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비비안이 고민도 없이 내뱉었다.
“난, 그런 선물 필요 없어.”
비비안이 트리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트리샤. 넌 내 친구니까, 이제 내 곁에만 있어 줘. ……응?”
비비안은 다시 어미를 잃은 강아지처럼 트리샤를 애절하게 바라봤다. 답이 없는 구제 불능의 애정 결핍이었다. 트리샤의 짧은 생각엔 그랬다.
“알았어, 비비안. 미안해. 앞으로는 둘이 시간을 보내자.”
아까 잠시 쪼그라들었던 트리샤의 심장이 다시 제 박자로 뛰었다. 정말이지 한심한 꼴이었다. 한 나라의 황태자비가 제 남편을 꼬여 내는 것을 눈앞에 두고도 몰랐으며, 그 상대에게 집착하며 친구 타령 하는 게 우스워서 참느라 고역이었다.
“응, 미안해. 나도 모르게 때려서…….”
“아냐, 괜찮아. 우린 친구잖아.”
트리샤가 비굴할 정도로 밝게 웃었다.
“자, 이리 와. 한번 안아 보자.”
비비안이 자못 아량을 베푸는 듯이 말하며 팔을 벌렸다. 트리샤는 웃으며 비비안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서로를 끌어안은 두 여인은 상대의 얼굴을 스치기 무섭게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트리샤, 우린 친구 맞지?”
“응, 당연하지.”
트리샤의 불행은 단 한 번도 평등한 친구를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트리샤는 친구끼리 이런 이유로 일방적으로 뺨을 때리고, 또 때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건 줄 알았다.
비비안은 트리샤에 대한 집착이 상당했고, 애정 결핍도 있었으니 잠시 서운함이 폭발한 것에 불과하다고 넘겼다.
“이제 오후엔 나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내가 잘 때까지 지켜봐 주고. 알았지?”
유아적인 투정이었다. 동시에 루카스와 부정을 저지를 틈을 원천 봉쇄하는 방법이었다.
“응. 내가 비비안의 악몽을 쫓아 줄게.”
이제 순진한 것은 트리샤다. 애초에 샤리즈 후작가에서 자란 비비안만이 온순하고 정상적일 리 없는 건데, 겉모습과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 보기 좋게 속고 있었다. 심지어 비비안은 트리샤가 순진한 자신을 이용한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그래. 네가 없어서 외롭고 무서웠단 말이야…….”
비비안은 영리했고, 트리샤는 어리석었다.
“알았어, 이제부터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안심해, 비비안.”
“응.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비비안의 한쪽 입꼬리가 뒤틀렸다. 샤리즈 후작부인을 꼭 닮은 냉혹한 미소였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비비안의 갈색 눈동자는 이미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
루카스는 달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의 불임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이 장소에서 똑같이 달을 보고 있었다. 그동안 묻혀 있던 의혹은 한 번 눈길을 주자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디아나 카를.”
본래는 황태자비가 돼야 했을,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영애였다. 그러나 디아나는 제 입으로 불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황태자비 후보에서 스스로 내려갔다. 흔히 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니었다. 설령 비비안이 불임이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디아나처럼 고했을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루카스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의회에서 봤던 디아나의 모습이 종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처럼 일렁이던 백금발과 새하얀 피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와 붉었던 입술.
당연히 루카스의 것이어야 했던 여인이 몸소 공작이 되어 자신을 의회에서 마주 보다니 그 기분이 퍽 기묘했다.
그런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벌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에드윈까지, 전부 루카스의 시선에선 불쾌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였다.
“전하, 오늘은 예부에서 정한 합궁일입니다.”
시종장이 아까부터 꿈쩍도 하지 않는 루카스를 보며 불안한 듯 다시 고했다.
“……시끄럽다.”
“황후 폐하께서도 합궁일은 반드시 지키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가면 되잖나, 가면.”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도 모후에겐 아들일 뿐이었다. 루카스가 내심 선위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였다. 황제가 되면 태후로 물러서는 모후도 이런 간섭은 못 하게 될 터다.
“날이 춥사옵니다.”
시종장이 다가와 루카스의 어깨에 두꺼운 로브를 걸쳐 줬다. 로브 안감인 모피를 보자 새삼 에드윈의 작품일 디아나의 새하얀 코트가 떠올라 절로 인상이 써졌다.
대공이 하필 황태자비 후보였던 여인과 사통한다는 건, 루카스의 몫을 취하겠다는 도전처럼 느껴졌다.
“짜증스럽군, 정말.”
루카스의 혼잣말에 시종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길을 안내했다.
루카스는 의회에 다녀온 후 종일 심기가 불편했다. 시종장은 변덕스러운 루카스를 어릴 때부터 섬긴 몸이라 그 성정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 작은 장치를 이 모퉁이 너머에 마련해 뒀다. 최근 루카스를 소리 내서 웃게 하는 유일한 인물, 트리샤 블랑이었다.
“전하, 여기서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황태자비전의 시녀가 합궁일에 침소까지 안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종장은 미리 손을 써서 당번을 트리샤로 살짝 바꿨을 뿐이다.
루카스는 고개를 숙인 트리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시종장의 선택이 옳았던 모양이다.
“시종장은 그만 물러가라.”
“예, 전하.”
시종장이 어둑한 복도에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트리샤는 예법에 따라 등불을 들고 황태자전과 황태자비전을 잇는 긴 복도를 한 발짝 앞서 걸어갔다.
“솔직히 오늘은 내키지 않는다.”
루카스가 담담한 말을 뱉었다. 왠지 트리샤 앞에선 개들을 대할 때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황태자비인 비비안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친밀감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항상 조잘대지 않았나.”
트리샤는 루카스와 있을 때면 상기된 뺨으로 별 이야기를 다 재잘거렸다. 그러다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싶으면 붉은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루카스의 눈치를 보곤 했다.
루카스는 트리샤의 유치한 수다를 꽤 즐기던 차였다. 그러나 오늘 트리샤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고개만 푹 숙인 채로 주어진 일을 했다.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뭐냐.”
트리샤의 걸음도 같이 멈췄다. 여전히 고개는 푹 숙인 채였다.
“내가 묻고 있잖느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둘밖에 없는데도 엄격히 격식을 차리는 데다 풀이 죽은 목소리. 그건 트리샤답지 않았다. 루카스는 확 손을 뻗어서 트리샤의 턱을 잡아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었다.
“꼴이…… 왜 이렇지?”
트리샤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계단에서…… 넘어져서…….”
“내게 거짓을 고하는 건 중죄다.”
트리샤의 얼굴은 누가 봐도 맞은 흔적이 역력했다. 뺨은 엉망으로 부어 있었고 더러 손톱자국 같은 것과 입술 근처가 터진 자국을 보면 뻔했다.
물론, 대부분은 트리샤 본인이 제 얼굴을 쥐어뜯어 가며 만든 상처였다. 마침 비비안에게 따귀를 맞은 게 분했던 차에, 시종장이 절호의 기회를 준 것이다.
“황태자비가 한 짓이냐?”
“아니에요, 정말 제 실수로 넘어져서…….”
“이게?”
루카스가 거칠게 트리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트리샤의 손에 들린 등불을 빼앗아 얼굴 근처에 갖다 비췄다. 뺨이 엉망으로 터진 자리에 기다란 손톱자국까지, 여인에게 맞은 상처다.
그리고 황태자비의 개인 시녀를 때릴 수 있는 여인이라면 이 궁에 단 두 명뿐이다. 하나는 모후인 스텔라였고 하나는 트리샤의 실질적 주인인 비비안이었다. 그러나 오늘 모후는 아파서 문후도 거른 상태다. 누가 트리샤를 이렇게 때렸는지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감히 황태자인 내게 계속 거짓을 고할 셈이냐?”
트리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울어진 눈썹이 난처함에 파르르 떨렸다.
“사실대로 말하면 네게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 누구도 묻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명백히 비비안을 겨냥한 말이었다. 트리샤는 계속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루카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 제 몸을 루카스의 발아래로 던졌다.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루카스의 발목을 잡은 트리샤가 처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전하, 다 제 잘못이에요. 전부 제 잘못이니까…… 부디 모르시는 거로 해 주세요.”
“무슨 이유로 맞은 건지 고해라.”
“제가…… 실수를 많이 해서 그래요. 정말로 다 제 잘못이에요!”
루카스가 눈썹을 찌푸린 채로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는 그 시선에서 제 승리를 읽어 냈다. 피해자인 트리샤가 비비안을 감싸면 감쌀수록 루카스의 심기를 자극할 것이다. 트리샤가 자진해서 일러바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하, 제발 절 생각하셔서라도…….”
“알았다. 바닥이 차니 그만 일어나라.”
트리샤의 애원에 루카스가 못 이긴 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녹안엔 분노가 서렸다.
성큼성큼, 비비안의 처소로 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그만큼 트리샤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비비안도 이제부터 루카스와 트리샤의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 관계는 셋이 되었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인정해야 할 테니까.
“전하, 저는 여기까지만 보필하겠습니다.”
트리샤는 일부러 시녀장인 엠마의 눈치를 노골적으로 살피며 속삭였다. 궁에서 자란 루카스가 이 미묘한 기류를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리고 루카스는 이런 상황을 무척 혐오했다. 모후의 눈을 피해 루카스의 상대를 해 주던 궁인들이 심한 매질을 당하거나 같은 궁인들끼리 질시하는 꼴이 떠올랐다.
어쩌다 루카스의 마음에 드는 궁인이 생겨도 곧 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하지만, 그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루카스가 트리샤 하나 정도도 지킬 수 없다면 모욕적인 일이다. 즉, 이건 루카스의 자존심을 건드린 문제였다.
“트리샤, 넌 이만 물러가라.”
“예, 전하.”
트리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억지로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채 물러갔다.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이미 침소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시녀장 엠마가 다가와서 예를 갖췄지만, 루카스의 얼굴이 냉랭했다.
“잘됐군.”
엠마는 루카스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예부에서 정한 합궁일을 무를 수 없어서 황태자전에 재촉을 넣은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그보다 본래 마중을 나가기로 했던 시녀가 아닌 트리샤가 그를 안내해 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루카스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서 이대로 그를 비비안에게 데려가도 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비켜라.”
하지만 결정은 엠마의 몫이 아니었다. 루카스가 망설임 없이 거칠게 침전의 문을 걷어찼다. 국혼 후로 처음 보인 난폭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