 외진 곳이라 오는 길이 퍽 험했고 마음이 급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을 달린 결과였다.
“그레이, 만일 후작가의 숲에서 여기까지 방향을 정확히 잡을 수 있다면…… 평범한 여인에겐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지?”
둘이 남자, 디아나가 작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가능할지는 제쳐 두고 말이야.”
“길을 잃지 않는다고 쳐도…… 상황을 생각하면 적어도 2일에서 3일은 꼬박 걸릴 겁니다. 훈련된 기사들도 먹지도 쉬지도 않은 채 숲길을 행군할 수는 없으니까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우리가 늦지는 않았단 거지.”
그레이는 트리샤를 아직도 내심 과소평가했지만, 어쩌면 디아나 일행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트리샤는 어릴 때부터 약초를 채집하느라 산길에 익숙했고, 어느 풀을 먹을 수 있는지 분간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집념은 어떤 기사의 정신력보다 강할 터다.
“추위가 좀 가셨는지요?”
늙은 수도사가 일지를 들고 왔다. 디아나는 눈짓으로 앉으라는 뜻을 전했다. 수도사는 공손하게 일지를 그레이에게 전달했다. 그레이는 다시 디아나에게 낡은 일지를 건넸다.
꼼꼼한 수도사의 성격이 일지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디아나는 잠시 페이지를 뒤적였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일지에 적혀 있었다. 사라 블랑의 폐병이 심각해서 병세 자체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나날이 쇠약해진다는 것, 그리고 최근의 갑작스러운 발작과 섬망 증세까지.
‘그 아이가…… 오고 있어!’
일지에는 사라 블랑이 섬망 중에 내뱉은 말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디아나는 그 의미를 분명히 알았다. 안 좋은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역시, 트리샤는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아마도 사라 블랑의 목숨을 거두고 제힘을 되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디아나가 막아야 하는 사태였다.
“그래서…… 지금도 진정제로 재우고 있다는 건가?”
“예, 방법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발작이 심해지면 안 그래도 쇠약한 몸이 축나기 마련이고, 발작을 멈추는 도리가 없기에.”
늙은 수도사는 평생 아픈 이를 돌봤다. 그는 병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았다. 사라 블랑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에 잠식된 채였다. 그의 역할은 그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뿐이었다.
“그레이.”
디아나가 일지의 한구석을 손으로 짚었다. 사라 블랑이 발작을 처음 일으켰다고 적힌 날짜였다.
“아…… 그렇군요.”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트리샤가 실종된 다음 날이었다. 디아나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럼 발작은 그 후로 계속?”
“예. 진정제를 먹여서 억지로 몸을 재우는 것 외에는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발작도 발작이지만, 섬망 증세가 유독 심해서…… 본인도 괴로울 겁니다.”
“섬망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지?”
“마치 악마에게 홀린 듯이 헛것을 보고 듣는…… 안타까운 증세입니다. 블랑 부인은 이미 폐병이 깊었지요. 깊은 병에 걸린 자들은 곧잘 섬망을 겪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섬망이 아닐 것이다. 사라의 피가 트리샤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다. 막연한 추측은 어느새 믿음이 됐다.
“사라 블랑은…….”
디아나가 말끝을 흐렸지만, 수도사는 그 뜻을 잘 알았다. 평생 병자를 돌본 그에겐 익숙한 질문이었다. 수도사는 한층 무거운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진한 체념의 기색이었다.
“병을 앓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처음 공작님의 명으로 수도원에 왔을 때도 이미…… 병세에 손을 쓸 수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부인의 본래 나이보다 몸이 훨씬 쇠약한 상태입니다. 마치, 노인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신비한 힘과 관련이 있을까. 그것까지 넘겨짚을 수는 없었지만, 사라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디아나가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병마에 죽어 가는 사람의 목숨을 붙여 놓을 수는 없다.
“부인을 직접 만나 보시겠습니까?”
“진정제로 재우고 있다더니?”
“곧 깨어날 시간입니다. 최근 진정제가 듣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요. 그렇다고 여기서 더 처방하면, 쇠약한 몸이 견디지 못할 테니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심각한가?”
물론 사라의 병세가 깊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돌본 수도사가 저리 체념할 정도라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공작님께서 직접 보시면 알 것입니다. 이전에 만나셨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어느 정도를 넘어 버린 병세는 급격하게 진행이 되는 터라.”
“아니, 수도원의 노력은 알고 있다.”
그때, 위층에서 소란이 들렸다. 하녀는 한숨을 쉬며 익숙한 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디아나와 그레이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하녀가 급히 들어가느라 닫지 못한 문 사이로 사라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아악! 안 돼!”
쇠약한 병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을 써 대는 소리에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묶인 사라의 사지가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팔이 구속한 끈을 끊어 버릴 것처럼 강한 힘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온다! ……오고 있어!”
“부인, 진정해요! 괜찮아요, 여긴 수도원이에요.”
하녀가 사라의 귀에 대고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디아나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사라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거의 해골에 가까운 사라의 눈동자는 지독한 암흑에 가까웠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타인이 죽어 가는 기척을 선명하게 느꼈다. 사라가 누운 병상엔 이미 죽음의 냄새가 지독하게 배어 있었다. 아마 디아나의 조치가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오고 있어, 도망쳐야 해…… 어서! 어서, 제발!”
사라의 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디아나는 자신을 막아서려는 하녀를 눈짓으로 막고 사라의 병상 가까이 다가섰다.
“더 가까워졌어! 온다, 와…….”
사라는 악을 쓰다가도 금세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기묘한 광경이었다.
“잠시 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공작님, 이미 대화는…….”
수도사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디아나도 눈이 있으니 알 것이다. 수도사는 잠시만이라고 단서를 둔 후에 하녀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
그레이는 눈치껏 병실의 입구를 지켰다. 물론 사라가 날뛴다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라의 악을 쓰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한없이 중얼거리고 뇌까리는 시간이었다. 수도사도 그것을 알아서 잠시만이라고 단서를 두고 둘을 남겨 둔 것이다. 어차피 곧 다시 발작이 찾아오면 진정제를 먹여야 했다.
“부인, 날 알아보겠어요?”
“도망쳐야 해……. 더 가까워졌어, 아…… 정말로 그 아이가 오고 있어…….”
디아나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사라가 두려움에 떨며 계속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정상적인 대화를 단념했다.
“그 아이가 온다는 건, 트리샤인가요?”
그제야 처음으로 사라가 시선을 들었다. 그러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가 여기로 오고 있나요?”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처럼 덜덜 떨면서 고개만 미친 듯이 끄덕이는 모습이 기괴했지만, 디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사라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있었다. 이 쇠약한 여인을 억지로 연명시킨다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트리샤 힘의 근원이 사라라면 그녀도 책임이 있었다.
“트리샤는 왜 여기로 오는 거죠? 왜, 트리샤가 오는데 당신이 두려워하는 거예요?”
“온다, 그 아이가…… 붉은 아이가 온다……. 도망쳐야 해…….”
“정신 차려요, 부인! 내 말을 듣고 대답해요! 그럼 내가 도망치게 해 주겠어요.”
“으으, 안 돼……. 안 돼, 싫어…….”
사라의 산만한 태도에 디아나는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결단은 부족하지 않았다. 디아나는 병상 옆에 있던 화병의 물을 냅다 사라에게 끼얹었다. 그러자 사라가 디아나에게 시선을 줬다. 디아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라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날 똑바로 봐요! 트리샤는 왜 여기로 오는 거죠?”
사라의 시선이 아직 멍했다. 그러나 분명 초점은 디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재차 사라를 세게 흔들었다.
“당신 딸이잖아! 왜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거야! 트리샤는 왜 여기로 오는 거야?”
“트리……샤…… 그래…… 내 딸, 트리샤…….”
쉬어 빠진 사라의 목소리는 여태까지와 조금 달랐다. 시선도 확실히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날 죽이러 오는 거야.”
여태까지와 다르게 분명한 발음이었다.
“날 죽여서, 붉은 힘을 빼앗을 작정이야. 나를…… 제 어미를…….”
더 알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사라의 맑은 정신이 유지되는 것은 잠시이리라.
“그 붉은 힘이란 게 대체 뭐죠? 숨기지 말아요, 난 이미 당신 모녀가 마녀라는 걸 알아. 그러니 도망치고 싶다면 솔직히 말해요. 그 붉은 힘의 정체는 뭐고,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그건 저주야, 저주……. 일족의 붉은 저주. 제 어미를 죽이게 만드는 몹쓸 저주. 아아, 어머니…… 난 정말 어머니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요. 내가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었어.”
사라가 도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힘의 정체를 말해요, 어서! 당신들 일족에 걸린 저주는 어떻게 푸는 건지…….”
디아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라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디아나를 바라보는 사라의 시선이 기묘했다.
“그 힘의 정체를…… 알고 싶니? 내 딸, 트리샤를 막을 방법?”
“그래요. 어떻게 없애는 건지도 알려 줘요. 내가 당신을 보호해 줄 테니.”
사라가 디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트리샤를 닮은 붉은 눈동자였다.
아니…… 그 눈동자는 완벽하게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