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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6화 (126/184)

126화

밤이 깊어지자 칼 경이 남의 눈을 피해 별채로 향했다. 애초에 트리샤의 처소를 별채로 내어준 것부터 이유가 있었다.

칼 경은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 그는 품 안에 질긴 끈을 숨겼다. 행여 시체에 손자국이 남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좀 아깝군.”

칼이 조금 쓴 입맛을 다셨다. 트리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영리함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비비안 특유의 돌려 말하는 화법을 잘 알고 있는 칼로서는 그 서신의 행간을 읽을 수 있었다. 영악한 트리샤가 제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황태자에게 꼬리를 친다는 것이다.

“하긴, 딱 좋게 여물었더군. 남자를 홀리기 좋을 만큼.”

낮은 혼잣말과 함께 칼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어차피 죽여야 할 거라면 칼이 재미를 조금 본대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이제 트리샤는 후작가의 뒷마당에 묻히고 그 죽음조차 알려지지 않아 실종 처리된 뒤에 모두에게 잊힐 운명이다.

그 한심한 블랑 남작이 제 딸의 생사에 관심이나 있을까. 트리샤 블랑의 불우한 점은 누구 한 명 진심으로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칼 경이 몰래 별채로 들어가 트리샤의 처소 앞에서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살의를 짐작할 수 없는 신사적인 얼굴이었다. 칼은 그 가면을 쓰고서야 트리샤의 방문을 노크했다.

“칼 경……? 이 밤에 어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트리샤가 경계 어린 눈동자를 했다. 한밤중에 남모르게 단둘이 있는 건 확실히 부적절했다. 하지만 칼은 트리샤가 스스로 문을 열게 할 방도도 가져왔다.

“비비안의 편지에 쓰인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서 왔다. 비비안은 네게 목걸이를 줬으면 한다고 했지만, 내 아내가 영…… 이해하지?”

“아, 네. 물론이에요.”

“마침, 내 아내는 적당히 취해서 잠들 예정이고, 오늘 밤에 몰래 건네주면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트리샤의 눈동자에 욕망과 기쁨이 함께 차올랐다. 안 그래도 후작부인의 시큰둥한 반응에 목걸이를 받지 못할까 봐 안달이 났던 터다. 다행히 칼은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처음 트리샤를 고용한 것도 그였고, 트리샤의 가치를 아는 것도 그였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그럼요!”

트리샤가 제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아까의 경계심은 모조리 물욕으로 바뀌어 사라진 채였다.

칼은 느긋하게 방에 들어서 트리샤가 모르게 등 뒤로 문고리의 비밀 잠금장치를 잠갔다. 이 방에서 죽은 사람은 트리샤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실종된 사람으로 정정해야겠지만.

“트리샤, 너는 내 기대보다 훨씬 잘해 줬더구나.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거지.”

칼이 먼저 탁자 앞의 의자에 앉은 후, 트리샤에게 눈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경이 기회를 주신 덕분이죠.”

“아니, 서로의 이점을 나눈 거지. 실제로 넌 황태자비 검증에서도 증언을 해 줬고 우리 비비안이 입궁한 후로 곁을 지켜 줬으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트리샤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디아나를 해치는 거짓 증언을 했다는 사실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표면에 나오는 것 자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 보니, 아주 근사해졌어. 널 블랑 남작에게서 데려온 건 좋은 선택이었다.”

칼은 자꾸 트리샤의 약점을 건드렸다. 멋들어진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못 관대한 표정을 지은 그가 하는 말치고는 모순적이었다.

“경 덕분이에요.”

“내가 한 건 블랑 남작이 하찮게 대하던 원석을 찾아서 제대로 닦아 낸 후에 어울리는 자리에 둔 것뿐이지.”

그 말은 꽤 트리샤의 마음에 들었다.

“그땐 여기저기 부르터서 보기가 안 좋았는데, 벌써 손이 고와졌구나.”

칼이 아무렇지도 않게 탁자 위에 있던 트리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트리샤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눈치를 살폈다. 트리샤는 비비안의 친구이자 동갑이었다. 상식적으로 흑심을 품을 상대는 아니라 뿌리치기도 곤란했다.

“넌 생일이 언제지?”

“초봄이에요.”

“비비안보다 조금 빠르구나.”

칼은 계속 트리샤의 손을 잡은 채였다. 어쩌면 딸인 비비안을 보듯이 부성애가 일었을지도 모른다. 트리샤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막연히 칼의 태도를 짐작만 했다.

“저, 칼 경,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일찍 입궁하기로 해서요.”

트리샤는 간신히 이 어색한 순간을 끝낼 핑계를 찾았다. 칼은 그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엔 아직 인자한 미소가 어린 채였다.

“트리샤, 눈을 감아 보겠니?”

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그러고는 천천히 트리샤의 등 뒤로 향했다.

“원래 숙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할 때는 뒤에서 걸어 주는 법이란다.”

“아…… 몰랐어요. 저,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트리샤가 수줍게 뺨을 붉히다가 칼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트리샤도 제대로 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어렸을 때부터 이런 아버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조금 씁쓸하면서도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이라도 지금 느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자. 눈을 감았니?”

“네.”

트리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등 뒤에 바짝 칼 경의 체온과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뜨거운 손이 트리샤의 목덜미를 스쳤다. 칼 특유의 짙은 코오롱 냄새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웠다.

“이렇게 보니, 정말 숙녀가 다 됐구나.”

“경, 너무…….”

수상한 낌새를 느낀 트리샤의 목에 낯선 감촉이 다가왔다. 차가운데 금속의 재질이 아니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트리샤가 이 간격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때는 늦었다.

“칼 경! 이게 무슨…….”

“쉿.”

위협적인 숨결이 트리샤의 귓가를 울렸다. 트리샤가 제 목을 붙들었지만, 이미 단단한 끈이 목을 감고 있었다.

“쉬이…… 숙녀가 목소리를 높여서 쓰나.”

뭔가 잘못된 거다. 트리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본능이 경고를 요란하게 울렸다.

“어차피 소리를 질러 봐야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칼이 슬쩍 끈을 조였다. 트리샤는 목이 갑갑했지만, 선뜻 반항하지 못했다. 아직 호흡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단순한 협박일 수도 있었다.

“뭔가…… 오해하신 거예요.”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오해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고 다닌 모양이구나?”

“절 해치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전, 그런 잘못 한 적이 없어요! 비비안의 편지에도 없을 거예요.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물론, 우리 딸은 아주 착한 아이거든. ……트리샤, 발칙하고 요망한 너와는 다르게.”

“경…….”

트리샤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난 그런 요망한 것도 좋아한단다. 어때, 나를 좀 즐겁게 해 준다면 네 목에 붉은 자국이 남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칼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재미를 보면 좋았고, 아니면 할 일을 해치울 뿐이다.

트리샤도 그걸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오늘 트리샤가 실종된다고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트리샤는 혼자였고, 그 사실이 지금 칼의 위협보다 두려웠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제발, 절 해치지 말아 주세요.”

“오, 너도 착한 면이 있었구나. 그래, 말을 잘 들어야지. 목에 이런 게 걸려 있다면 더욱.”

워낙 방탕한 사생활로 유명한 샤리즈 후작이었지만, 제 딸의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트리샤의 아버지보다 더한 쓰레기는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조차 순진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조금만 풀어 주세요.”

트리샤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 얕은수를 쓰는 걸 보니 왜 비비안의 눈 밖에 났는지 알겠다.”

“……네?”

“넌 욕심이 많은 만큼 어리석어. 마치 짐승이 몸을 숨길 때 제 눈만 가리면 남도 자신을 못 보는 줄 아는 것처럼…… 그게 네 한계다, 트리샤.”

비비안이 배신했다. 하지만 편지는 샅샅이 훑었고 비비안이 따로 말을 전할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점차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지만, 트리샤는 지금 생존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살아야 한다. 모든 문제는 살아남은 후의 일이었다.

“지금 이대로는 경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을 텐데요.”

“사내에 대해서 뭘 좀 아나 보지?”

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이내 거칠게 트리샤의 어깨를 잡아서 일으켰다. 그대로 트리샤를 침대에 엎어 두고 끈을 잡은 손을 늦추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이었다.

“이제 됐지? 반항하고 싶으면 뭐…… 그것도 하나의 재미지.”

“경,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전 비비안의 친구예요!”

“그러나 내 딸은 아니잖나.”

칼의 음흉한 손길이 트리샤의 뒤에서 잘록한 허리를 쥐더니 드레스 자락을 들치기 시작했다. 트리샤는 모든 감각을 차단하려 애썼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고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여기서 도망칠 방법이 필요했다.

“흐읍…….”

칼의 흥분이 지나친 나머지 목을 조른 끈을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트리샤, 우리 가문에서 붉은 목걸이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칼은 비겁하게도 무력한 트리샤에게 도취적인 말을 늘어놓고 싶은 것뿐이었다.

“배반자는 하나같이 목을 졸라 죽이거든. 그러면 목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붉은 목걸이가 남는단다. 그게…… 비비안이 네게 주라고 한 선물이다.”

얼핏, 궁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웃어 주던 비비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비안은 트리샤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리석거나 순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리샤가 편지를 뜯어볼 것까지 내다본 냉정한 계략가였다.

“어디, 내가 첫 남자인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태연한 칼의 목소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 순간, 트리샤의 눈앞에 장식된 꽃병이 보였다. 침대로 데려온 것은 칼의 실수였다. 트리샤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건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방법이다.

“경…… 절 살려 주세요. 제가 매일 밤 즐겁게 해 드릴게요. 뭐든지 할게요.”

“흐음, 일단 맛을 봐야 알 것 같은데.”

“저, 정말 사내는 처음이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영악한 계집이라더니 정말로 제 신변에 위협이 닥치자 정조 따위는 내팽개치는 꼴이 꽤 칼의 흥미를 끌었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산 적은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리 방탕한 칼에게도 드물었다.

그의 욕구가 팽창해서 목에 맨 줄이 느슨해지는 찰나, 바로 그 찰나를 만들기 위한 트리샤의 수작이었다.

“경, 저 조금만 더 침대 위로 올려 주세요. 이대로는…… 다리를 벌릴 수가 없잖아요.”

욕망에 젖은 칼의 손이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정말 처음이냐? 말하는 걸 보니 닳고 닳은 것 같은데. 곧 확인해 보면 알겠지.”

트리샤는 침대 위로 올라가는 척하며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른 손길로 화병을 집어 들어 칼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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