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5화 (125/184)

125화

에드윈이 애꿎은 전서구의 종잇조각을 구겼다. 그의 미간에도 이미 금이 가 있었다. 디아나는 여전히 공작저의 근처에 오지 말라고 부탁했고, 이젠 그녀가 의회에 나가는 날엔 마주치는 것도 피해 달라고 했다.

“완전히 갇힌 신세군.”

자조적인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당장 북쪽으로 떠날 생각에 부풀어 있었는데 또 루카스가 발목을 잡았다.

“이젠 아무 권리도 없는 주제에.”

에드윈의 목소리엔 분노가 서렸다. 루카스는 하던 대로 방탕하고 태만한 인생을 살아가면 그만일 텐데, 굳이 에드윈과 디아나를 붙드는 게 무척 거슬렸다.

사실, 에드윈의 성정대로였으면 이미 들이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정을 아는 디아나가 미리 몇 번이고 간곡한 서신을 보내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였다.

“……빌어먹을 놈.”

찬란한 미래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던 터라, 디아나의 모습이 더 눈에 아른거렸다. 바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그녀가 훌쩍 멀어진 기분이 들어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전하,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에드윈의 혼잣말을 엿듣던 딜런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암행이 특기라도, 제 주인을 감시하나?”

“감시가 아니라 그냥 나온 겁니다만. 물론, 전하가 폭주하실 때를 대비하는 건 인정합니다.”

에드윈은 냉정했지만, 그 내면엔 항상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 그와 어린 시절부터 검을 맞대며 자란 딜런이기에 그런 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공작이 바뀐 만큼, 의회에 어느 정도 충성을 보여야 한다는 말은 타당합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

벌컥 에드윈이 괜한 딜런에게 성질을 냈다.

“그러나 제국 의회가 그리 성실한 곳은 아니잖습니까. 이것도 잠시일 겁니다.”

“그래야 할 거다.”

에드윈이 서늘한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뭔가 더 하실 생각은 마십시오.”

딜런이 목숨을 건 충고를 건넸다. 사랑에 눈이 먼 에드윈은 지금 앞뒤가 잘 보이지 않겠지만, 딜런처럼 한 발짝 떨어진 냉정한 사람의 눈에는 의심할 거리가 넘쳤다. 그건 루카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꼭 이 상황이 내 탓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린 채 딜런을 노려봤다.

“공작 즉위식에서 모두 그 하얀 여우의 모피를 두고 말이 많더군요. 그리 대단한 물건은 황실에서도 없을 거라고, 역시 카를가라면서.”

“당연히 그렇겠지.”

날이 선 대꾸를 뱉은 에드윈은 잠시 시선을 멈췄다.

“……그게 문제였던 건가.”

에드윈이 탄식 같은 말을 뱉었다. 여태 루카스와 황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 먼 길을 돌아 놓고서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끈 건 에드윈의 작품이었다.

다른 이의 눈에도 특별해 보였다면 루카스도 몰랐을 리가 없다. 허, 에드윈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 조심했으면서 마지막이라고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잠시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딜런은 진심으로 주군을 걱정하는 말을 건넸다. 에드윈의 불꽃은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해서도, 체스터 대공가의 명맥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것이 딜런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

트리샤는 황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나섰다. 비비안의 부탁으로 샤리즈 후작가에 가는 일을 맡은 것이다. 비비안이 믿을 수 있는 건 함께 입궁한 트리샤뿐이라는 간곡한 말이 무색하게 트리샤는 바로 비비안이 쓴 편지를 꺼냈다.

“어디 보자.”

편지는 당연히 밀봉되어 있었지만, 트리샤의 손재주로는 감쪽같이 살짝 편지를 열어 봤다가 도로 열을 가해서 붙일 수 있었다. 살살 봉인을 조심스레 뜯어내자 곧 비비안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나왔다.

「아버지께.

두 분은 잘 지내시나요? 저는 황실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조만간 황후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면 황실에서 직접 부모님을 뵐 수 있다고 해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시작은 평이했다. 부모에게 딱히 정을 느끼지 못하는 트리샤에겐 관심이 없는 부분이었다. 궁금한 것인 혹여나 비비안이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적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그 경우엔 편지를 바꿔치기할 작정이었다.

「부족한 제가 입궁해서 걱정이 많으시죠? 저는 황태자 전하의 관대함 덕분에 평화롭게 지내고 있어요. 어서 후계자를 생산하여 저의 의무를 다하려고 매일 기도합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소개해 주신 트리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어요. 트리샤는 제 친구이자 시녀로서 모든 일상에서 절 돕고 있어요.」

역시 비비안은 트리샤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온순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떠올리자 트리샤는 절로 실소가 나왔다.

어쩌면 디아나를 보던 자신의 모습이 그랬을까. 예전의 트리샤가 디아나를 동경했듯, 비비안도 루카스와 막역한 사이로 지내는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동경하는 것 같았다.

“뭐,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트리샤가 오만하게 혼잣말했다. 솔직히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비비안이 지겨울 때가 많았다. 디아나와의 사이에선 없었던 일이다. 하긴, 비비안은 모든 면에서 디아나 보다 뒤떨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일 디아나가 황태자비였다면…… 트리샤는 잠시 달콤한 상상에 빠졌다.

“그랬다면 셋이서 진짜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트리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모자란 비비안이 그 자리를 채 가서 이리 무료한 일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리석은 비비안은 루카스와 자신 사이에 끼기엔 너무 따분했고 뻣뻣했다. 심지어 편지까지 이렇게 뻔하고 지루했다.

트리샤의 눈이 남은 편지를 대강 훑었다. 내용은 후작가에 있는 자신의 물건을 몇 개 전해 달라는 것과 자잘한 부탁이었다. 그중에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트리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있었어요. 다행히 트리샤는 어머니처럼 마음이 넓은 아이라서 절 용서해 줬죠. 황실의 물건은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어서 부탁드려요. 절 대신해서 트리샤에게 선물을 주셨으면 해요.」

가끔은 비비안도 쓸모 있는 소리를 했다. 트리샤는 저번에 후작에게 받았던 루비 귀걸이를 매만졌다.

「아버지께서 제게 늘 말씀해 주셨던 샤리즈 가문의 붉은 목걸이가 좋을 것 같아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잘 어울리겠죠.」

그 대목을 읽자 트리샤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퍼졌다. 마침 귀걸이만으로는 아쉬웠는데 비비안이 좋은 제안을 했다. 뺨 두 대 맞고서 목걸이를 얻는 거라면 수지가 맞는 장사다. 트리샤의 아버지는 아무 대가도 없이 배를 걷어차곤 했으니 말이다.

“목걸이라, 후후.”

트리샤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편지를 원래대로 돌려놨다. 미리 준비한 풀을 밀랍 아래에 살짝 바르고 손의 체온을 가하면 뜯어 본 적도 없는 새 편지가 될 것이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트리샤의 손이 능숙하게 편지를 다물었다. 트리샤에게 이 편지는 새로운 목걸이의 교환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마차가 샤리즈 후작가에 도착했다. 트리샤는 안내를 받아 익숙하게 칼 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후작부인이 함께 소파에 앉아서 트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리샤는 전부터 후작부인을 대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착실히 예를 갖추고 칼 경에게 편지를 건넸다.

“비비안이 잘 지낸다는군, 황태자 전하께서도 잘해 주시는 모양이야.”

칼 경이 편지를 살피며 말하자 후작부인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긴, 어떻게 키운 내 딸인데요. 고귀한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아이예요. 안 그러니, 트리샤?”

“예, 부인.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의연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야지. 내가 그 아이를 가르치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데. 정말이지, 제국에서 유명한 선생은 모두 우리 집을 거쳐 갔으니 말이야.”

샤리즈 후작가는 애초에 딸을 결혼시켜 덕을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 걸음마도 떼기 전의 비비안을 시녀장 출신의 부인에게 맡기고 온갖 교양을 다 가르쳤다. 물론 샤리즈 후작부인도 바빴을 것이다. 미래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 모든 연회에 참석해야 했으니까.

“어디, 나도 그 편지 좀 봐요.”

부인이 후작에게서 편지를 뺏다시피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트리샤는 그 안에 있는 제 목걸이에 관한 내용이 곧 언급될 것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흐음…… 역시 우리 딸이야.”

그러나 후작부인은 목걸이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고 훗,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트리샤? 오느라 고생했으니 이만 쉬어라. 네 처소를 마련해 뒀다.”

“네, 부인.”

트리샤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무릎을 굽혔다.

“그래. 비비안이 부탁한 걸 어서 준비해야겠군.”

칼 경의 목소리가 트리샤의 주의를 끌었다. 후작은 트리샤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을 찡긋하며 강한 암시를 줬다.

그제야 트리샤는 마음이 확 풀렸다. 아마 남에게 인색한 후작부인의 눈을 피해 비비안의 부탁을 들어줄 모양이다. 하긴, 칼 경은 처음부터 트리샤에게 후한 인물이었으니까 믿을 만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볼게요.”

후작부인이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말로 줄 건가요? 목걸이.”

트리샤가 방을 나서자 후작부인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 남편에게 다가섰다.

“비비안의 부탁이잖아.”

“아니, 내 말은…… 당연히 우리 아이의 부탁을 들어줘야죠. 하지만 오늘 당장 가능하겠냐고요.”

후작부인이 따지듯 말하자 칼 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우리 딸이 조르는데. 부인도 알잖소, 내가 딸에게 약한 아비라는 것을.”

“흥, 말은 잘하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당신이 직접?”

“그게 낫지 않겠나.”

“그래요, 모처럼 좋은 아버지 노릇이나 해 봐요.”

칼 경이 말없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자신의 딸을 떠올리면서.

***

창밖의 붉은 석양을 보는 비비안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러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붉은 석양, 붉은 트리샤, 붉은 목걸이…… 그래, 상념의 끝은 역시 붉디붉은 목걸이에 대한 기억이다.

‘아버지, 언니가…….’

‘비비안, 만지지 마!’

그때 비비안은 무척 어렸다. 그러나 어른이었어도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것이다. 그때 비비안의 언니는 이미 죽어서 하얗게 굳어진 후였으니까.

그 목덜미에 붉은 자국만이 생명의 증거처럼 선명했다. 어렸던 비비안의 눈에는 마치 잠든 언니가 붉은 목걸이를 한 것처럼 보였다.

‘언니가 붉은 목걸이를 했어.’

‘그래. 이건 배반의 의미란다. 샤리즈 후작가의 저주지.’

비비안을 뒤에서 끌어안은 아버지가 낮게 속삭였다. 아주 먼 훗날 알았지만, 그때 언니는 정해진 혼담을 피해서 자신의 연인과 도망치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가문을 배반하면 붉은 목걸이가 목을 조여서 목숨을 빼앗아 간단다.’

그리고 아마도 살해당했다. 누구의 손으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적만이 분명했다. 샤리즈 후작가의 명예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그것은 오늘 밤, 다시 되풀이될 일이었다.

“안녕, 트리샤.”

비비안의 혼잣말이 담담하게 울렸다.

“내 귀여운 배반자.”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엔 틀림없이 붉은 목걸이가 잘 어울릴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