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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6화 (116/184)

116화

디아나는 그레이가 가져온 전서구의 소식을 반갑게 받아 들었다. 에드윈의 풍모를 떠올리게 하는 필체를 보니 벌써 그가 그리웠다.

혹여라도 괜한 생각을 할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차분한 에드윈의 필체가 디아나를 안심시켰다. 디아나가 무탈하다는 것에 대한 다행감과 곧 수도에 도착한다는 짧은 글에도 애정이 묻어났다.

“역시, 전하는 섣부른 오해를 하실 분이 아니야.”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진실을 모르는 것이 디아나의 마음에도 에드윈의 체면에도 좋을 것이다.

“그레이, 검은 교각에서 수도로 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보통은 3일 정도 걸리겠으나, 전하라면 이틀도 안 걸릴 것 같습니다.”

“하긴, 전하는 승마에도 능하시니까.”

그레이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지만, 디아나가 미소를 짓자 뭐라고 덧붙이기 어려웠다. 에드윈의 불쌍한 말은 지금쯤 엄청난 혹사를 당하며 겨울 땅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참, 아가씨. 오늘이 그날입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해가 진 후에 뒷문으로 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목을 끌진 않을 겁니다.”

“잘했어.”

디아나는 얼마 전, 먼 요양원으로 떠난 사라에게서 니콜라를 데려오라고 했다. 동쪽 숲의 그 집단에서 남성만이 유독 지적으로 모자란 것 같다는 제롬의 보고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요양원의 의원은 니콜라에게 아무런 병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디아나는 의원이 알 수 없는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니콜라를 만나 보기로 했다.

“굳이 그런 아이를 공작저에 들인다니 마음이 썩 좋진 않네요.”

어느샌가 샬롯이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샬롯은 본래 트리샤를 꺼렸지만, 황태자비 검증 사건에서 트리샤가 뻔뻔한 증언을 한 후로는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런 트리샤의 동생을 굳이 공작저에 들이는 게 불만스러운 것이다.

“혹시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 되는 것 같던데요. 아가씨도 보셨잖아요.”

저번에 사라를 보러 갔을 때 잠시 봤지만, 니콜라는 한순간도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는 아이 같았다. 성장이 더딘 아이와는 달랐다. 여덟 살에도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제가 어릴 때도 동네에 그런 아이가 있었어요. 가끔 있지요. 의원도 원인을 모르는데 산만하고 성장이 더딘 아이들이…….”

“그래도 이왕 불렀으니 한번 제대로 보고 싶어.”

“네, 아가씨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샬롯이 적기에 물러섰다. 그레이는 평소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샬롯처럼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언제든 디아나를 위해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상대가 8세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에게 해가 되는 이라면 자신이 해치우면 그만이다. 비록 현역 시절보단 못하다 해도 디아나만은 반드시 지킬 자신이 있는 그레이였다.

얼마 후, 날이 저물고 어둠이 깔린 공작저의 뒷문으로 짐마차가 들어왔다. 샬롯은 먼 길에 동행한 하녀에게 처소를 내어주곤, 잠이 오는지 눈을 비비는 니콜라를 데리고 디아나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아가씨.”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이 니콜라를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사라와 함께 요양원에서 지낸 후로 니콜라의 행색은 제법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 특유의 허술한 행색이 여기저기 엿보였다.

“하녀가 무척 피곤해 보였어요. 애를 쓴다고 썼다던데.”

샬롯이 그걸 설명하듯 덧붙였다. 당장 한자리에 똑바로 앉지도 못하는 니콜라를 보니 하녀의 고생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때 요양원에서 봤을 때도 낙엽과 한 몸이 되어 뒹굴던 아이였다.

하녀가 보살핌에 소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니콜라가 뜯어진 소매를 계속 물어뜯었다. 저러니 옷을 아무리 갈아입혀도 행색이 나아지질 않는 것이다.

“니콜라? 네 이름이 니콜라 맞지?”

그래도 제 이름은 아는지 니콜라가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이름 니콜라.”

“그래, 니콜라.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불렀어.”

디아나를 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산만했지만, 한 번 디아나를 보자 잠이 달아났는지 소매를 뜯던 것을 멈췄다.

“나 니콜라야!”

샬롯은 옆에서 한숨을 삼켰다. 이래선 대화가 될 리 없었다. 디아나는 모처럼 먼 길을 온 니콜라를 두고 끈기 있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네가 누구인지는 알아. 트리샤 누나 기억하니?”

“누나! 우리 누나야, 트리샤.”

“맞아, 네 누나. 트리샤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까, 우리?”

디아나가 애써 친근한 투로 물었지만, 니콜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샬롯은 그런 니콜라를 꾸역꾸역 잡아 와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디아나는 벌써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트리샤 누나는 어떤 사람이야?”

“응, 니콜라 누나!”

디아나가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니콜라 누나는 머리카락이 빨간색이지? 어머니도 그렇고.”

디아나가 다정하게 설명하자 니콜라도 제 누이를 떠올린 것인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아까보다 산만함이 덜해졌다.

“트리샤 누나 좋아. 똑똑해.”

“그렇구나.”

“근데 트리샤 누나는 니콜라 싫어해.”

니콜라가 불안한 듯 다시 소매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샬롯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디아나가 한 손을 들어 샬롯을 막았다.

“트리샤 누나는 왜 니콜라를 싫어해?”

“몰라, 나 싫어!”

어차피 니콜라에게 이성적인 대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기 때문에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이 상황으로 봐선 무엇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니콜라 어머니는 어때?”

“엄마는 콜록, 콜록해! 트리샤 누나 맨날 시끄럽다고 해. 트리샤, 니콜라 맨날 때렸어.”

소매를 뜯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래도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이라 트리샤가 잘 보살폈다고 기대한 게 우스웠다. 대강 트리샤의 가정 상황을 봐서는 어느 아이라도 제대로 자라긴 어려울 것 같았다.

“저런, 니콜라가 많이 아팠겠구나.”

디아나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 아이에게서 뭔가 쓸모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한대도 좋았다. 어차피 자신이 불러들인 아이였고, 비록 그 트리샤의 동생이었지만, 니콜라에겐 죄가 없었다.

“앞으로는 아무도 니콜라를 못 때리게 해 줄게.”

“니콜라 안 때려?”

“그래, 아무도 안 때릴 거야.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혼내 줄게.”

처음으로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니콜라를 내켜 하지 않던 샬롯조차 짠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보통 사람보다 모자랄 뿐이었다. 모든 아이에겐 사랑받을 권리가 있지만, 니콜라에겐 그런 권리가 없었다.

“그래도 니콜라는 불쌍해.”

“누가 그러니, 니콜라가 불쌍하다고?”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무심결에 던진 질문이었다.

“엄마, 니콜라 맨날 불쌍해.”

잠깐, 디아나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그야 상황을 생각하면 모자란 아들이 안쓰러울 수는 있겠지만, 뭔가 다른 예감이 들었다.

“불쌍한 니콜라.”

그러더니 니콜라가 콜록, 콜록 기침하는 체를 했다. 사라 블랑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불쌍한 것!”

흉내가 제법 익숙한 게 한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니콜라가 흉내 내는 사라의 어투는 동정보단 뭔가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니콜라는 제 손으로 눈썹을 추켜세웠다가 또 기침하는 흉내를 냈다.

“니콜라,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좋은 선생님께 부탁해 볼 테니 공부해 보지 않을래?”

“엄마, 니콜라는 공부할 필요 없댔어.”

없는 살림에 본인이 아프긴 해도 아이에겐 가혹한 일이다.

“그래도 니콜라, 나중에 어른이 되면 뭔가 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그 질문에 니콜라의 눈이 유일하게 또렷해졌다.

“니콜라는 어른 못 돼.”

그건 어떤 중의적인 의미일까. 디아나는 한층 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음, 꿈이라는 건……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는 거야. 니콜라도 꿈이 있니?”

“응.”

고민의 여지도 없는 즉답이었다.

“벌써 꿈을 정하다니 대단한걸?”

“니콜라 아니야.”

디아나가 끈기 있게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 냈다.

“그럼 니콜라는 나중에 뭐가 되는 거야?”

다시 잠이 오는지 니콜라가 눈을 비볐다.

“니콜라?”

디아나는 끝까지 끈기와 침착함을 발휘했다.

“우웅…… 니콜라는 그냥 불쌍한 것!”

“그래도 누구나 꿈이 있단다.”

“니콜라 가엾어서 잘 몰라. 니콜라 꿈 없어, 역할 있어.”

“어떤 역할일까?”

니콜라는 모자랐지,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었다. 니콜라는 디아나를 살피고 적어도 그녀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난 트리샤 누나 거야.”

선뜻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어린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만 주야장천인데 퍼붓는 것도 아동학대였다.

“니콜라는…….”

니콜라가 손을 정신없이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 이제 생각났다!”

니콜라가 손뼉까지 쳐 가며 화색을 드러냈다.

“니콜라, 제물이야!”

순간, 디아나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웠다. 제물이란 단어의 뜻을 채 이해하지도 못하고 해맑게 손뼉을 쳐 대는 니콜라를 보자 가슴 한구석이 버석거렸다. 그건 샬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령 그 적의 동생이라고 해도 이 아이에겐 죄가 없었다.

“누나…… 혹시 니콜라 자도 돼?”

“그럼. 졸리면 가서 자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오늘은 이 아이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이 니콜라를 데려온 하녀에게 아이를 인계했다.

“예상보다 심각해.”

샬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의 상태도, 현 상황도 모두 포함한 말이었다.

“저 아이가 과연 제물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까?”

“아니겠죠.”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제물’이라는 단어가 지금 저 아이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

그저 관용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다. 트리샤의 장래를 위해서 뒷받침이 되라는 뜻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니콜라의 가족은 특별했다. 그것도 몹시 나쁜 쪽으로 말이다.

제롬의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디아나는 이미 트리샤가 마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하나 제대로 모르는 어린 니콜라의 입에서 제물이 나왔다. 그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니콜라를 그렇게 불러 온 가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니콜라가 그런 어려운 단어를 알 리 없었다.

“샬롯,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디아나는 지금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혼란을 샬롯과 공유할 생각이었다.

“네, 아가씨. 뭐든 말씀하세요.”

샬롯은 심상치 않은 디아나의 표정을 보고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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