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7화 (117/184)

117화

디아나의 존재는 근원적인 의문이자 신비였다. 처음, 소설에 불과했던 책의 주인공이 된 것부터 몇 번의 삶을 반복하는 이른바 회귀까지. 그 모든 것을 직접 겪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디아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고 어떤 이치로도 증명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디아나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지금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것만 공유하기로 했다.

“언제든 편안해지면 말씀하세요, 아가씨.”

다른 세상에서 책 속으로 들어왔다느니, 회귀했다느니,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더해서 혼란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샬롯도 언제부턴가 자신의 아가씨가 미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디아나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밀회만이 아닌 디아나 본인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비밀이었다.

“사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 조금 뒤죽박죽이더라도 이해해 줘.”

“네.”

샬롯이 인자한 얼굴로 디아나의 앞에 찻잔을 놓았다.

“역시, 시작은 트리샤겠지. 샬롯도 알겠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트리샤를 멀리했어.”

“그랬죠. 아마 무슨 이유가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측근인 샬롯이 디아나의 변화를 몰랐을 리 없었다. 그러나 샬롯이 아는 디아나는 현명했기에 믿고 기다린 것이다. 또한, 아무 내막을 모르는 샬롯의 눈에도 트리샤는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신분이나 배경을 떠나서 숨기지 못하는 소녀의 탐욕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트리샤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과 트리샤의 배경을 조사하게 한 것, 그 어머니와 동생까지 몰래 데리고 있는 건…… 모두 하나의 의심에서 시작된 거야.”

디아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마녀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황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디아나는 샬롯을 믿었다.

“난, 트리샤 블랑이 마녀라고 생각해.”

침묵이 감돌았다. 이번만큼은 샬롯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아니, 확고하게 믿어.”

디아나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아가씨를 믿어요.”

샬롯의 이해가 빨랐다. 디아나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행보는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차라리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게 상식적이었다.

“물질적인 증거는 없어. 그걸 찾기 위해서 제롬 경을 고용한 거야. 난…… 트리샤에게 마녀의 모습을 봤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힘에 스스로 붉은 마녀의 피를 이었다는 혼잣말을 들었지.”

디아나는 사실을 말했다. 그게 이전의 생에서 본 것이라는 것만 빼면 전부 사실이었다.

“신이시여.”

샬롯이 작게 중얼거리며 성호를 그었다. 교황청의 가르침이 지배하는 제국에서 마녀란 악마만큼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을 디아나가 목격했다니 샬롯의 가슴이 더 철렁했다.

“처음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조금씩 조사할수록…… 난 확신하게 됐어.”

흐트러진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트리샤 블랑에겐 마녀의 힘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인가요?”

“어떤 조건을 채워야만, 마녀의 힘이 발동되는 것 같아. 아마 지금은 본인도 모르고 있을 거야. 자신에게 찾아올 그 사악한 힘에 대해서. 하지만 사라 블랑은 알고 있겠지……. 오늘, 니콜라의 말을 들으니 내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디아나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디아나가 믿는다면, 샬롯은 기꺼이 상식을 버릴 수 있었다. 두려운 것은 마녀의 힘이 진실일 경우였다.

“여태 내가 조사한 결과와 내 생각을 종합하면, 아마 붉은 마녀의 피라는 건 트리샤의 모계에서 이어지는 걸 거야. 제롬은 동쪽 숲에서 사라 블랑과 비슷한 미스터리의 집단이 이단 심문을 받은 기록이 있다고 했어. 지금은 그걸 조사하러 떠났고.”

“세상에…… 그럼, 교황청에 당장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디아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샬롯. 이 이야기를 내가 아닌 다른 이가 했다면 믿었겠어?”

“……하긴, 그렇군요.”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을 믿었다. 교황청이 공식적 이단 심문을 그만둔 지 너무 오래됐고, 마녀 따위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존재였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트리샤 블랑은 내게 집착해.”

트리샤의 눈에 비치는 디아나의 모습이 대체 어떻기에, 무엇이 그리도 마음을 흔들고 욕망을 일깨웠는지, 트리샤는 몇 번의 생을 거쳐도 매번 디아나에게 무섭게 집착했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려 했던 건, 정확히 두 가지 이유였어. 하나는 황태자 전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였고, 하나는 폐쇄적인 황실에서 트리샤가 어떤 식으로 내게 접근할지 몰랐거든.”

사실은 알았다. 그래서 피한 것이다.

“슬프지만,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아.”

여전히 루카스는 최악의 남자였고, 트리샤는 욕망 어린 붉은 눈동자로 집요하게 디아나를 좇았다. 도망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미 디아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니 어설프게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도망치지 않을 거야.”

어떤 문제는 반드시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디아나가 북쪽 땅으로 떠나도 트리샤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새로운 황태자비 곁에서 제 위치를 다지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디아나가 아는 트리샤는 또 디아나를 찾아내고 파멸시키려 할 것이다. 디아나는 이제 그런 악몽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난, 절대로…… 내 인생을 그 사악한 힘에 넘겨주지 않을 거야.”

디아나의 주먹이 떨렸다. 지금의 디아나에겐 소중한 것이 너무 많았다. 언 땅을 쉬지도 않고 달려오고 있을 연인 에드윈부터 이젠 완전히 가족으로 느껴지는 샬롯과 그레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과 카를 공작으로서의 미래까지.

“아가씨.”

샬롯이 어느샌가 떨리는 디아나의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쉬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보다 샬롯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여태 디아나가 혼자서 그걸 감당하고 있었단 사실이었다.

“아가씨의 사람들도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울컥, 디아나의 가슴이 북받쳤다. 마법 같은 일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었다. 심지어 디아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건 연인이 생기고 가족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모든 것은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던 디아나의 오만에서 생긴 일이었다.

“아가씨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샬롯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디아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디아나의 뺨을 타고 흘렀다.

“여태 많이 외로우셨죠?”

그제야 디아나는 이 눈물의 의미를 알았다. 몇 번의 삶을 겪은 탓에 혼자만이 간직했던 기억과 고민, 트리샤의 사악한 힘을 향한 두려움과 루카스에 대한 증오까지 겹겹이 마음에 쌓였던 두꺼운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응…… 나, 사실은 외로웠던 것 같아.”

한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내뱉자 자꾸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의 등을 토닥였다. 그럴수록 디아나의 울음이 큰 폭이 되어 작은 어깨를 계속 떨게 했다.

외로웠다. 두려웠다. 지금도 잘 해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지난 죽음은 너무도 비참했고 그 공포는 좀처럼 떨쳐 나가지 않았다.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성유물의 존재는 그런 마음의 틈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너무 두려웠어.”

가장 두려웠던 건 트리샤가 아니었다. 루카스의 집요함도 아니었다. 디아나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했던 건 바로 그 성유물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그건 보험 따위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기회처럼 그럴싸한 게 아니었다. 그건…… 지금까지 디아나가 가졌던 모든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고도 죽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디아나만은 사라진 것들을 잊을 수도 없었다. 절망의 기억을 아로새긴 채로 또 줄어든 시간을 가지고 이 고통스러운 삶을 연명하는 것은 저주였다.

“아무것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기억의 파편이 되어 사라진다. 이 세계에서 존재했다는 증거도 남기지 않고서 또 다른 시간의 축에서 이야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될 것이다. 그때마다 디아나는 소중한 것들을 영원히 잃어버려야 했다. 소중한 것이 너무도 많아진 지금, 디아나가 행복할수록 그 그림자에서 두려움이 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네, 이 샬롯이 지켜 드릴게요. 대공 전하도 그레이도 있는걸요? 이 샬롯이 살아 있는 한…… 아가씨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아도 돼요. 그래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요.”

샬롯이 디아나의 얼룩진 뺨을 닦아 줬다. 아마도 디아나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했을 행동이었다.

“이 샬롯을 믿으시지요?”

디아나는 지금만큼은 어린아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서 한바탕 울고 나자 마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련했다.

“그거면 됐어요. 이제 두려워하지 마세요. 마녀든, 악마든 이 샬롯이 아가씨에게 얼씬도 못 하게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렇게 말하는 샬롯은 그 어떤 건장한 사내보다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했다.

그날 밤, 디아나는 오랜만에 샬롯의 품에서 잠들었다. 그동안 소리 없이 지쳤던 마음은 악몽 한 번 꾸지 않고서 달콤한 잠에 빠지게 했다. 디아나가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될 소중한 순간이 또 하나 늘어난 것이다.

***

아직 어두운 새벽, 공작저에 도착한 에드윈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찌나 쉬지 않고 말을 달렸는지 뺨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어지간하면 지치는 법이 없는 에드윈인데도 그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했다. 검은 교각 너머에서 고된 여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 정도였다.

“전하?”

샬롯은 깊이 잠든 디아나를 보다가 침실에서 나온 참이었다. 그레이에게 오늘 들은 내용을 상의하기 위해 집사실을 찾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에드윈까지 나왔다.

“말은 살아 있습니까?”

평소 과묵한 그레이가 진심으로 의아한 듯이 물었다. 무슨 수를 쓰면 그 먼 거리에서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은…… 중간에 교체했다.”

에드윈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지만, 눈빛의 생명력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디나는?”

“깊이 주무시고 계세요.”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먼저 에드윈에게 차를 건넸다. 에드윈은 목이 탔는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안심이 됐는지 자리에 무너지듯 앉았다.

“디나와 공작저가 평안한 것을 내 눈으로 봤으니 됐다.”

“그 내용은 전서구에 보냈습니다만.”

보통, 전서구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그레이의 타당한 질문을 묵살한 에드윈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디아나에 관한 것은 뭐든 제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렸다.

“마침, 잘됐어요. 두 분께 전할 이야기가 있어요. 디아나 아가씨의 이야기예요.”

두 남자의 시선이 샬롯에게 쏠렸다. 샬롯의 말처럼 디아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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