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디아나가 미처 보지 못한 예배당의 하객 사이엔 트리샤도 있었다. 황태자비의 뒤에 서 있던 트리샤는 디아나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숨죽여서 지켜봤다.
마지막으로 디아나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봤을 땐 마치 용암처럼 뜨겁고 물컹한 것이 가슴에서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트리샤는 자신의 격렬한 감정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공작의 홀을 든 디아나가 너무 눈이 부시고 행복해 보이는 만큼 제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트리샤.”
겨우 정신을 차린 건 비비안이 귀엣말했을 때였다. 오늘 아침부터 유난히 뾰족하게 굴던 루카스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기에 곁에 선 비비안도 괴로웠다.
“난 그만 돌아갈래.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갔다고 인사 전해 드리고 와.”
비비안도 차츰 루카스의 본래 성질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할 땐 눈에 보이지 않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는 것도. 트리샤는 비비안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비비안의 판단은 옳았다. 루카스의 녹안이 집요하게 디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뱀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우스운 짓을.”
루카스의 짓이기는 혼잣말을 트리샤는 똑똑히 들었다. 루카스는 환하게 웃는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목의 라인이 과감하게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디아나에게선 달밤의 서툴고 비굴하던 영애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 위에 걸친 하얀 모피는 황실에서도 구할 수 없는 고급품으로 그 정도 물건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뻔했다. 루카스의 예상대로 디아나는 똑바로 에드윈을 향해 눈을 맞췄다. 수상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트리샤, 개들을 데려와라.”
루카스가 바로 곁에 선 트리샤에게 명령했다. 가슴이 확 답답하고 알 수 없는 체증이 일었다.
“……아니, 나도 같이 나가야겠다.”
“예, 전하. 그……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트리샤가 변명하듯 말했지만, 정작 루카스는 비비안이 사라진 것도 몰랐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을 내저은 루카스가 먼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트리샤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걸었다.
곧 정원에 도착한 루카스는 찬 바람을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그래도 불쾌한 열기가 가시질 않았다. 마침, 겨우 루카스의 걸음을 쫓아온 트리샤가 가쁜 숨을 쉬며 그를 봤다.
“넌 디아나 카를의 친구였다지?”
“예, 전하.”
둘은 그날 이후로도 종종 개들과 산책 시간을 보냈다. 어떨 때는 비비안보다 트리샤가 훨씬 더 루카스와 오랜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었다. 그만큼 둘의 사이는 제법 가까워졌다.
“전부터 대공저와 교류가 있었나?”
“아뇨, 없어요. 디아나는 어릴 때부터 병약해서 거의 요양만 했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아주 최근이겠군.”
그 모피는 분명 에드윈의 솜씨였다. 작년에 사냥한 하얀 여우 털은 황후가 독식했으니 최근 잡아서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루모스 기사단을 이끄는 에드윈 정도였다.
무엇보다 루카스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에드윈이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던 디아나의 눈빛에서 짙은 의심의 냄새를 맡았다. 그건 황후에게서 물려받은 뱀과도 같은 관찰력이었다.
“뭔가 있어. 그것들이 날 기만하는…… 무언가 발칙한 짓거리가.”
“네, 전하?”
트리샤의 놀란 반문에도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트리샤는 눈치를 보며 시종이 데려온 개들을 루카스 쪽으로 이끌었다. 차라리 개라도 보면서 기분이 나아지길 바란 것이다.
“디아나 카를의 성격은 어떻지? 친구로서 말해 봐. 내 눈치 볼 것 없다.”
“디아나는…… 온화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가졌어요. 무엇보다 언제나 차분하고 침착해서 늘 어른스러웠어요.”
그건 루카스의 기억과 달랐다. 실수로 서두르는 바람에 루카스에게 실언하고 비굴하게 사과까지 했던 걸 과연 차분하고 침착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무리 당황스러운 일이 있어도 무척 차분해서 의지가 많이 됐었죠.”
루카스의 속도 모르는 트리샤가 쐐기를 박았다. 사실 황태자에게 실언한 건 큰일이니 평소보다 더 당황했을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는 심증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곧 다른 이유를 찾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에드윈의 그 부드러운 미소와 시선이었다. 둘의 사이엔 뭔가가 있었다. 뭔가, 루카스를 기만하고 얻은 것이.
“트리샤, 만일 디아나 카를이 소문대로 영리하다면…… 누군가를 속이는 건 아주 간단하겠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루카스의 역린은 에드윈이었다.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신이 있음에도 먼저 태어나서 늘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던 존재. 그것도 곧 루카스가 선위를 받으면 끝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에드윈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면 그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디아나는 남을 해칠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공작이 된다고 해서 저도 놀라긴 했지만…… 그건 전하의 비가 될 수 없는 몸이어서 그렇게 된 거니까요.”
그랬다. 지금 루카스에게 남은 찝찝함은 디아나가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멀어지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사유는 디아나 본인이 고했듯, 불임이었다.
하지만 그걸 루카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황태자비 검증은 여인의 일이라고 황후가 주관했고 루카스는 결과만 들었다. 물론, 루카스는 제 어머니를 포함한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용할 수는 있다. 마침 루카스의 앞에 트리샤가 순진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서 있었다.
“잠깐 앉을까, 트리샤.”
루카스가 정원이 보이는 의자에 앉은 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트리샤는 잠시 당황했지만, 루카스가 눈짓으로 재차 권하자 긴장한 채로 루카스 곁에 앉았다. 그러자 검은 개 세 마리가 두 사람의 곁에서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엔 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아. 이 아이들도 널 무척 따르고, 동물이 따르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지. 안 그래?”
트리샤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조금 전 디아나를 보고 느꼈던 알 수 없는 열기가 잦아드는 것 같았다.
“난 우리가 일종의 친구 사이라고 생각한다.”
“네? 제가 어떻게 감히…….”
“이 아이들이 널 인정했으니 그걸로 됐어.”
루카스가 손을 뻗어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날 그렇게 여겨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슬쩍, 루카스가 개를 쓰다듬던 손을 빼서 트리샤의 손 위로 얹었다. 최초의 신체 접촉에 트리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눌러야 했다.
“신분을 넘어서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절친한 친구로 말이다.”
“그야, 물론……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루카스의 입꼬리가 조용히 말려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트리샤와는 왠지 말이 통할 것 같은 예감을 전부터 느껴 왔다. 누구도 따르지 않던 자신의 개들이 트리샤를 핥아 대는 것을 봤을 때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난 사실 대공을 경계하고 있다. 대외적으론 신사인 척하지만, 틈이 날 때마다 내 명예를 깎아내리는 교활한 자거든.”
“저런……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그래. 제국의 황태자인 내가 일일이 해명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짓이야.”
“너무 비겁해요!”
“그렇지. 하지만, 놈은 교활해서 누구도 그 속내를 몰라. 내가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 모후조차도.”
에드윈은 늘 그런 식이었다. 세 살이 어린 루카스에겐 버거운 허들을 일부러 눈앞에서 손쉽게 뛰어넘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겸손을 떨어 대는 것이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허들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루카스가 무능하다는 뜻이었다. 어른이 될수록 그 고결한 체하는 얼굴을 보는 게 더 역겨웠던 참이다.
“전, 전하의 말씀을 믿어요. ……맞아요, 모두가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음흉한 속내가 있는데, 말하면 나만 거짓말쟁이가 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나빠요.”
트리샤는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루카스는 처음으로 에드윈을 향한 제 마음을 이해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네게 처음 해 본다. 세상엔 얼간이가 더 많으니까.”
“저도……요.”
“너와는 마음이 통하는군.”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묘하게 빛났다.
“아까 디아나 카를이 뒤집어쓴 모피는 분명 대공이 선물한 것이었다.”
“네?”
“확실해. 일부러 내게 보란 듯이 과시를 한 거지. 아까 그의 웃는 모습을 못 봤나? 그는 카를 공작가와 손을 잡고 내게 도전하려는 거야.”
“감히 그런 무도한 짓을요?”
후, 루카스가 한숨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드윈의 판단은 언제나 루카스의 예상보다 빨랐다. 에드윈이 모든 것을 결정짓고 나면 그제야 루카스는 그 속내를 반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매번, 루카스의 평생 그런 식이었다. 그게 얼마나 분통 터지는 일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의심스러워……. 그 교활한 인간이 직접 사냥터에 가서 여우를 잡아다가 굳이 오늘 디아나 카를에게 입혔다는 것이. 보통 관계라면 그럴 수 있을까?”
트리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디아나 카를은 또 어떻지? 황태자비가 되지 못해도 혼처는 많을 텐데, 영애가 제 숙부에게서 공작위를 뺏어 냈다. 이게 흔한 일인가.”
“솔직히, 그건 저도 놀랐어요. 디아나는 원래 공작위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평범한 영애였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변했죠.”
루카스의 녹안이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번뜩였다.
“어느 순간 변했다고? 자세히 말해 봐라.”
“원래 디아나는 병약해서 요양만 했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자기 재산도 숙모님이 관리하게 둘 정도로요.”
새삼 트리샤는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인형 놀이를 하던 유일한 친구는 어느 순간 싸늘해져서 곁을 내주지 않았고, 오늘은 너무도 먼 거리에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트리샤의 친구란 흔적은 없었다. 잔인할 정도로.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제게도 냉랭해지더니 비밀스레 뭔가에 몰두한 것 같았어요. 우린 둘밖에 없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마치,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요.”
트리샤는 그때 느꼈던 상실감을 잊을 수 없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날, 디아나는 타인이 되어 자신을 냉정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카를 공작가의 후계로서 권리를 주장한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그다음은 전하께서도 아시는 대로예요. ……황태자비 검증이요.”
트리샤의 억측이 의심의 불씨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