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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9화 (129/184)

129화

에드윈은 대공저로 돌아오자마자 딜런을 호출했다. 어두운 표정을 보니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하긴, 몸을 쓰는 일엔 자신이 있는 에드윈조차 번듯한 길이 나 있는 공작저를 오가는 게 힘든 날씨였다. 길도 없는 어두운 숲속에서 사람을 찾으라는 건 아무리 기사단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속이 타는 노릇이군.”

에드윈이 한 마디로 제 심정을 담았다.

“전하, 바꿔서 생각하면 기사단도 뚫기 어려운 폭우의 숲속에서 시녀가 멀쩡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길이 없는 곳이라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어 빙빙 돌게 될 텐데요. ……마치 샤리즈 후작가의 추적자들처럼요.”

“아니, 상대를 일반인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방심할 수 없어.”

“그래 봐야 시녀인 것은…… 아닙니다. 전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에드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끌어안았던 디아나의 온기와 작은 떨림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디아나의 앞에선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위세를 보였지만, 실상은 이 모양이니 한숨이 날 만도 했다.

“전하. 우리 기사단이 못 빠져나가는 숲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도 그렇군.”

이건 트리샤를 과소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기세가 좋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루모스 기사단이었다. 그들을 신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샤리즈 후작가가 수상하군요.”

“또 뭔가 있었나?”

“예. 전하의 예상대로 오늘 빗길을 뚫고 의원을 무리해서 불러들였답니다.”

“누군가 다쳤군. 응급 처치를 한 후에도 의원의 손길이 필요할 정도로 꽤나 깊이.”

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의외로 흔했다. 실종된 궁인들의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고 심지어 일반 귀족가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 날씨에 의원이라니, 다친 사람이 후작가의 중요한 사람인가 봅니다. 흠, 확실히 평범한 시녀는 아니군요.”

“중요한 사람? 아니. 그 주인이겠지.”

에드윈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비밀을 알게 됐든, 주인에게 꼬리를 쳤든, 혹은 그 아이를 배었든, 일개 시녀의 목숨은 주인이 아무도 모르게 묻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게 트리샤 블랑처럼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경우라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황실 시녀니까 직접 처리하려고 든 거다. 확실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시녀가 불시에 반격해서 후작이 상처를 입고, 그사이에 숲으로 도망쳤다고요? 그러면 말이 맞는군요.”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디아나도 동의한 부분이었다. 다만,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 디아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후작가의 추적자들이 사냥개를 데리고 있었다고 했지?”

“예, 전하. 핏자국을…… 따라가게 했겠죠. 다친 건 후작만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트리샤는 본래 황실의 시녀였다. 사냥개에게 쫓게 할 단서가 적었다. 그런데도 비가 오는 날에 사냥개를 풀었다면 그건 혈흔을 따라가게 만들었단 뜻이다. 트리샤를 추적하게 시킨 게 아니라 인간의 피 냄새를 쫓으라 한 것이고, 그걸 확신할 만큼 상처를 입혔다는 거다.

“전하. 저였어도 피를 흘릴 정도로 상처를 입고 폭우 속의 숲에서 빠져나올 자신은 없습니다. 게다가 도망친 밤부터 지금까지 빛이라고는 들지도 않잖습니까. 날이 밝아도 방향을 찾기 어려운 게 숲입니다.”

에드윈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디아나가 불안해한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트리샤의 죽음을 확실히 해서 디아나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에드윈은 마녀의 존재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 있었지만, 그게 디아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뭐든 벨 작정이었다.

“그래도 만전을 기해라.”

“예. 한 가지 더 있습니다만.”

“뭐지?”

딜런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대공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천둥소리에 일찍 깨셔서 전하의 침소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오셨던 모양입니다.”

“하,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물론 어엿한 성인이시지만, 이 날씨에 산책하러 가셨다는 핑계도 좀 그렇잖습니까.”

그제야 에드윈도 얼굴을 찡그렸다. 무려 대공이나 되는 그였지만, 어머니에겐 아직도 아들이었다. 그건 영원히 바뀌지 않는 관계다. 그것도 하필이면 감이 무섭도록 날카로운 어머니였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그 일에 집중하도록.”

딜런도 그 모자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트리샤를 쫓는 것이 빠르고 쉬울 테다. 에드윈이 골똘한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나서자 딜런은 제 신세를 한탄하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딜런이 아는 사랑은 달콤한 밤의 유희와 여인의 부드럽고 나긋한 품이었다. 그러나 에드윈의 변화를 보고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무래도 딜런은 사랑에 대해 몰랐던 것 같다. 그건 꽤 복잡한 기분이었다. 에드윈처럼 깊은 사랑을 알고 싶다가도, 이런 난관은 절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우리 기사단이 수호하는 게 있긴 해서 다행인 건가.”

자조적인 혼잣말이었다. 본래 기사단은 정의를 수호하고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했다. 뭐, 후자를 따라서 그의 사랑을 수호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목적에 부응하긴 했다.

딜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딜런의 예상대로 샤리즈 후작가의 하인들은 같은 곳을 빙빙 돌다가 이내 체념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주인은 아마 트리샤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죽을 거라고 결론을 지은 모양이었다.

이미 시녀가 도둑질하고 도망쳤다는 입장을 밝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견 무심하면서도 가장 손쉬운 변명이었다.

“딜런 경, 밤이 되면 수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 기사단원들도 표식을 남기면서 나아갔지만,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서 같은 곳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대상도 어둠 속을 맴도는 건 마찬가지겠지.”

딜런은 꽤 융통성이 있는 자였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딜런도 이 상황에서 숲을 나갈 자신이 없었다. 숲은 길과 방향만 확실하다면 금세 나갈 수 있지만, 실제로 조난자는 같은 곳을 맴도는 경우가 많았다.

“길이 없는 숲인 건 확실한가.”

“예. 아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숲입니다. 지금은 나무를 벨 시기도 아니고요.”

“그렇겠지. ……일단, 밤엔 철수한다.”

“예.”

딜런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라는 주군의 말에 충실했다. 모두 주군을 섬기는 기사로서 옳은 처사였다. 그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

트리샤는 굴속에서 숨을 죽인 채, 몇 번이고 인기척과 말발굽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이 굴에 떨어진 것은 행운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입은 것 같은 상처가 여기저기 있었지만, 덕분에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폭우도 트리샤를 도왔다. 사냥개도 이런 날씨엔 냄새를 쫓을 수 없다. 그리고 적절한 때가 오자, 마법처럼 비가 가늘어졌다.

“달님은 내 편을 들어 주나 보네.”

먹구름이 물러가고 은은한 달빛이 가느다란 빗줄기를 은실처럼 비췄다. 트리샤가 떨어진 굴은 사냥꾼이나 나무꾼이 인공적으로 파 둔 장소 같았다. 아마 이런 갑작스러운 폭우나 추위를 피하려고 만들었을 거다. 그 증거로 달빛에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까?”

트리샤가 품속에서 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꺼냈다. 그건 샤리즈 후작과의 첫 만남을 주선했다는 아버지의 보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작은 처음부터 트리샤를 목적으로 도박판에서 만난 블랑 남작을 꼬여 낸 것일 테다. 그리고 블랑 남작의 유일한 보물인 시계를 보여 주며 트리샤를 유인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지.”

픽, 트리샤가 실소했다. 그 시계는 블랑 남작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증거였다. 도박에 미쳐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를 혹사했던 아버지도 그 시계만큼은 팔아넘기지 않았다. 그게 그 남자에게 남은 유일한 인간적인 면이라고도 생각했다.

“흥, 이런 고물 쓰레기에 값을 쳐주는 인간이 없었던 것뿐이지.”

샤리즈 후작이 적당한 보수를 제시하자 블랑 남작은 시계와 함께 제 딸까지 팔아 치웠다. 말은 시녀로 고용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트리샤가 무엇이 됐는지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트리샤를 넘긴 대가로 돈을 받았고 다달이 보수까지 받으니 그 딸이 시녀가 됐든 창녀가 됐든 아무래도,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트리샤는 그걸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인간에게는 과분한 물건이야.”

트리샤는 시계를 바라봤다. 아버지에게 시간이 중요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기억은 없었다. 트리샤는 실소를 뱉으면서 시계를 뒤집었다. 시계의 뒤편은 나침반이었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그 하찮은 인생에 방향 따윈 없었으니.

“하지만, 나는 제대로 쓸 수 있지.”

모친인 사라 블랑이 살아 있는 한 완전한 마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약간의 술수는 부릴 수 있었다. 다행히 트리샤는 마녀의 힘을 사용하는 모든 방법을 떠올린 후였다.

“자, 내게 방향을 가르쳐 줘…… 내 핏줄이 있는 곳을.”

트리샤가 마침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나침반 위에 묻혔다. 그러자 한곳을 가리키던 바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쉼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서, 이 피의 근원으로 안내해 줘.”

바늘이 도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고도 한참 파들거리던 바늘이 이내 범위를 좁혔다. 트리샤는 무릎의 상처에서 피를 더 쥐어짜서 바늘을 충분히 적셨다. 피를 머금은 바늘은 현저하게 속도가 느려졌다.

“……옳지.”

이내 바늘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트리샤는 이 숲을 벗어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트리샤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 피의 힘을 물려준, 어머니 사라 블랑이 있는 곳이었다.

붉은 마녀의 피는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것을 사물에 덧씌우는 것 정도는 지금 트리샤의 기량으로도 충분했다.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트리샤는 비가 완전히 멎기 전에 굴을 나섰다. 비가 그친 후에 다시 날이 밝고 추적자가 올 때면, 트리샤는 이 숲을 벗어난 후일 것이다. 멍청한 추적자들은 트리샤가 이 숲을 헤매고 있다고 착각한 채로 헛짓을 해 댈 테다.

“아하…… 디아나가 숨겼구나.”

트리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입꼬리는 흥미롭다는 듯이 올라간 채였다.

“그래. 너도 전부 기억하는 거야.”

이제 모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디아나는 훨씬 전부터 그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멀리하고 제 어머니를 숨긴 것이다. 그러나 디아나는 언제나 한 수가 부족했다. 만일 트리샤였다면 기억을 찾은 즉시 상대를 죽였을 텐데.

“하긴, 그게 디아나의 사랑스러운 면이지.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트리샤는 이제 정확한 방향을 향해서 걸었다. 자신의 피가 이끄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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