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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7화 (127/184)

127화

어두운 숲속을 달리는 트리샤의 발이 절뚝거렸다.

“헉, 헉…….”

손에 묻은 끈적하고 뜨뜻한 액체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꽃병이 와장창 깨지며 칼의 이마를 타고 흐르던 붉은 액체와 비명, 그 직후 트리샤를 향한 무자비한 폭력까지.

트리샤는 배를 걷어차이고 주먹을 맞으면서도 꽃병의 파편으로 칼의 목을 찔렀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다. 트리샤는 그의 생사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후작저에서 도망쳤다.

“안 돼, 더 멀리…….”

트리샤가 움직이지 않는 제 몸을 다그쳤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도망쳐야 해.”

트리샤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트리샤가 겪은 사실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칼이 살았든 죽었든, 트리샤가 갈 곳은 어둠뿐이었다.

마침 흐린 구름이 달빛조차 가린 캄캄한 밤이었다. 트리샤는 생존본능에 따라 더 깊은 숲으로 절뚝이는 걸음을 필사적으로 옮겼다.

“하아, 하…….”

애써 옮기던 걸음은 야속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다. 이번만큼은 일어날 힘이 없었다. 후작저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 이 숲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몇 가지 생각이 맴돌았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 겨우 이렇게…… 죽는 건가.”

뒤늦게 전신의 통증이 밀려왔다. 최초의 일격으로는 칼을 기절시키지 못했다. 그의 무릎이 트리샤의 복부를 강하게 쳤고, 망설임 없는 주먹이 얼굴에 꽂혔다. 꽃병의 파편을 쥐고 있지 않았으면 트리샤는 지금쯤 땅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 그 사실에 아직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왜…… 내가 왜……?”

고통과 추위가 트리샤를 덮쳤다. 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묘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트리샤에게 불행은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났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았을 뿐인데, 거기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쁜 일을 찾으려고 했던 건데,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지 트리샤는 끝까지 제 운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서 태어난 거야?”

트리샤의 거친 호흡이 어둠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

날이 밝기도 전에 후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칼의 부상은 다행히 목숨과 관계된 곳을 피했지만, 뜻밖의 중상이었던 데다 문제의 트리샤가 자취를 감췄다.

일부러 별채에 사람을 두지 않고 여유를 뒀던 칼의 자만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하필 목을 찔린 바람에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없던 것도 한몫했다. 그게 트리샤의 의도였든 아니든, 어쨌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빌어먹을 년……!”

후작부인은 계속 같은 자리를 서성이며 욕설을 뱉었다. 충실한 하인이 칼의 치료를 돕고 있었고 이미 사냥개를 딸려서 추적대를 보냈지만,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멀리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트리샤의 행방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아직도 소식이 없어?”

“마님, 너무 발견이 늦어져서…… 그년이 도망친 게 족히 3시간 이상은 되는지라.”

후작부인이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그러게 내가 그 요망한 년을 들이지 말자고 했잖아요!”

그래 봐야 칼은 목의 상처를 틀어막고 있느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황궁에서 그 아이를 찾을 거예요. 밤을 틈타 물건을 훔쳐서 도망쳤다고 할 셈이었지만, 만약에라도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면요?”

확실하게 죽여서 뒷마당에 묻었다면 안심이지만, 트리샤의 행방을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됐다. 칼은 하인의 처치가 끝나자 제 목을 꾹 누르고 오만상을 쓰며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그년을 성한 몸으로 내보냈을 리가.”

칼이 분을 애써 삭이며 힘겨운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목덜미에 날카로운 것이 꽂히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칠 곳은 뒷마당을 통한 숲이야. 내게 구타당한 몸으로 얼마나 갔으려고.”

“당신은 속도 좋네요! 그렇게 때릴 거면 왜…… 어휴.”

후작부인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별채에서 눈에 띄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것은 숲을 통하는 길이었고 그 숲을 통과하려면 말을 몰고도 종일이 걸렸다. 상처를 입고 어둠 속에서 숲을 헤매는 건 죽기 딱 좋은 일이었다.

“그년이 숲으로 도망친 건 확실해?”

하인을 향한 힐난이었다.

“예. 거기까지 핏자국이 있었고 사냥개들도 확실히……. 이 밤에 다친 몸으로는 멀리 못 갔을뿐더러, 이미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여나 운이 좋다면?”

“자력으로 숲에서 빠져나오긴 힘듭니다. 수색하다 보면 시체든 시체가 되어 가는 꼴이든 금세 찾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숲은 길이 안 나서 사냥꾼밖에 드나들질 않습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말에 후작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남편이 답답했지만, 이 상황에서 말을 보태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럼, 나머지는 계획대로 하는 수밖에.”

트리샤는 후작저의 재물에 눈이 멀어 도적질하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그리고 그 행적은 끝까지 찾을 수 없었다. 그게 후작가가 정한 시나리오였다.

비참한 환경에서 겨우 구해 줬지만, 은혜도 모르고 물욕이 가득한 트리샤가 끝끝내 모두의 기대를 배반한 것이다.

그때, 먼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이 울렸다. 거센 폭우의 전조였다.

***

때가 지났는데도 날이 밝지 않았다. 갑자기 불어온 거센 바람과 먹구름이 하늘을 어둑하게 가렸다. 그 사이로 세찬 비가 쏟아졌다. 한겨울의 폭우는 살갗이 에일 것같이 싸늘했고 지붕을 부술 것처럼 거셌다.

“오늘은 전서구가 날 수 없겠군요.”

최근 제롬의 연락을 기다리는 디아나에게 그레이가 조언하듯 말했다.

“……그러네. 갑자기 이렇게 거센 비라니.”

“이상하군요. 어제 달리 징조도 없었는데.”

오늘의 모든 일정을 변경할 정도의 폭우였다. 이대로면 의회도 열리지 않을 테고 그나마 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마비될 거다.

디아나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오웬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괜찮았다.

실은 제롬뿐만이 아니라 에드윈과도 종종 전서구를 통해 연락하는 터라 마음 한구석이 무척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 일정은 취소할게. 저택에서 머무는 수밖에 없겠어.”

“네, 그게 좋겠습니다.”

디아나는 못내 아쉬운 눈초리로 창밖을 봤다. 빗방울이 어찌나 거센지 창문을 누가 두드리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런 날에 전서구가 날길 바라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디아나는 에드윈이 보냈던 지난 편지를 들춰 보려 침실로 발을 옮겼다. 루카스의 위협을 생각해서 저택에 못 오게 했지만, 정작 그를 보지 못한 며칠이 너무 길었다.

아마 에드윈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비록 둘의 거리가 멀더라도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애정의 힘이었다.

“정말 필체는 그 사람을 닮는 건가.”

디아나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에드윈이 보낸 서찰은 대부분 전서구를 통한 것이라 작은 쪽지에 구겨진 것투성이였지만, 디아나는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에드윈의 글씨를 보면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가 곁에 없는 밤이라, 달을 본다.」

이 쪽지는 달이 밝은 밤에 날아들었다. 디아나도 그날 밤 같은 달을 바라봤다. 서로의 마음이 연결됐다는 것이 느껴져서 외로움이 희미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다. 오늘 밤, 그대의 꿈에 찾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가끔은 투정 어린 에드윈의 진심이 좋았다. 그는 좀처럼 애정을 숨길 줄 모르는 다정한 사내였다. 무한한 것 같은 에드윈의 애정 앞에서 디아나는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경솔한 짓은 하지 않아.」

꼭 디아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안심이 되는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에드윈이 의회에서처럼 울컥해서 앞에 나서는 일이 생길까 봐 한창 걱정하던 중이었다.

“날이 정말 야속하네.”

오늘은 이런 쪽지마저 받을 수 없게 됐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렸다. 아까부터 계속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매서웠다. 잠결에 들었다면 누가 두드리는 줄 알았을 거다. 그 정도로 세찬 비였다.

똑똑!

그러나 빗소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디아나의 주의를 끌었다. 빗소리가 너무 거센 나머지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나…… 디아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섰다.

“세상에.”

착각이 아니었다. 세찬 빗속에서 창문을 두드린 것은 에드윈 본인이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디아나의 손이 저도 모르게 창문부터 열었다. 에드윈은 흠뻑 젖은 몸으로 창문을 넘어섰다.

“전하, 어떻게 이런 날씨에……. 아니, 몸부터 말리세요. 감기에 걸리겠어요.”

당황한 디아나가 얼른 수건을 찾아 건넸다. 에드윈은 젖은 로브를 벗고는 디아나 몰래 재채기를 삼켰다. 디아나도 제 손에 수건을 하나 더 들고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냈다.

“오늘 같은 날씨면 감시역도 못 나오지 싶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누구도 감히 외출하지 못할 만한 날씨니까. 솔직히 에드윈의 성격을 아는 디아나도 예상치 못한 행보였다.

누가 이 비를 뚫고 담을 넘어서 나무를 타고 하염없이 창문이나 두드린단 말인가. 노크 소리도 빗소리에 묻힐 지경이었다. 실제로, 에드윈은 창밖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비가 오는데 왜 2층 침실로 오셨어요. 아니, 이런 날씨에 뭐하러 그렇게 무리를 하세요.”

실은 집사실의 잠긴 창문을 두드리다가 아무도 듣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젖은 나무를 기어올랐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괜찮다. 이 정도야 거뜬하지.”

에드윈이 작은 허세를 부렸다. 디아나의 눈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 몰골이었다.

“우선 따뜻한 물로 목욕부터 하셔야겠어요. 물기만 닦아서는…….”

이건 비에 젖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에 풍덩 빠졌다 나온 꼴이었다. 비의 기세를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그 전에 할 말이 있다.”

에드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의 표정에 디아나도 살짝 눈썹을 기울였다. 에드윈이 하필 이 폭우를 뚫고 위험을 무릅쓴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디아나를 보고 싶어서라는 순수한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중요한…… 일이군요. 이 폭우를 뚫고 오실 만큼.”

“그래. 한시라도 빨리 그대에게 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디아나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걸 알게 된 경위는 나중에 설명하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트리샤 블랑이 실종됐다.”

“네? 트리샤는 지금 황태자비의 시녀인데, 어떻게.”

“황태자비의 심부름으로 샤리즈 후작가에 갔다가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하고 도망쳤다…… 그게 후작가의 입장이다. 게다가 하필 도망친 숲은 길도 나지 않은 곳이라 뒤쫓지도 못했다더군.”

디아나가 잠깐 숨을 멈췄다. 언제나 침착했던 푸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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