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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30화 (130/184)

130화

고요했던 요양원이 발칵 뒤집혔다. 유일한 환자이자 카를가의 특별한 분부가 있었던 사라 블랑이 밤새 고열로 경기를 일으켰다.

본래 쇠약했던 사라는 겨울이 지나며 점차 기침으로 제 몸을 갉아먹어 왔다. 카를가의 당부가 없었다면 이미 쇠약해져서 죽었을 것이다.

“안 돼, 안…… 돼!”

또 섬망이 온 것인지 사라가 몸부림을 쳤다. 요양원의 하녀는 그런 사라의 수족을 구속했다. 자칫 자신의 몸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카를가에서 직접 부탁을 받은 수도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사라를 달랬다.

“부인, 진정하세요. 무리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수도사가 하녀에게 눈짓했다. 빨리 진정제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사라의 병은 이미 너무 깊어 현재의 의술로 치료할 수는 없었고 그저 충분한 영양과 안정으로 현상을 유지하는 게 다였다. 여태까진 순조로웠는데 일전의 폭우가 지나자 사라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오고 있어…… 여기로…… 그 아이가…… 오는 거야…….”

“부인, 여기는 안전합니다. 부인은 악몽을 꾼 거예요.”

“아니야! 그 아이가 오고 있단 말이야!”

쇠약한 병자의 몸에 뭐 이리 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사라를 묶어 둔 구속구가 끊어질 뻔했다. 그간 사라를 간호해 온 수도사로선 처음 보는 발작이었다.

“부인! 진정해요. ……어서, 이쪽으로.”

수도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진정제를 가져온 하녀를 재촉했다. 사라는 약을 먹이려는 것을 알고 발버둥을 쳤지만, 다행히 구속구가 제 몫을 해 주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그 아이가 오고 있단 말이야!”

“꽉 붙들어! 부인, 우선 약을 먹어야 해요.”

하녀가 사라를 붙든 사이 수도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그 안으로 달인 약을 흘려 넣었다. 발작 이후로 강한 진정제를 사용했기에 사라의 발작은 곧 잦아들었다. 그녀의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수도사와 하녀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안…… 돼…… 그 아이가…… 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던 사라가 까무룩 잠들었다. 수도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라를 바라봤다. 여태까진 쇠약한 환자였지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수도사님, 그 아이가 온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니콜라라면 여기 있잖아요.”

“부인이 악몽을 꾼 모양이지. 신경쇠약을 겪는 자들은 가끔 발작을 일으키고 현실을 혼동해.”

“하지만, 부인은 여태 그런 증상이 없었잖아요.”

수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가 소모되면 정신에도 영향이 가는 법이지. 하지만 카를 공작저에 보고해야겠어.”

늙은 수도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섬망이나 발작도 문제였지만, 그게 쇠약해진 육체를 더 빠른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병이 전신에 퍼진 사라의 목숨을 붙들어 두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네. 저는 여기서 부인을 지켜볼게요.”

사라 블랑은 일반적인 요양 대상이 아니었다. 카를 공작저의 특별한 부탁과 감시까지 포함해서 외딴곳에서 그녀를 보호했다.

당연히 이 사안을 보고하는 것이 수도사의 일이었다. 마침, 요양원엔 제롬 경이 두고 간 감시자 겸 보고자가 있었다. 수도사는 그에게 사라의 이변을 전했다. 이제 그가 제 역할을 할 차례였다.

***

결국 숲으로 도망친 시녀의 행방은 실종으로 처리됐다. 샤리즈 후작가도 루모스 기사단도 그 숲 안에서 트리샤 블랑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나 들짐승에게 당했을 거라는 결론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트리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디아나가 무거운 목소리를 내려놓았다.

“어두운 숲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야.”

“저도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샬롯의 말에 그레이도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의 존재를 믿고 말고는 그들의 자유였지만, 그들의 주인인 디아나가 불안에 떠는 상대라면 그 뿌리를 뽑아야 했다.

“하지만 그 숲에서 빠져나왔대도 범죄자의 신분이잖아요. 쉽게 움직일 수는 없을 텐데요.”

샤리즈 후작가는 이미 시녀가 도둑이라고 공표했다. 당연히 전국의 수배 전단에도 올랐을 것이다. 트리샤가 살아 있어서 곤란한 건 샤리즈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난, 트리샤가 어디로 갈지 알아. 아니, 알 것 같아.”

디아나가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에드윈의 루모스 기사단이 트리샤를 찾아내지 못했단 소식을 듣고 밤새 이성적으로 고민했던 디아나다.

트리샤에게 마력이 있다면, 디아나는 몇 번의 반복된 생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트리샤의 기억은 원작에서 살았던 한 번의 생일 것이다. 기억과 정보의 차이는 디아나가 트리샤를 상대할 가장 큰 무기였다.

“트리샤는 제 부모를 찾아갈 거야. 정확히는 사라 블랑을.”

“다행히 사라 블랑은 우리가 확보하고 있잖아요. 트리샤는 그 장소도 모르지 않나요?”

“하지만 알아내겠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라도.”

반복된 생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면, 트리샤의 마력이 부모가 죽은 후에 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선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만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물려준 어머니만이.

“내 추측대로라면, 사라 블랑이 죽어야만 트리샤에게 힘이 생기는 것 같아.”

“설마…… 자기 어머니를? 아니죠. 우리 상식으로 판단해선 안 되죠.”

“그래.”

여태 디아나가 패배했던 건 트리샤의 행동이 상식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친구라면, 딸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 극독을 당해서 고통 속에서 죽어 가던 디아나를 보면서 미소 짓던 트리샤의 얼굴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트리샤가 제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실제로 디아나가 사라의 보호를 맡은 후 단 한 번도 제 모친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는 무정한 딸이었으니까.

“사라 블랑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서 지켜야 해. 트리샤는 저절로 올 거야.”

“대공 전하께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그레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말수가 적었지만, 행동은 누구보다 빨랐다. 디아나는 잠시 샬롯이 건네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항상 전하의 기사단을 쓸 수밖에 없는 걸까.”

디아나는 지금 명백한 카를 공작이었다. 그러나 루카스에게 발목이 잡혀서 아직 제 영지를 구경도 못 했다. 카를에도 우수한 기사단이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항상 모든 것을 에드윈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샬롯, 아버지께선 수도에 오신 후로 어떻게 카를을 통치하셨지?”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숙부인 아론은 영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디아나의 선친은 훌륭한 공작이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증거로 현자인 오웬이 직접 와서 디아나의 공작위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선친께서는 수도에서 공무를 맡으신 후로 영지에 자주 가시진 못했지만, 그대로 이곳에서 공무를 보셨고 그 명령을 하달받은 가신들이 그 뜻을 따라 카를을 수호했죠.”

“그래, 그렇겠지.”

대부분 고위 귀족이 수도에 있는 지금 시대엔 흔한 일이었다. 디아나도 그중 하나가 된 것이다. 굳이 직접 영지에 가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디아나의 입지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명백히 황실에서 공작위를 계승했고, 현자인 오웬이 와서 그것을 지지했다.

“내가 또 늦었어.”

디아나가 한발 늦은 깨달음을 삼켰다.

“네?”

“명령할 권한을 넘겨받고도, 뭘 더 기다린 거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제부터 디아나의 발자국이 길이 되는 것인데 또 바보 같은 짓을 했다.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겠다고 말만 했지, 아직도 완전히 껍질을 깨부수지 못했다.

그러나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샬롯, 종이와 펜을 줘.”

“여기요, 아가씨.”

샬롯이 건넨 펜을 받아 들고 뭔가 쓸 준비를 하던 디아나가 잠시 손을 멈추고 샬롯을 봤다.

“샬롯.”

“네, 아가씨.”

“내가 이 서신을 다 쓰고 나면……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샬롯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샬롯의 귀한 아가씨가 아닌 카를의 공작이었다. 늘 신중한 샬롯도 잊고 있던 호칭의 문제였다.

샬롯은 대견함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아주 작은 서운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도 샬롯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갔다.

「나, 디아나 카를의 공작 즉위를 기념하여 모든 경지에 부과한 세금을 봄의 파종기 이후까지 전면 면제한다. 또한, 북쪽의 가혹한 겨울에 어떤 백성도 죽지 않도록 카를 공작가가 직접 구호에 나설 것을 명한다.」

이제 명령은 디아나가 한다.

「새로운 카를의 공작으로서 수도의 공무에 충실해야 하는 바, 영지 순방을 미루되 카를의 연대감을 위하여 주요 가신의 가문과 기사단의 정예는 직접 수도로 찾아와 충성을 맹세해야 할 것이다.」

디아나가 수도를 떠날 수 없다면, 그들을 불러오면 된다. 직접 카를의 땅을 밟고 그들을 볼 수 없다 해도 선친처럼 지배할 수는 있었다. 디아나 자신이 영지 자체에 미련을 두는 바람에 그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위의 뜻을 카를에서 통솔할 자로 현자 오웬 어거스트를 임명한다. 카를가에 충성하는 이들과 모든 백성은 이 뜻을 따라야 하며, 그게 아닐 시 즉각적 반역으로 간주한다.」

굳이 카를성의 옥좌에 앉지 않아도, 디아나는 그들의 주인이었다.

「- 공작, 디아나 카를」

마무리에 디아나는 자필로 서명했다. 이제부터 카를가의 인장과 같은 효력이 있는 서명이었다. 디아나는 자신이 적은 내용을 한 번 살펴보고는 샬롯에게 건넸다. 샬롯은 그것을 받아서 들어 봉투에 넣고 능숙하게 밀랍을 녹여 카를가의 인장을 찍어 밀봉했다.

“그걸 오웬 경에게 전달해. 그리고 그가 카를로 떠날 준비를 저택에서 돕도록 해 줘. 오웬 경에게…… 내가 곧 카를로 갈 테니 작별 인사는 필요 없다고 전하도록.”

“네.”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디아나를 바라봤다.

“공작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내뱉자, 샬롯은 가슴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서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친이 작고한 이래로 오랜 세월, 이 저택에서 사라졌던 호칭이 부활했다. 유일한 후계자인 디아나 본인이 그 호칭을 되찾았다는 것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고마워, 샬롯.”

디아나가 싱긋,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곧 샬롯이 이 방을 나서서 서찰을 전하고 나면 저택의 모든 사람을 모아서 디아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카를 공작저의 아가씨는 사라졌다.

이제야 공작저에 공작이 돌아왔다. 어렵게 되찾은 공작위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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