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평소처럼 침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비비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침전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노기 어린 루카스의 표정도 처음 보지만, 그의 등 뒤로 쾅 닫히는 문과 단둘이 남은 상황이 더 두려웠다.
“황태자 전하…….”
비비안이 얼른 일어서 예를 갖췄다. 국혼 이후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금 앞에 선 남자는 완전히 타인처럼 느껴졌다.
“어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그대에 대해서 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예?”
비비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루카스를 올려 봤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던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녹안이 차가웠다.
“대체 본인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저는…… 전하의 정비로서 전하를 평생 모실…….”
픽, 대놓고 루카스가 실소했다.
“내가, 모후가, 황실이 왜 그대를 황태자비로 삼았다고 생각하나?”
그러더니 비비안의 턱 끝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추어올렸다. 비비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수모였다.
“고귀한 신분? 고작 후작가 주제에. 그럼 빛나는 미모라도 있나?”
그거로도 모자라 루카스는 턱을 잡은 손을 이리저리 돌려서 비비안의 얼굴을 사방으로 살폈다. 마치 물건이라도 검사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하필 오늘 디아나를 정면으로 본 후였다. 어느 여인인들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게 자신의 부인이라면 더욱 그랬다.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그리 아름다운 신붓감도 있었는데, 고작 이렇게 평범하게 생긴 비를 맞이했다는 게 괜히 더 분했다. 그런 주제에 감히 제 것에 손을 댄 것이 발칙하고 괘씸했다.
루카스는 비비안을 붙들고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반동으로 비비안은 내동댕이쳐져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이, 루카스를 올려다보는 눈이 서러웠다.
“황실에서 기대한 건 이도 저도 아닌 바로 그 평범함이다. 제 분수를 알고 모나지 않게 정비로서 순종적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왜 모르지? 그게 본인의 존재 가치인 것을.”
신랄한 말이 비비안의 가슴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비비안은 떨리는 손을 애써 억누르고 자세를 고쳐서 루카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떤 고난도, 어떤 시련도 버텨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부가 떠올랐다.
“전하. 제게 부족함이 있었다면 용서하세요.”
“그러고 돌아서 궁인들에게 손찌검하며 분풀이를 할 건가?”
그제야 비비안은 루카스의 분노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깨달았다. 도대체 제 처소에서 쉬고 있을 트리샤의 일을 어떻게 루카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아, 그럼 내 눈이 틀렸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저 뺨만 두어 대 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번질 줄은 몰랐다. 그걸 루카스가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일단은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루카스의 성정으로 봐서 더 변명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비비안은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억울함을 삼켰다.
“전하께 고합니다. 제가 입궁해서 사람을 때린 것은 딱 한 번, 그것도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데려온 개인 시녀인 트리샤의 뺨을 쳤습니다. ……네, 아주 매섭게 쳤습니다. 제 손이 아플 정도로, 그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요.”
지금 비비안의 눈동자도 그렁그렁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모면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비비안은 우선 최악의 전개를 비틀기로 했다. 황태자비로서 괜한 투기를 해서 시녀를 손찌검했다고 하면 큰 허물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트리샤는 후작가에서부터 제 유일한 친구였고, 함께 입궁해 줘서 제 외로움을 달래 준 존재였어요. 다른 궁인들이 보기엔 무척 불공평했겠지요. 그건 제가 처신을 잘못하고 편애한 탓이 큽니다. 제가…… 부족해서요.”
“편애해서 그렇게 입술이 터지고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쳤나 보지?”
그런 적은 없었다. 비비안은 그 대목에서 트리샤의 고의성을 눈치챘지만, 한결 간절하고 서러운 눈빛으로 루카스를 응시했다.
“네, 그렇습니다.”
비비안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애초에 비비안의 손톱은 생채기를 낼 정도로 길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 손톱을 내보이며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최근, 트리샤가 제 일을 소홀히 하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예사에다 다른 궁인들에게 제 일감까지 떠맡긴다고 해서 저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쁜 소문이란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입에 담기 어려운 말까지 나오게 되어서…….”
대부분 사실이었다. 왜 시녀장인 엠마가 그들의 현장을 직접 비비안에게 보여 줬겠는가. 이미 궁에선 소문이 파다했다.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라니?”
“트리샤가 전하의 총애를 얻으려고 개들을 핑계 삼는다는…… 말도 안 되는 악담이요.”
“뭐라.”
루카스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비비안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전하, 트리샤는 그런 아이가 아니에요!”
이건 또 다른 반전이었다. 지금 비비안은 자신이 아닌 트리샤를 변호하려 목소리를 높였다. 신랄한 독설을 퍼부으려던 루카스는 예상 밖의 전개에 입을 다물었다.
“시녀이기 전에 제 친구라서 알아요. 트리샤는 누구보다 순수한 아이일 뿐, 나쁜 마음을 먹을 아이가 아니에요. 천성이 착해서 동물을 좋아하고 전하의 도움이 되려고 했던 거겠죠.”
“그렇다. 그걸 알면서 왜 그 아이를 체벌했지?”
“오늘, 트리샤가 제 일을 빼먹고 늦게 궁으로 돌아온 걸 모두가 보게 됐어요. 솔직하게 말했으면 될 텐데, 소문을 의식하고 전하와 저의 이름에 누가 될까 봐 제 잘못으로 돌리더군요. 게으름이 나서 일을 빼먹은 것처럼요.”
허, 루카스의 입에서 실소가 나왔다. 비비안은 더욱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궁인들은 규정에 따라서 따로 처벌을 받는 곳이 있다던데…… 트리샤에게 그런 무서운 일을 당하게 할 수도 없고, 제 입으로 업무에 태만했다고 하는 걸 넘어갈 수도 없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처벌하겠노라고 트리샤의 뺨을 쳤습니다. 아무도…… 이 일에 대해서 더 거론할 수 없도록.”
이건 루카스가 생각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 아이에게 직접 하문하셔도 됩니다.”
비비안의 계산대로라면 트리샤도 다른 소리를 못 할 것이다. 어차피 먼저 거짓말을 시작한 건 트리샤니까.
“……됐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루카스의 노기가 조금 가신 것 같았다. 위기는 넘긴 셈이다.
“황태자비가 되어서 궁인들에게 그리 휘둘리면 어떡하나.”
루카스의 힐난이 아까처럼 차갑지 않았다. 루카스는 자못 인정을 베푸는 척 손을 뻗어 무릎을 꿇은 비비안을 일으켰다.
“황태자비전의 주인으로서, 궁인들을 엄히 다스릴 필요도 있겠지.”
“제 권한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알지 못하여서.”
비비안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조금 전까지 비비안이 황태자비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했던 루카스다. 출신도 미모도 아무것도 귀하지 않은 그저 평범하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그 태도의 모순을 본인만 모르는 것인지 루카스의 표정이 태연했다.
“제 궁인 정도는 알아서 다스려라, 휘둘리지 말고.”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비비안은 조금 더 큰 권한을 허락받았다. 무릎을 꿇고 그런 굴욕을 당했으니 비비안도 얻는 것이 있어야 했다.
“참. 트리샤는 내 개를 돌보느라 앞으로도 자주 자리를 비울 테니, 아예 일을 맡기지 마라.”
“……예, 전하.”
“오늘은 뭘 할 기분이 안 나는군.”
쯧, 루카스가 혀를 찼다. 모처럼 행차한 보람이 없어졌다. 비비안은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 가겠다.”
비비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순종밖에 없었다. 루카스가 떠나자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굴욕을 하필 제 남편에게 당했다. 루카스의 평판이 좋진 않았어도 황태자비에게 선을 넘진 않았는데, 오늘에야 그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그 계기가 하필 트리샤라는 것이 가장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참아야지. 참고, 순종해야지.”
비비안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신분도 미모도 별것 아닌 자신이 황태자비가 된 이유가 그거라고 하니 마땅히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게 내 역할이니까.”
비참한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비비안의 갈색 눈동자는 예전과 전혀 다른 빛을 머금고 있었다. 지금은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때를 기다릴 것이다.
***
트리샤의 예상대로 다음 날이 밝자마자 제 처우가 확 달라졌다. 당번으로 정해진 일에서 모두 제외됐고, 황태자전의 명이 있으면 언제든 자리를 비워도 된다고 했다.
오히려 시녀장인 엠마가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요청하라고 했다. 트리샤가 가장 먼저 원한 것은 어젯밤을 지새웠을 비비안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제 계략의 결과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비비안.”
황태자비의 침전에 들어간 트리샤가 얼른 비비안의 침대로 달려갔다. 아직 침대에 누운 비비안은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한 것처럼 수척한 안색이었다.
“아, 트리샤 왔어?”
“응. 어제 잘 못 잤어? 안색이 안 좋아. 혹시…… 어제 황태자 전하께서 나 때문에 뭐라고 하신 거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그걸 설계한 게 트리샤 본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트리샤가 울상을 지었다.
“실은 전하께 흉을 들켜서…… 나는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했는데 들어 주질 않으셨어. 혹여 너한테 불똥이 튈까 봐 어제 한잠도 못 잤어.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아무 일도 없었어.”
비비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피로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트리샤는 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트리샤는 이걸 비비안의 호의로 생각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자존심일 테지.
“몰랐는데, 이렇게 상처가 날 정도였구나…….”
비비안이 손을 뻗어 트리샤의 뺨을 어루만졌다. 후회가 담긴 표정이었다.
“나 사실 한 번도 누굴 때려 본 적이 없어서, 미안해.”
“아냐, 괜찮아. 정말이야!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걸.”
트리샤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트리샤를 보다가 와락 트리샤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 나 사실 질투했나 봐. 하나뿐인 내 친구를 뺏기는 기분이 들어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제 남편을 빼앗으려고도 했다.
“항상 너는 내 친구인데, 내가 바보 같았어.”
그래, 바보 같았다. 처음부터 이런 아이를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비비안은 이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로 했다. 트리샤가 속으로 비비안을 무시하고 비웃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