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동안 디아나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지난 생에서 겪었던 생생한 죽음의 고통과 상실감은 디아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느린 행보를 걸은 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변화를 관찰해야 했고, 대응할 힘을 길러야 했다. 디아나가 기점으로 삼기로 했던 건 자신이 카를 공작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싸움이 끝난 건 아니지.”
잠깐의 영광과 축복에 기뻐할 시간은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디아나가 새로 태어난 것만큼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기 마련이었다. 이 책은, 늘 그런 식으로 주인공에게만 너무 가혹했다.
“샬롯, 그레이.”
세 사람은 늦은 밤인데도 응접실에 둘러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까의 의회보다 훨씬 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린 당분간 수도를 떠날 수 없게 됐어. 그것도 황태자 전하가 직접 나서서 방해했기 때문이야.”
그레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궤변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감정싸움이야. 그래서 난 이번 일에 오웬 경을 참여시키지 않으려고 해.”
분명 현자인 오웬은 방법을 찾아내겠지만, 그건 루카스의 자존심을 꺾을 테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현자는 현자 나름의 방법이, 미친놈을 상대하는 데는 또 그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샬롯, 사라 블랑의 소재는 아무도 모르는 것 맞지?”
“네, 확실해요. 니콜라도 거기로 돌려보냈으니 우리가 찾지 않는 한 남이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아요.”
일단 안심이 되는 소식이었다. 디아나는 트리샤가 마녀로서 각성하는 데는 어떤 조건이, 어쩌면 사라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추측했다. 처음으로 트리샤가 마녀의 모습을 보였을 땐, 그녀의 부모가 모두 의문의 화재로 숨진 직후였다. 과연 그건 우연이었을까. 상대가 트리샤라면 그럴 리 없다.
“어떻게든 사라 블랑의 목숨을 지켜야 해.”
“예? ……하지만 아가씨, 사라 블랑의 병세가 깊어서 의원도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해요.”
디아나가 초조함에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의원들에게 약재를 아끼지 말라고 전해.”
“네, 아가씨.”
한편으로는 니콜라를 계속 수도에 데리고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너무 위험했다. 또한, 니콜라에 대해 묘한 집착이 있는 사라를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당분간 공작저는 얌전히 지내며 황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해. 그리고 그들이 안심하면 그때 바로 떠나자.”
“그래요.”
디아나는 루카스의 집요한 녹안을 떠올렸다. 이 정도에서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쉬이 넘길 자신이 없었다.
루카스가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의심하게 됐는지만 알아도 좋을 텐데, 그의 속내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방면의 의심을 피해야 했다.
“새로운 황태자비 전하를 이토록 응원하게 될 줄이야.”
힘없는 혼잣말이었다. 지금 트리샤는 황태자비의 시녀로 황실에 있었다. 마치 옛날이 떠오르는 조합이었다. 만일 새로운 황태자비인 비비안이 예전의 디아나보다 현명하게 처신해 준다면 불행은 기우에 그칠 것이다.
“아쉽게도, 샤리즈 후작가는 우리 카를 공작저와 좋은 사이가 아니지요.”
“그래. 절대 한편이 될 수 없는 관계야. 그리고 내 추측이지만…… 아마 황태자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질 거야.”
트리샤가 곁에 있는 한, 황태자비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디아나가 모르는 곳에서 이미 루카스와 트리샤의 그 죽일 우정이 피어났는지도 모른다. 디아나는 몰랐지만, 그 무서운 추측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레이, 저택 경비를 강화해. 어디서 끄나풀이 숨어들어 올지 몰라.”
만일 루카스가 제대로 의심을 시작했다면 뭔가 알아내기 위해서 사람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숨기고 싶은 증거도 없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에드윈과의 관계가 섣불리 탄로 나면 약점이 될 것이다.
“아가씨, 참……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요.”
“아니, 아니야. 이건 처음부터 길고 지겹게 이어질 전쟁이었어.”
디아나가 처음 이 책으로 들어와 주인공이 된 뒤 목숨을 걸고 반복해 온 전쟁은 이제 디아나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분에 접어들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 디아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역시…….”
디아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 늘 위기의 순간이면 그 후회가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만일 그 책을 끝까지 읽었다면, 적어도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는지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
그 무렵, 비비안은 황실의 분위기가 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인들의 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황태자의 걸음이 확연히 뜸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전속 시녀인 트리샤를 불러 가는 일은 잦았다.
몇 번은 황태자의 개들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해서 참았지만, 점점 그 핑계만으로는 감싸지 못할 정도로 트리샤의 부재가 커졌다.
“황태자비 전하, 발밑을 조심하시지요. 정원석이 울퉁불퉁합니다.”
“그래.”
비비안은 오후의 일과를 마치고 시녀장의 권유로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본 것 중에서 가장 불쾌한 장면을 목격했다.
“저, 전하.”
시녀장 엠마가 속히 길을 틀려고 했지만, 비비안이 한 손을 들어 조용히 하고 멈추란 뜻을 내렸다. 사실, 엠마가 바라던 답이었다. 직접 고해바치는 것은 꼴이 우스워지니 자연스레 눈으로 목격하란 뜻이었다. 엠마의 예상대로 비비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트리샤, 더 높이 던져야지!”
“안 돼요, 전하. 아무리 높이 던져도 카탄이 낚아챈다고요.”
비비안은 루카스가 그렇게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둘은 마치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세 마리의 개들과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다. 신분이 비천한 시녀와 놀이…… 그것도 문제였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앗, 전하 루키가 그쪽으로……!”
“뭐야, 내가 졌다.”
그건 그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루카스와 트리샤가 서로를 보는 눈빛과 미소, 이따금 까르르 내뱉는 웃음소리. 전부 비비안에게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루카스의 곁은 트리샤라는 존재만으로도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비비안은 최근 황태자비전에 걸음을 하지 않은 루카스의 속내를 알았다.
아니, 비비안이 마지막으로 안 것이다. 아마 시녀장이 자신을 여기 데려온 것부터…… 비비안을 제외한 모든 궁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자.”
“예.”
비비안이 굴욕적인 장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트리샤에 대한 배반감, 루카스를 향한 원망, 그 동시에 트리샤를 독점하지 못한 질투. 원색의 감정들이 비비안의 가슴에서 소용돌이쳤다.
“내가 오늘 봤다는 것은 비밀로 해라.”
“예, 전하.”
“모두 입단속을 시키고…… 트리샤는 이따 내 처소로 오라고 해.”
막상 이런 일을 당하면 먼저 화가 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너무 차분해졌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지쳐 버리는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만이 아니었다. 트리샤도 제게 그런 미소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비비안은 그제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았다. 다른 시간 축에서 디아나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비비안은 단지 황태자비의 관을 쓰기 위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음을, 친구와 남편은 그녀를 기만한 채로 아름다운 우정을 가꿔 나갈 거라는 그저 그런 비참한 이야기. 비비안은 그 이야기의 조연이었다.
***
트리샤는 황태자비전의 분위기가 무겁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침전에 노크한 뒤에 방으로 들어서자 비비안은 의자에 앉은 채 아무런 표정 없이 트리샤를 봤다.
“비비안, 엠마 시녀장이 날 찾았다길래……. 내가 너무 늦어서 화났어?”
“아니. 넌 황태자 전하의 부탁으로 개를 돌보러 간 거잖아. 그렇지?”
“으응. 개들이 이상하게 내 손을 타서 시중을 드느라 곤욕이네.”
트리샤가 어색하게 웃었다. 곤욕이라고 말하는 것치고는 아까 무척 행복하게 웃고 있던 것 같은데. 비비안은 그 말을 하는 대신 픽, 실소했다.
“비비안, 화났어?”
트리샤는 붉은 눈동자 가득 걱정을 담아서 비비안에게 다가왔다. 왜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이 모든 행동과 말이 전부 가식이었다는 것을, 이번 일이 아니어도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을.
“트리샤, 내가 항상 물어보잖아. 우리가 유일한 친구라는 거…….”
“응.”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럼, 그야 당연히…….”
짝, 하는 마찰음에 바닥으로 쓰러진 트리샤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고개가 홱 돌아간 트리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비비안을 봤다.
“비비안……?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줘.”
“잘못한 사람이 말해야지.”
비비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트리샤의 나머지 뺨을 짝, 하고 갈겼다. 트리샤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비비안을 봤지만, 순순히 제 뺨을 내놨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뺨을 갈기는 비비안에게선 샤리즈 후작부인의 독한 눈빛이 그대로 보였다. 반항은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다.
“비비안,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할게. 그런데 정말 모르겠어……. 난 당연히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뭘…… 네가 화나게 한 건지 모르겠어.”
필사적인 트리샤의 말을 듣던 비비안이 손을 뻗어 트리샤를 일으켜 세웠다. 이미 양 볼이 부풀어 오르고 입술까지 터진 트리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비비안도 실제론 처음 휘둘러 보는 폭력에 내심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비비안의 눈동자는 트리샤를 원망스레 보고 있었다.
“알려 줘, 비비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우린 유일한 친구라고 했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비비안의 눈앞엔 가련한 트리샤가, 머릿속엔 루카스와 까르르 웃던 모습이 동시에 담겼다. 자신의 남편을 탐하는 건 친구라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의 비비안이 과거의 디아나보다 영리했다. 후작부인의 교육에서 그런 천한 짓을 하는 것은 친구가 아닌 비천한 도둑년이라고 배웠으니까.
“아, 혹시…… 내가 황태자 전하와 시간을 보낸 것 때문에 그래? 그건…… 비비안, 네 오해야.”
먼저 말을 꺼내는 건 우습게도 트리샤였다. 즉, 이게 비비안이 화를 낼 만한 잘못이라고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고의다.
“개를 돌봐 달라고 부르신 건 전부 사실이야. 그런데 개들이 너에게도 익숙해졌으면 하셔서, 비슷한 체구인 내가 상대로 놀이를…… 하면서 익숙해지게 하자고 하셨어. 네겐 깜짝 선물로 알려 주고 싶다고 하셔서…….”
트리샤의 영악한 머리가 재빠르게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