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에드윈은 고작 며칠 만나지 못한 것을 핑계로 격렬한 정사를 한 번 더 벌였다. 기진맥진했던 디아나의 호흡이 에드윈의 품 안에서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의 알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다가 문득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떠올렸다.
“항상 이걸 가까이 두는 것 같은데…… 무슨 의미라도?”
디아나의 머리맡에는 얇은 체인이 달린 은색의 작은 단도가 있었다. 평소엔 옷 속에 넣어서 목에 걸고 다녔고, 잠자리에 들 때도 이렇게 손에 바로 닿는 곳에 뒀다.
특별한 장식도 없고 손바닥보다 작은 장식품 같은 칼이 호신이 될 리도 없을 텐데,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라.
“유품이에요, 어머니의.”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어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래요.”
흘깃 봐도 꽤 오래된 물건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디아나가 그 검을 소중히 품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제 선물이에요.”
디아나가 머리맡에 손을 뻗어서 미리 준비했던 펜던트를 에드윈의 손에 쥐여 줬다. 에드윈이 바랐던 대로 디아나의 초상화를 작게 만든 그림이 들어 있었다.
“소중히 간직하지.”
오늘부터 에드윈에겐 새로운 보물이 생겼다. 디아나가 은으로 된 단도를 품고 다니듯이, 에드윈도 디아나의 초상화를 품고 다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내 말을 달려오면서 생각한 게 있었어.”
“뭔데요?”
에드윈이 황후의 농간을 듣고 가장 분노했던 부분은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이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었다. 디아나는 공식적으로 누구의 여인도 아니었고 에드윈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내겐 다른 사내가 그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 명분도 없지.”
무척이나 분한 목소리였다.
“당장 대공비가 되어 달라는 강요는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대의 정혼자라는 것을 세상에 분명히 해 둬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처음엔 디아나의 마음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다음엔 손을 잡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가 이내 그녀를 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에드윈은 자꾸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됐다. 이제 그는 명분을 원했다.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어. 그리고 그때도 밀레타 영식처럼 그대에게 흑심을 품지 않은 자가 나오란 법도 없다.”
에드윈의 말이 모두 옳았다. 리암이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이지, 운이 나빴다면 괜히 집요한 집착에 시달리게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디아나의 마음과 처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졌을 거다.
“이미 새로운 황태자비가 자리를 잡았으니 더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선대공비 전하께서 허락지 않으실 거예요.”
그레이스는 디아나가 불임이라고 믿었다. 또한 디아나는 황태자비 검증 과정에서 그레이스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렸다. 하나뿐인 아들을 향한 애착이 있을 텐데, 그 정혼자로 디아나가 나타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난,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할 나이가 아니다.”
에드윈이 묘하게 분한 투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또 분란이 생기는 게 싫어서요.”
“그대의 몸에 대해선 내가 따로 설명해 드리면 되지. 내막을 알면 이해하실 테고.”
과연 그럴까. 디아나는 만만치 않았던 그레이스의 눈빛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대공은 나고, 대공비를 결정하는 것도 나다.”
에드윈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건 대공의 직위를 떠나 한 사내가 지녀야 할 자존심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제 어머니의 반대 하나 이겨 내질 못한다면 그걸 어찌 제대로 된 사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대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훗날, 우리는 반드시 결혼하겠지.”
그건 두 사람에게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둘에겐 이제 서로 외의 다른 상대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대에게 날아들 수많은 혼담을 견딜 자신이 없다.”
정확히는 그놈들을 가만히 둘 자신이 없는 것이다. 행여 디아나를 위해 누군가 세레나데를 부르는 순간 에드윈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물론, 단순한 구애도 안 돼.”
“그건 저도 싫어요.”
“그러니 우리의 정혼만 알리는 거야. 정혼은 법적 효력은 없지만, 감히 내가 방패로 서 있는데 그대에게 치근덕대는 미친놈은 없겠지.”
어차피 있어도 없애 버릴 것 같은 단호한 눈빛이었다. 황태자비에서 탈락했지만, 디아나는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신붓감이었다. 에드윈은 그게 싫었다. 제 여인에게 날파리가 꼬여 드는 것도, 디아나를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제 마음은 이미 전하에게 다 드렸어요. 그래도 불안하세요?”
“불안해. 불안하고 욕심이 난다.”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에 깊숙하게 깍지를 꼈다. 디아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정직했다.
“당장 내 비로 삼을 수 없는 것도,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대가 내 것이라고 외칠 수 없는 건 괴로운 일이야.”
애초에 디아나가 이기적이었다. 이 세계에서 나이가 찬 대공을 상대로 비밀 연인 관계를 유지하자고 했고, 막연히 자신의 인생을 찾은 후에야 결혼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다. 에드윈으로선 이미 큰 양보와 희생을 한 터였다.
“……좋아요. 단, 제가 공작이 된 후에 조금 자리를 잡으면 그때 발표해요.”
“정말인가?”
에드윈의 눈이 반짝이고 입가에 벌써 기쁨의 미소가 퍼졌다. 오히려 디아나가 미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결혼도 아니고 고작 정혼에 이렇게 기뻐하는 에드윈의 모습이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울렸다.
“네. 제가 먼저 공작으로서 인정을 받고 난 다음이라면, 정혼할게요. 처음부터 대공 전하의 위세를 엎고 나타난 군주로 보이는 것만은 피하게 해 주세요.”
“그건…… 그렇군.”
그래도 에드윈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아는 디아나라면 금세 카를의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사이 그레이스에 대한 설득이나 정혼에 대한 나머지 부수적인 문제는 전부 에드윈이 처리하면 된다.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군.”
“지금 제가 이렇게 전하의 품에 있는데도요?”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대 같은 연인을 두고서 세상에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건 일종의 고문이야.”
에드윈은 디아나가 사랑스러웠고, 동시에 자랑스러웠다. 온 제국, 아니 가능하면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소문을 내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건 에드윈이 유난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남자의 평범한 마음이었다.
“다행히 공작 즉위식이 코앞이군.”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얼마 남지 않은 영광스러운 날을 그려 봤다.
***
드디어 고대하던 공작 즉위식이 열렸다. 유구한 카를가를 존중해서 황실에서 직접 주관하는 행사였다.
디아나는 얼마 전 비비안이 황태자비로서 걸었던 교황청의 붉은 길을 혼자서 걷게 됐다. 하마터면 황태자비로서 걸을 뻔했던 끔찍한 길의 시작점에 섰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본 교황청은 헤렌 제국 황실의 명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카를가의 새로운 공작 즉위식을 개최합니다.”
아론이 공작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이런 성대한 즉위식은 없었다. 황실에서는 황태자비와 관련한 일로 카를가의 체면을 상하게 한 것을 보상하려고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다. 그만큼 황실이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쇼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들의 저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디아나가 태어난 날이었고,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날 날이었다.
“헤렌 제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카를 공작가의 영광스러운 후예를 신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황의 말이 끝나자 파이프 오르간이 경건한 소리로 온 예배당을 울렸다. 디아나는 천천히 앞을 향해 발을 디뎠다. 새로운 나날을 위해 마련한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는 눈처럼 새하얀 모피를 걸친 채였다. 디아나는 정면만을 보고 걸었지만, 모피가 에드윈을 대신해서 자신을 감싸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현재의 카를 공작은 앞으로.”
“예.”
정복을 입고 잔뜩 긴장한 아론이 앞으로 나섰다.
“저, 아론 카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잠시 맡았던 카를 공작의 지위를 내려놓습니다.”
아론이 말을 마치자 시종 중 하나가 작은 상자를 가운데로 내밀었다.
“그 증거로 카를 공작의 홀을 전달합니다.”
교황은 그 위에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으로 축복을 한 후에 곁의 디아나를 바라봤다. 시종이 식순에 맞춰서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선 홀이라기엔 짧은 장식품이 나왔다.
그러나 디아나는 단번에 그 홀이 마음에 들었다. 길이는 다 해도 디아나의 주먹 네 개를 합친 정도였지만, 그 끝의 권력을 상징하는 장식엔 희미하게 푸른빛을 머금은 다이아몬드가 찬란하게 빛났다.
“저, 디아나 카를은 선대의 의지를 이어서 카를의 공작으로서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디아나의 맑은 목소리가 예배당을 또렷하게 울렸다.
“본 교황은 제국의 법에 따라 이 상속과 새로운 공작의 즉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교황이 성호를 그었다. 디아나는 손을 뻗어 상자의 홀을 쥐었다. 그건 처음부터 디아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어울렸다.
“새로운 카를의 공작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디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의 삶을 되풀이하는 동안 처음으로 쥐게 된 공작의 홀이었다.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는 한낱 영애였지만, 이 홀을 손에 쥔 순간 디아나는 명명백백한 카를의 주인이 됐다.
파이프 오르간이 축복의 노래를 연주했다. 디아나만을 위한 축복이었다. 그제야 모였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새로운 공작의 즉위를 축하했다. 아마 그중에서 진심이 있는 것은 가장 앞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에드윈뿐일 것이다.
디아나는 수많은 사람 중 에드윈만을 바라봤다. 그 근처에 서서 집요한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루카스나 어색하게 웃는 귀족들에겐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두 저의 즉위를 축하해 주셔서…….”
디아나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 시선의 끝엔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 말은 에드윈만을 위한 것이었다. 에드윈도 그런 디아나를 향해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수한 축복과 격려를 담은 눈동자와 함께였다.
무척이나 기나긴 길을 돌아서…… 디아나는 결국, 주인공의 자리를 쟁취했다.
디아나 카를이 19세를 맞이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