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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5화 (115/184)

115화

리암은 어떤 단어로 제 처지를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그의 성격처럼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정혼자에겐 안타깝게도 내세울 성이 없습니다.”

그 말에 디아나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성이 없다는 것은 귀족은커녕 어지간한 평민만도 못한 신분이란 뜻이었다. 작다고 해도 밀레타는 어엿한 공국이었다. 그 하나뿐인 후계자가 어디서 그런 여인을 만난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보시다시피 난 어리석어서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안 되고. 겨우 떠올린 게 제국의 수도에서 그녀를 입적시켜 줄 가문을 찾아본 건데…… 그것도 안 되는군요.”

후, 리암이 허탈한 속을 숨기지 않고 한숨으로 뱉었다. 밀레타 공국에서만 자랐던 그는 수도에 연고가 없었다. 게다가 대놓고 목적을 말할 수도 없으니 누가 선뜻 제 가문에 낯선 이를 들여 주겠는가.

“한심하죠?”

리암의 질문에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리암이 영리하고 약지 못하다고 해도 자신의 정혼자를 향한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솔직히 제국의 황태자인 루카스보다 나았다. 아니, 비교 자체가 리암에게 실례였다.

“그만큼 경이 노력한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경의 정혼자라면 기뻤을 거예요.”

“네. 그녀도 그렇게 말했지만…… 난 아무래도 그녀와 꼭 결혼하고 싶어요. 욕심이죠.”

확실히 리암과 디아나의 처지는 달랐다. 에드윈과의 관계에서 신분이 문제가 되진 않았고 미래도 열어 둔 상태였다. 그런데도 디아나는 왠지 리암의 사연이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게 신분처럼 타고난 것이라면 더욱.

“혹시 몰라요, 방법이 있을지도.”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둘의 맞선은 이미 머리를 떠난 후였고, 일종의 상담자가 된 것 같은 태도였다. 뭐 어떤가. 어차피 황후가 보낸 궁인들의 시선 때문에 두어 시간을 더 보내야 했고 마침 리암에겐 고민이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만날 일이 없는 남자였지만, 디아나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었다.

“경의 결혼 계획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사항이 뭔가요?”

과연, 디아나는 현실적이고 영명했다. 리암은 시작부터 디아나를 향한 신뢰를 느꼈다. 어쩌면 이 잘못된 만남이 뜻밖의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모니카의 보고를 들은 황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황후가 예상했던 그림은 밀레타 영식의 멍청한 꼬락서니와 그걸 보고 느꼈을 디아나의 좌절이었다. 황후는 두 사람 모두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으니 그 예상이 빗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황후의 황당한 반문에 모니카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의 티타임은 무려 4시간이나 이어졌고 마차까지 리암을 배웅할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단다. 심지어 디아나의 표정도 밝았고 둘의 사이가 제법 친근해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 모자란 놈은 그렇다고 쳐도, 카를가의 영애는 제법 성격이 있어 보이던데.”

“저도 그 부분이 의문입니다.”

“흐음…… 게다가 이 감사 편지를 직접 보냈다는 거지?”

황후는 잊을 수 없는 디아나의 차분하고 담담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황태자비 검증을 할 때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성숙한 모습까지. 그 모습을 닮은 유려한 필체엔 황후의 너그러운 마음 씀씀이에 대한 황공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카를가의 영애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

황후와 루카스는 태생적으로 근본이 같았다. 즉, 자신의 관대함을 추켜올리고 고개를 조아리는 자들에게 금세 호감을 품는 것이다.

“설마 그 모자란 놈이 마음에 들었을 리는 없고, 내 체면을 생각해서 훌륭한 처신을 한 게지.”

완벽한 헛다리였지만, 황후는 꽤 뿌듯한 표정이었다.

“대공저에 주기엔 아까워. 쯧…… 그런 결함만 아니었어도.”

디아나는 애초에 황후가 점찍었던 최고의 황태자비 후보였다. 하지만, 불임이라는 중대한 사실 앞에선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혹시나, 밀레타 공국의 영식과 마음이 맞은 건 아닐까요? 영식이 항구로 떠나는 길에 카를 공작저에 직접 들러서 만났다던데.”

“아니, 그놈은 머저리야. 절대 카를가의 영애 눈에 찰 리가 없어.”

황후가 리암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좋게 말해서 순박하고 단순한 것이지, 세 마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였다. 게다가 그 채신머리없는 행실까지, 황후가 싫어하는 요건은 전부 다 갖췄다.

“공작이 되겠다고 나서서 허튼 맘을 먹을까 싶었더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디아나는 황후에게 순종을 보였다. 황후가 볼 때 그 머저리 같은 놈에게 이 정도의 처신을 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예우이자 복종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황후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카를가에 상을 보내라.”

디아나도 여기까지 계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밀레타 영식과 만남은 황후의 미약한 불안까지 지워 냈다. 황후는 자신이 만들어 낸 연기에 눈이 가려져 디아나의 야망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어린 여인이 공작이 된대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

황후는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미래의 가능성에서 눈을 돌렸다. 디아나가 특별히 무슨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녀 자신의 어리석음이 시야를 제한한 것이다. 디아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수도엔 폭설이 남긴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리암은 항구가 녹았다는 소식을 듣고 디아나에게 인사를 한 후에 밀레타로 떠났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듭 디아나와 샬롯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래도 공국의 후계자인데 일개 시녀장인 샬롯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에서 디아나는 제 결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순수한 분이네요, 리암 경은.”

“샬롯은 정말 괜찮겠어?”

“네. 제가 결정한걸요. 게다가…… 리암 경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걸 속죄하는 셈 치죠.”

맞선이 있던 날,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있던 샬롯에게 의외로 밝은 디아나가 나타났다. 그 후로 이어진 디아나의 후일담은 샬롯의 마음이 풀리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디아나의 마음이 괜찮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고 나니 괜한 영식을 저주했던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제 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됐고, 달리 후손도 없으니까요.”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샬롯은 영식의 정혼자가 죽은 제 언니의 딸이라는 확인서를 써 줬다. 크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마스 가문은 엄연한 귀족이었다. 샬롯은 다 큰 사내가 눈물까지 글썽여 가며 고맙다고 말하던 리암 경의 모습에 좋은 일을 하나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했으니, 밀레타 공국과 좋은 관계가 될 것 같네요.”

“응. 어차피 황실과 함께 갈 수는 없어. 아군이 하나라도 늘면 좋은 거지.”

지금의 황제는 병상에 누워 의식이 거의 없다고 들었다. 디아나의 지난 생을 더듬어 봐도 황제가 등장하는 순간은 없었다. 그 말은 국혼까지 치른 루카스가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란 뜻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디아나가 루카스와 손을 잡을 일은 없었다.

“그보다 대공 전하께 전서구는 확실히 보냈지?”

“네.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디아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언제나 디아나를 주시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검은 교각 너머에 갇혀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곧 맞선 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다. 에드윈의 마음이 상하는 것도 싫었지만, 애꿎은 리암이 에드윈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디아나의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루모스 기사단의 측근들은 에드윈이 있든 없든 충실히, 또한 비밀리에 디아나의 주위를 관찰하고 보고했다. 땅은 눈으로 얼었지만, 전서구는 하늘을 날아서 소식을 전했다.

황후가 밀레타 영식과 디아나의 맞선이 틀림없는 만남을 주선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에드윈은 검을 뽑아 들었다. 심지어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했고, 그 죽일 놈이 뻔뻔하게도 떠나기 전 공작저에 들렀다니. 에드윈의 흑안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난 지금 몹시 침착한 상태다.”

에드윈의 저음이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하게 울렸다. 이럴 때는 딜런조차 쉽게 말리기가 어려웠다. 그의 목선에 힘줄이 불끈 드러나서 분노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에드윈이 이렇게까지 분노한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딜런은 주마등처럼 제 기억을 필사적으로 뒤적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은 영명한 분이라고 늘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황후 폐하의 억지를 들어주신 거지, 절대 전하를 두고 변심하신 것은 아닐…….”

“뭐라? 감히 나의 디나가 그따위 잡놈에게 눈길이라도 줬겠느냐?”

어째 딜런의 대처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디나에게 나 이외의 사내는 없다. 여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야, 당연합니다. 그러니 조금만 냉정해지시는 것이.”

“난 지금 냉정하다.”

에드윈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지체도 없이 말에 올라탔다.

“그런 방면으로 말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이성적인 냉정…….”

딜런의 작은 목소리는 지금 에드윈에게 들리지 않았다.

“가여운 나의 디나…… 그런 수모를 당하다니.”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에드윈의 옆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딜런이 전달한 소식에 수모를 당했다는 부분은 없었는데 고삐를 쥔 에드윈의 손이 분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딜런이 에드윈 인생 최초의 살인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상대가 밀레타의 영식이고 외교 분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가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부분이었다.

“이번에 사냥을 나온 것 자체가 나의 실책이었다.”

에드윈이 깊은 후회를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커다란 말이 제 주인의 말에 동조하듯 콧김을 내뿜었다.

“한시라도 디나의 곁을 비우면 안 됐는데.”

“73년 만의 폭설이라고 하잖습니까.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딜런이 필사적으로 한마디를 덧붙였지만, 에드윈은 들리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의 흑안이 딜런을 채근하고 있었다.

“뭐 하나?”

“……예?”

“지금 당장 완전 무장을 하고 날 따르지 않고.”

딜런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기사는 죽을 자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에드윈을 말리다가 죽는가, 밀레타와의 외교 분쟁에 끼어서 죽는가의 선택이었다.

“전하, 일단 잠시 진정하시고.”

“필요 없다. 혼자라도 가면 된다.”

에드윈이 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구르며 그 기세를 뽐냈다. 딜런은 앞뒤 잴 겨를도 없이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어떻게든 에드윈의 곁에 있어야 말리든 말든 할 것이다.

“전하!”

“나머지는 가면서 생각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딜런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멀리 평화의 새가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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