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트리샤 블랑이 고작 후작가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제 신세를 망칠 인물인가. 디아나가 아는 트리샤는 절대 그렇게 작은 것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물욕이 있다면 황실에 남아서 루카스를 유혹하는 게 최선이었다.
“뭔가 있어요. 트리샤는 겨우 도둑질을 하진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그걸 위해서 황실에서의 지위를 버릴 리가 없어요.”
“내 생각도 그렇다. 후작가는 뭔가를 숨기고 있어. 왜냐면, 그 실종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거든.”
“그럼 전하는 어떻게 이 사실을 아셨어요?”
“그 숲은 아직 길이 나지 않아서 사냥꾼만 드나든다. 루모스 기사단의 신입 단원들이 어제 사냥 갔다가 폭우를 뚫고 새벽에야 돌아왔지. 그들이 후작가의 추적자들을 만난 모양이다. 일반 하인들이 사냥개까지 끌고 온 게 수상해서 물었더니 도둑질을 하고 도망친 시녀를 쫓는다더군.”
“그럼, 트리샤는…… 찾았나요?”
“아니.”
에드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폭우 때문에 추적도 멈췄다. 이런 날씨엔 사냥개도 소용없어. 더구나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길이 없는 숲에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지.”
“이해가 안 돼요. 트리샤가 고작 도둑질이나 하고 황실 시녀의 지위를 버리다니.”
“그래. 오히려 후작가에서 트리샤를 죽여서 묻은 후에 실종됐다고 하는 게 합리적이지.”
“네? 어째서. 트리샤는 황태자비의 시녀잖아요.”
에드윈의 검은 눈이 가만히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제야 디아나는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이전의 생에서 디아나가 그리 순진하고 온화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비밀리에 자신을 도와줄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래도 트리샤를 그대로 뒀을까.
“황태자비의 시녀이기 때문일 수도…… 아니, 그래서군요.”
“트리샤가 뭔가 저질렀겠지. 그게 황태자비의 선을 넘었고, 그래서 제 부모에게 처리를 부탁한 거라면 말이 맞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드문 것도 아니야. 말없이 사라진 궁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비비안은 디아나처럼 참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비비안은 어떤 방식으로 제 부모에게 트리샤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고 그걸 모른 트리샤는 후작저로 갔다가 변을 당했을 거다.
“하지만, 실패했군요.”
“내 예상도 그렇다. 이미 죽여서 어딘가 묻었다면 실종됐다고 하면 그만이지, 그 폭우를 뚫고 사냥개까지 딸려서 찾을 리가 없지.”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 블랑을 제 수중에 두고 제롬을 동쪽 땅으로 보냈지만, 떨칠 수 없던 막연한 불안감이 다시 솟아났다. 그래, 디아나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은 바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트리샤의 돌발적인 행보였다.
“두려워하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에드윈이 떨리는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디아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트리샤 블랑이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알아. 그러니 손을 놓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다. 이미 루모스 기사단에게 자취를 쫓으라고 했다. 적어도 후작가의 하인들보단 빠를 거다.”
“아무도…… 찾지 못한다면요?”
“반드시 찾을 거다. 목숨이 붙어 있든 아니든, 디나 그대의 불안을 이참에 아예 뿌리 뽑겠어.”
에드윈의 커다란 손이 디아나의 손을 꾹 잡았다. 아직 물기가 어렸지만,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디아나가 애써 시선을 들자 그의 한없이 다정하고 굳은 흑안이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트리샤 블랑은, 아니 이 세상의 누구도 그대를 해칠 수 없게 할 거다. 지금은 불안을 다 지울 수 없겠지만…… 나를 믿어 주겠나.”
에드윈의 눈동자는 언제나 정직하게 진심을 부딪쳐 왔다. 이 폭우를 뚫고서 와 준 것도 그랬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아무도 그대를 해칠 수 없다. 그게 마녀든, 더 사악한 존재든 내가 그리 정했다.”
디아나는 몇 번의 생을 거치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얽히던 트리샤와의 악연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도 트리샤는 디아나의 시야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디아나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할 거다. 제국의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 그러니…… 이제 그런 표정은 그만 지으면 안 될까.”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에드윈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지만, 아까처럼 격하게 흔들리거나 두려움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과거와 지금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전하, 저는…….”
디아나가 뭐라 말하려다 채 끝맺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에드윈에게 고맙고 미안한 감정, 트리샤의 처지를 향한 복잡한 마음, 여태 막연히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 그것을 진정시키는 온기에 대한 감사까지.
“괜찮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끌어다 제 품에 가뒀다. 에드윈의 체취와 체온이 짙게 느껴졌다. 그제야 디아나는 조금씩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쿵쿵, 에드윈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했다. 지금 디아나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대에겐 내가 있어. 언제나, 영원히 내가 있을 것이다.”
진심은 전해졌다. 두 사람의 마음에 각자, 뜨겁게 아로새겨졌다.
***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그저 강렬한 고통과 갈증이 느껴졌다. 그게 진짜 자신이 느끼는 것인지, 현실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기나긴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트리샤는 젖은 바닥에 미끄러져 입구가 보이지 않아 있는 줄도 몰랐던 굴에 빠진 채 폭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쪼개지는 통증과 함께 지난밤의 지옥도가 되살아났다. 허덕이며 더 깊이, 깊이 도망쳤던 것과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던 것. 그 후에 이성을 잃은 채 그저 생존본능만으로 기억도 없이 여기까지 기어온 것까지. 그 증거로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짐승의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나……는.”
목소리가 죄 갈라졌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 지옥도는 진짜 기억일까. 이 꼴을 보면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망연한 목소리 끝에 쿨럭, 기침이 나왔다. 전신에 얻어맞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숲을 쪼갤 기세로 벼락이 울리더니 번쩍 천둥이 빛을 비췄다. 그 순간, 제 손에 엉긴 끈적하고 찝찝한 액체가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지……?”
다시 벼락이 울렸다. 그 순간 트리샤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풀썩, 가녀린 몸뚱이가 흙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단순한 기절과는 달랐다. 잠시 육체가 멈추고, 무수한 기억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화병을 깬 순간부터, 디아나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던 순간, 공작저에서 쫓겨나던 순간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던 순간까지…… 트리샤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죽기 전에 본다는 그 주마등일까.
아무 의미도 없는 생이었다. 간신히 제가 누구인지 떠올린 트리샤는 회한조차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누구인지 모르고 죽는 것이 나았을 테다.
‘……리샤!’
그러나 기억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정확히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였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역시 리샤 너뿐이다.’
루카스였다. 어째서 루카스가 트리샤를…… 그 순간 다시 머리가 아득해졌다. 헤아릴 수 없는 별처럼 과거의 기억이 조각조각 트리샤의 정신에 박히고 있었다.
‘리샤! 내 생각대로 그 루비 목걸이가 정말 잘 어울리는데. 안 그런가, 황후? 그대의 혼수품은 과연 훌륭하군.’
‘황후 폐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 기억 속에서 트리샤는 누구보다도 반짝였다. 바로 곁의 시든 디아나보다, 훨씬.
‘아니, 격식을 차리기는. 리샤, 넌 황후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잖아. 안 그런가?’
‘예, 폐하.’
디아나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반면 루비 목걸이를 건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영롱했다. 트리샤는 셋의 중심이었다. 그건 곧 모든 것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고마워, 디아나.’
‘응.’
‘리샤, 너에게 후작위를 내릴 거다.’
‘정말? 그래도 돼, 루카?’
꿈인가. 아니, 꿈이 아니다.
‘물론. 리샤,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니까.’
트리샤가 빼앗긴 운명이었다.
‘트리샤, 나는 너를 저주한다.’
디아나의 마지막 말에 빼앗긴 운명.
‘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어.’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진정한 트리샤 블랑이 다시 눈을 떴다. 형편없는 꼴과는 달리 붉은 눈동자만은 강렬하게 정면을 바라봤다.
“그래, 난 트리샤 블랑.”
더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이 씻어 낸 것처럼 상쾌했다.
“이런 진창에서 태어나, 죽도록 기어올라서…… 진짜 내 자리를 쟁취하고 황제의 아이를 가질 여자.”
이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의 삶은 전부 가짜였다. 디아나의 저주에 본래 가져야 했던 것을 빼앗기고 의미 없이 착취만 당하는 삶을 살았던 거다.
멍청한 비비안의 농락에 놀아난 것도 역겨운 샤리즈 후작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실소가 나올 정도로 하찮게 여겨졌다.
“그래도 덕분에 중요한 걸 떠올렸으니 다행이야.”
픽, 트리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추지 않고 빗속에서 울렸다.
“하, 하하! 하, 진짜 우스워.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하하…….”
실성한 것처럼 배를 잡고 웃어 대던 트리샤가 일순 뚝 웃음을 멈췄다. 붉은 눈동자엔 서늘한 원한과 정념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순간을 누군가 봤다면, 마녀의 존재를 바로 믿었을 정도였다.
“아! 사랑스러운 디아나…….”
트리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난 네가 될 필요 없어. 넌 내게 빼앗기는 역할이니까.”
우선 루카스의 사랑을 빼앗았다. 디아나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도록 황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엔 창백하고 생기 없는 황후의 곁에서 누구보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혹했다. 그 정점은 디아나가 유산한 후에 트리샤가 루카스의 아이를 가진 것이었다.
“그렇게 재밌는 걸 빼먹으면 곤란하지.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트리샤의 무서운 점은 이 모든 것이 진심이라는 것이리라. 애초에 남에게 이해받을 생각조차 없는 모순된 마음이었다. 그게 비뚤어진 애정인지, 뒤틀린 욕망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또 셋이서 놀자. ……먼저, 내 힘부터 찾은 다음에.”
되찾은 기억은 트리샤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알려 줬다. 결정적인 열쇠는 모두를 미혹시키고 쉬이 홀릴 수 있었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힘이자 붉은 마녀의 피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 있을까? ……귀찮게, 알아서 죽어 주면 좋을 텐데.”
선대를 죽여야만 마녀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었다. 여태 트리샤가 사라의 강요로 외운 책들의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이유였다. 그건 사라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트리샤의 안에서 새로운 힘으로 깨어나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마법이었다.
폭우 속에서, 디아나의 불안은 결국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