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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1화 (121/184)

121화

바로 다음 날, 디아나는 의회에 참석했다. 여태까진 자신이 논제인 의회에도 영애란 신분으로 참석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의회는 디아나의 빠른 출현에 조금 술렁거렸다. 디아나가 공작이 된다고 해서 실제로 의회에 참석할 거라고 여긴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새로운 카를의 공작은…… 특별히 발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의회장인 하인리히의 말은 다분히 저의가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이 호명되자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별히 발언할 것이 있어야만 의회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싱긋, 미소를 짓는 디아나에겐 여유가 있었다. 에드윈은 반대편의 의석에서 그런 디아나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그의 품에 있을 때는 한없이 여리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었지만, 지금 의회에서 우뚝 선 디아나에게선 기백이 느껴졌다.

“하지만 모처럼 기회를 주셨으니 발언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아나는 이제 아무것도 미루지 않을 것이다.

“카를의 영지는 너무 오랫동안 그 주군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공작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카를 공작령을 직접 다스리고자 합니다.”

뜻밖의 발언에 잠시 의회가 술렁였다. 보통은 지방 영지에서 세력과 재산을 모아 수도의 의회로 진출하고 싶어서 난리인데, 디아나가 하려는 일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물론, 수도의 의회 결정권을 포기하지도 않을 겁니다. 중대한 사안은 전서구나 서신을 통해 참여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문제는 없지만…….”

하인리히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당장 갈 생각입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뭐 굳이 북쪽 땅으로 사라져 준다면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었다.

“그래요. 카를 공작의 고귀한 결정을 본 의회장은 존중하겠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늦게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그게 가능한 신분은 황태자인 루카스뿐이었다. 루카스는 밖에서 들었는지 묘한 눈동자로 디아나를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나는 반대다.”

모두의 시선이 루카스를 향해 쏠렸다.

“이제 막 공작이 되었으니 제국을 향한 충심을 증명해야 할 터. 이렇게 시급하게 영지로 떠나는 것은 황태자로서 좌시할 수 없다.”

성큼성큼 의회의 중심으로 걸어간 루카스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제국의 의회였고, 황제가 병석에 있는 이상 최고 결정권자는 황태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카를 공작가는 유구한 역사 동안 제국에 변함없는 충성을 지켜 왔습니다.”

디아나가 눈을 들어 루카스가 앉은 상석을 향했다. 루카스는 그 순간 확신을 굳혔다. 달빛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비굴하게 사과했던 모습은 연기였다. 지금 디아나의 당당한 태도에선 그날의 비굴함도, 실언을 뱉는 서투름도 찾을 수 없었다.

“디아나 카를, 그대는 아니다. 이제 막 공작이 되었잖나.”

루카스가 매서운 눈길로 디아나를 노려봤다. 여태 자신은 저 영리한 여인에게 완전히 속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디아나의 손에 공작의 권력이 들어간 후였다. 실소가 나올 만큼 괘씸한 일이었다. 루카스의 의심은 자꾸만 마음속에서 비약을 낳았다.

“고작 하루 제국의 의회에 나온다고 해서 공작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겠는가.”

“전하, 저와 카를 공작가는…….”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

디아나는 본래 자신의 비가 될 운명이었다. 의회에서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날 밤 루카스에게 못난 체 연기한 것이 오늘 이렇게 공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야심을 위해서였다면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이곳은 헤렌 제국의 의회이지, 카를 공작가의 의회가 아니다.”

루카스의 저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디아나는 이미 루카스가 자신의 존재를 거의 잊어 간다고 생각했다. 이제 공작으로서 즉위했으니 북쪽 땅으로 떠나면 영원히 이별이었다. 그런데 그 루카스가 지금 눈앞에서 디아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의회장, 새로 즉위한 공작이 바로 제국의 수도를 떠나는 것에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가?”

루카스는 트집을 위한 트집을 잡으려 들고 있었다. 디아나의 심장이 불길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곧바로 수도를 떠난 예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없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를 포함한 가족 일부를 수도에 남겨 두고 가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렇다는군.”

법으로 정해진 구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먼 곳에 큰 영지를 가진 고위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한 황실의 수단이었다. 수도에 가족과 후계자를 남겨 두는 것으로 반란을 일으킬 의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저의 숙부님 일가가 수도에 남으실 겁니다.”

“전 공작이 아니라, 차기 공작을 남겨야 할 텐데? 아론 경이 그대의 후계자라도 되나?”

“……아닙니다. 하지만 카를가는 무척 오랜 시간 동안 제국에 충성을 지켰습니다. 부디 제가 영지를 돌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루카스는 한층 더 부아가 치밀었다.

역시,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손아귀를 빠져나간 후에야 디아나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셈이었다. 만일 그때도 디아나의 진짜 모습을 알았다면, 제 자식을 낳을 수 있든 없든 놓아주는 일은 없었을 거다.

“영지는 봄에 돌봐도 늦지 않다. 여태 멀쩡했던 영지가 고작 한 계절 사이에 멸망이라도 하겠는가.”

루카스의 말도 일견 옳았다. 제국의 광활한 영토는 이런 식의 봉건주의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요즘같이 평화로운 시대에 억지스럽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수도에선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흐음, 본 의회를 무시하는 발언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루카스의 말꼬리를 잡는 능력은 기억 그대로였다. 디아나는 최대한 불쾌한 심정을 누르고 표정을 흩트리지 않았다.

“디아나 카를은 불과 어제 신의 이름으로 공작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맹세했지?”

“그렇습니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저 제 영지를 돌보는 의무를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공작의 의무는 제국의 의회에 대한 충성도 포함된다. 게다가 곧 대공이 북쪽의 영토 경계선을 확실히 하러 떠난다고 들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에드윈이 튀어나왔다.

“대공이 자리를 비우는데 공작까지 떠나면 의회에 고위 귀족이 너무 적어지는 것 아닌가. 대공이 영토선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에 떠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하.”

참지 못한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디아나는 아까부터 절대 에드윈만은 나서지 않길 바라고 있었으나 물거품이 됐다.

루카스의 성정에 지금 에드윈이 나서는 것을 곱게 보고 넘길 리가 없었다. 하필 에드윈은 절대 나서지 말아야 할 순간에 제 목소리를 낸 것이다. 디아나는 차라리 다음 광경을 보지 않고 눈을 감고 싶었다.

“뭐지, 대공이 직접 할 말이 있나?”

“예. 북쪽의 영토선을 확인하는 건 다급한 일이 아닙니다. 우선, 영지를 보살피고 싶어 하는 카를 공작을 먼저 보내셔도 됩니다.”

“오, 대공이 카를 공작을 위해 양보를 하겠다고?”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 대공가의 일은 그리 다급하지 않기에.”

“그래? 내가 들은 것은 달랐는데.”

루카스는 선대공비를 설득하기 위해서 드노아 경까지 이용했을 정도로 노력했던 에드윈의 행보를 모조리 들었다. 의심이 더욱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허나, 감히 공작가가 대공가에 우선될 수는 없다. 그게 법도이지 않나.”

“전하,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면 굳이…….”

에드윈이 한마디를 더할 때마다 디아나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상황을 멈춰야 했다. 루카스에 맞서서 디아나의 편을 드는 에드윈의 모습은 위험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디아나가 경의를 표시하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대공 전하의 아량에 감사드리지만, 저는 황태자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원하던 답이 나왔음에도 루카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디아나를 볼 뿐, 달리 기쁜 기색은 없었다. 에드윈은 누가 봐도 역력하게 굳어진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태자 전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간신히 폭풍을 가라앉힌 한마디였다. 그러나 이건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사자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폭풍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의회가 끝나자마자 디아나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공작저로 돌아갔다.

“샬롯, 그레이에게 부탁해서 당장 전서구를 보내. 전하에게 당분간은 절대 이 근처에 오지 마시라고.”

“네, 아가씨.”

아까 의회에서 봤던 루카스의 눈동자엔 분명 의심이 담겨 있었다. 한때 그의 아내였던 디아나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자신만의 아집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였다.

“제롬 경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어?”

“네…… 아직은요.”

자꾸 마음이 초조해졌다. 당분간 수도를 떠날 수 없게 된 것도 있었지만, 루카스가 어디선가 냄새를 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디아나를 괴롭혔다.

공작 즉위식에서 열아홉이 되고, 드디어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 불과 어제였다. 그 영광과 평화가 단 하루밖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뭔가, 빠른 수를 내야 해.”

“아가씨, 왜 그러세요? 의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너무 초조해 보여요.”

실제로 디아나는 자꾸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가 날 의심하고 있어. 어쩌면, 우리를.”

“네? 그럴 리가요. 아무 증거도 없어요, 실수한 것도 없고.”

“샬롯, 의심엔 증거가 필요하지 않아.”

그리고 상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루카스였다. 최악의 경우 에드윈과 자신의 관계가 발각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단순한 스캔들로 끝나지 않을 거다. 디아나가 아는 루카스라면 분명 황태자비 검증 이전의 관계까지 추궁해 내서 뒤집어씌울 것이다. 그건 곧 역모였다.

“우린 당분간 수도를 떠날 수 없어. 그게 의회의 결정이고 황태자 전하의 명분이야.”

“그건 카를 공작가의 일인데, 어찌.”

디아나가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치를 따져서 될 일이 아니란 뜻이었다.

“혹시…… 그 아이, 트리샤의 영향일까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악한 힘을 썼다면요?”

그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트리샤가 각성했다면 이 정도에서 그쳤을 것 같진 않았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당장 막아야 하는 건 분명해.”

디아나가 결론지었다. 루카스가 의심을 품고 있을 때 트리샤가 각성한다면 또 최악의 엔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겹고도 지독한 적이 다시 디아나의 앞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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