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눈앞의 안개가 한 꺼풀 걷힌 것 같았다. 디아나는 한층 뚜렷해진 시야로 현실을 주시했다.
이제 망설이거나,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두꺼운 털 로브의 끈을 조이는 디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가는 길은 위험하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샬롯은 저택을 지켜 줘. 대신 그레이를 데려가겠어.”
샬롯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지만,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레이는 만약의 상황에서 무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고 두 사람이 다 저택을 비울 수는 없었다. 이 경우엔 샬롯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공작님.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레이 집사장…… 잘 부탁해요.”
그레이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로브 아래에 완전 무장을 한 상태라 평소보다 훨씬 큰 산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샬롯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대공 전하께는…….”
디아나가 에드윈을 떠올렸다. 그가 안다면 분명히 디아나의 길을 막아설 것이다. 게다가 이미 루모스 기사단이 사라가 있는 요양원에 파견됐다. 그건 디아나까지 가야 할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굳이 먼저 알리진 마.”
“하지만 물으신다면 거짓은 말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샬롯은 디아나의 마음을 잘 읽었다.
“그래.”
굳이 걱정을 사고 싶지는 않지만, 그에게 거짓을 고하고 싶지도 않다는 곧은 마음이었다.
“다녀올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네. 전 공작님의 명령대로 이 저택을 지킬게요.”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곧 그레이가 준비한 말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그레이가 용케 불러온 용병 다섯 명이 앞뒤로 둘을 호위했다.
마차나 타고 여유롭게 나설 때가 아니었다. 슬슬 석양이 내릴 시간이었다. 디아나는 샬롯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길이었다. 바라는 것은 하나, 이번에는 부디 늦지 않기를.
***
디아나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딜런이 소식을 접했다. 디아나로선 굳이 묻지 않으면 대답하지 말라고 했지만, 에드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미 루모스 기사단의 최측근들은 교대하며 공작저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려는지 어두운 로브를 쓰고 용병과 함께 뒷문으로 나가는 디아나 일행을 봤으니 바로 보고하는 것이 당연했다.
“알았다. 우선 들키지 않게 뒤를 쫓도록. 여차하면 가세할 수 있게.”
딜런이 얼굴을 찡그린 채로 지시를 내렸다.
“먼저 요양원으로 파견한 이들은?”
“이미 도착해서 경비를 강화했습니다.”
“아마…… 그 주위에서 접근할 테니, 주변 검색을 강화하도록.”
기사단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딜런은 돌발적인 디아나의 행동에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설마 용병을 고용해서 직접 말을 타고 갈 줄은 예상치 못했다.
딜런 또한 디아나가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단순히 공작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한 행보인데, 한발 늦었다.
“하필, 이럴 때.”
딜런이 초조한 듯 혀를 찼다. 지금 에드윈은 선대공비의 부름으로 독대에 응하고 있었다. 흔한 일도 아닐뿐더러 최근 제 아들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의심을 한 선대공비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딜런이 노려보는 애꿎은 문 너머에선 이 사실을 모르는 에드윈이 묵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딜런의 예상대로 모자간은 싸늘한 분위기였다.
“지금, 뭐라고…….”
선대공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아들을 바라봤다.
“카를 공작가와의 관계를 물으셨잖습니까. 그래서 답해 드린 겁니다만.”
에드윈은 태연하게 그레이스를 봤다.
“에드윈!”
“언성을 낮추시지요.”
그레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아들을 노려봤다. 분명 제가 낳아서 기른 아들인데 눈앞에 전혀 다른 남자가 앉아 있는 것처럼 낯선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변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이 아는 아들은 아니었다.
“영원히 지속하는 불가침 동맹, 그게 카를 공작과의 관계입니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조금 전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웃기는 소리! 체스터 대공가는 황실을 상대로도 그런 조약을 맺은 적 없다. 아니, 이 제국에 그런 동맹은 없어.”
황태자비 사건 이후로 그레이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디아나 카를이 이런 식으로 수면에 떠오를 줄은 몰랐다.
그레이스가 생각하는 제 아들은 고작 여인의 미모에 홀릴 사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대공의 자질을 타고난 그레이스의 자랑이었다.
“난 인정할 수 없다.”
“상관없습니다.”
“……뭐?”
그레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가문 간의 조약이 아닌, 에드윈 체스터와 디아나 카를 사이의 약속입니다. 당사자 외의 허락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제가 대공이고, 디아나 카를이 공작일 뿐.”
“그러니 더욱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어머니는 지금 제가 대공임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타인과 약속조차 나누지 못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자입니까.”
그레이스의 손톱이 제 손을 파고들었다. 지금 에드윈의 표정은 익숙했다. 작고한 그레이스의 남편이자 에드윈의 아버지인 선대 대공이 보여 줬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런 표정을 지었을 땐, 자신의 결정을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였다.
“내가 널 낳은 어미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유가 되겠지.”
깊은 한숨이 그레이스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뭐냐, 무엇이 널 그리 만든 거냐. 동맹이니, 조약이니 하는 그럴싸한 단어는 그만둬라. 난 내 아들이 여태 내 눈을 속이고 누구와 무엇을 나눴는지 묻는 거다.”
그레이스는 아직도 생생한 디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에서 느꼈던 이질감이 선명했다. 그 예감대로 디아나는 선대공비의 협박 어린 경고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황태자비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곱게 보이지 않는데, 어느샌가 소리도 없이 제 아들의 곁에 그 이름이 맴돌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니, 우린 뜻이 잘 맞더군요.”
“그러니까, 도대체 언제…….”
“중요한 건 지금입니다, 어머니.”
어차피 다 늦은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말끝을 후회로 흐렸다. 미리 알았더라면, 디아나를 독살해서라도 이런 꼴을 막았을 터다.
“같은 시대, 같은 땅에서 군주로서 같은 뜻을 품고 있으니 함께 걷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으니 목숨이 있는 한 그 약속을 지킬 겁니다.”
에드윈의 새카만 흑안이 이미 늦었다는 것을 재차 상기시켰다.
“군주로서……?”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노골적인 조소였다.
“네, 군주로서. 그리고 에드윈 체스터라는 한 사람으로서. 이제 답이 되셨습니까?”
에드윈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레이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런 에드윈을 좇았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며칠을 이야기해도 이미 결론은 정해졌습니다.”
그레이스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루카스와는 달리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장성한 아들이 지금 이렇게 자신을 배신할 줄은 몰랐다.
실은 에드윈도 그 허점을 노린 것이다. 어려서부터 제 어머니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에드윈이었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관계를 허락받을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제 답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어떤 노력을 하셔도 이미 답은 정해졌습니다.”
“정신 차려라. 난, 네 어머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겁니다. 어머니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에드윈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어머니가 어떤 기분으로 자신을 길렀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의 본성도 잘 알았다. 표면은 온화하지만, 그녀의 안에도 드노아 경의 피가 짙게 흘렀다.
그레이스가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는 아마 고귀한 영애를 대공비로 맞은 후, 막후에서 선대공비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황후를 짓누르는 것이리라.
“어머니의 아들은 이미 어엿한 대공이 되어 가문에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것만으로 만족하라는 경고였다. 여태 그레이스의 뜻에 거스르지 않았던 것은 에드윈이 부담 갖지 않을 정도의 요구만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선을 넘는 즉시 거부하겠단 뜻이었다. 현명한 그레이스가 제 아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리는 없었다.
“그래, 내게 통보하는 거구나.”
에드윈은 답하지 않았다. 긍정이었다.
“그럼 나도 통보하마. 디아나 카를을 이 가문에 들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에드윈은 피로감이 몰려오는 눈빛으로 제 어머니를 주시했다.
어차피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의 어머니와 디아나를 붙여 둘 수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에드윈에게 소중한 존재였지만, 어머니의 야망과 아집을 위해서 디아나가 비난받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무슨 약속을 했든, 그게 대공가에 조금의 흠결이라도 남겨서는 안 될 거다. 그건 네 소명을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레이스의 말에 뼈가 있었다. 의회에서나 황실에서 노골적으로 디아나의 편을 든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건 드노아 경의 경고이기도 했다.
“대공인 저보다, 대공가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에드윈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흑안으로 차갑게 말했다.
“허, 그렇게 나오겠다면…… 그래, 어디 해 봐라. 대공비를 결정하는 데, 선대공비의 동의가 없이 진행할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구나.”
에드윈은 사소한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결혼을 미룬 건 디아나의 결정이었지만, 밀어붙이려고 하면 당장이라도 제 어머니를 꺾을 자신이 있었다. 그건 타고난 체스터가 사내들의 뚝심이었다.
“저는 이만 공무로 바빠서 물러가겠습니다.”
선대공비가 노려봤지만, 에드윈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에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그레이스는 울분을 풀지 못한 채 조용히 제 주먹을 의자의 손잡이 위로 내리쳤다.
에드윈이 딜런의 급한 전갈을 들은 것은 그 직후였다.
“저어, 선대공비 전하.”
시녀장이 들어와 선대공비의 안색을 살폈다.
“뭐냐.”
“대공 전하께서 방금 루모스 기사단의 일이라며 딜런 경과 급히 말을 몰아 대공저를 떠나셨습니다.”
참지 못한 선대공비가 허, 실소를 뱉었다. 대놓고 어머니인 제 뜻을 거스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단순히 자식의 반항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에드윈은 이미 어엿한 대공인 데다 체스터 대공가의 유일한 계승자였다. 무엇보다 에드윈 본인이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지.”
그레이스가 차가운 혼잣말을 뱉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떳떳하게 대공가에 들어올 수 없을 거다.”
에드윈에게 자신의 방식이 있다면,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정식으로 결혼을 인정받기 위해선 당연히 선대공비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디아나는 평생 불명예스러운 대공의 애인으로 남아야 했다.
“급한 건 내가 아니니까.”
시간은 많았고, 그레이스는 여유로웠다. 적어도 그레이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