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4화 (114/184)

114화

카를 공작저엔 폭설 이후, 나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디아나는 제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서신을 살폈지만, 자신이 본 것이 맞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평소와 달리 격하게 분노를 표시하는 디아나를 보며 샬롯의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깊어졌다. 황실에서 온 서신이니 좋은 소식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디아나의 반응을 봐선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저, 아가씨. 실은 황실 시종이 답을 바로 받아 가야겠다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명령이란 뜻이군.”

디아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많이 나쁜 소식인가요?”

디아나는 설명하는 대신 서신을 샬롯에게 건넸다. 이내 디아나보다 몇 배로 분노한 샬롯의 손힘에 종이가 우그러졌다.

“세상에, 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그렇지. 감히 카를가의 아가씨에게!”

부들부들, 샬롯의 손이 떨렸다.

“게다가 아가씨가 곧 공작이 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건 기만이에요!”

“그래, 기만이야.”

디아나가 싸늘하게 현실을 인정했다. 말은 디아나를 가엾이 여긴다고 했지만,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아는 황후 스텔라는 악의를 품었을 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던 여자였다. 국혼의 파탄으로 겨우 그 여자를 안 보고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도 끈질긴 건지, 이 악연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기만을 피할 방법이 없어.”

가장 분한 것은 역시 당사자인 디아나였다. 황후가 어떤 저의를 갖고 이 만남을 주선했는지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신세라는 건 잘 알았다. 하긴, 이전의 생에서 디아나는 그 손에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니 황후가 인내심도 자비심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가씨, 이걸 거절한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황태자비 검증으로 그리 우릴 집요하게 괴롭혀 대더니, 이젠 영식과 만남을 주선하겠다고요? 그것도 아가씨와 같은 후보였던 밀레타 가문이에요. 이건 비상식적이라고요.”

“맞아. 비상식적이고 천박해. 아무도 비난하지 않겠지.”

디아나가 이성을 찾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난 아직 공작이 아니야. 당분간은 수도를 떠날 수도 없어.”

감정을 제치고 보면 현실은 명확했다.

“샬롯,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런 힘이 없어. 그러나 황후 폐하의 권력은 우리 모두를 다치게 할 수 있지.”

샬롯이 분한 듯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비 검증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는데 이렇듯 기만까지 당해야 하는 디아나의 마음을 헤아리자 울컥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하필, 전하께서는 왜 이런 때 사냥을 하러 가셨는지.”

샬롯의 원망이 괜한 에드윈을 향했다.

“아니야. 이건 전하께 기댈 문제가 아닌걸.”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만일 에드윈이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분노하고 무슨 수단이든 쓰려고 했을 것이다. 그건 마음으로는 정말 고마웠지만, 아니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도움이 안 됐다. 차라리 에드윈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시종에게 황후 폐하의 명을 받들겠다고 전해. 너른 아량과 마음으로 살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도 꼭 함께.”

“아가씨.”

“지금은 참아야 해. 지금은…….”

그제야 샬롯의 시야에 디아나의 꾹 쥔 손이 보였다. 하긴, 샬롯의 분노가 얼마나 크든 디아나 자신의 복잡한 심경에 미칠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지금 자신을 향한 기만을 받아들이겠다고 어려운 말을 뗀 것이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디아나로선 충분히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네…… 말을 전하고 올게요.”

샬롯이 간신히 울음기를 억누르고 방을 나섰다. 디아나는 그제야 쿵, 하고 제 주먹을 책상에 내리쳤다. 그러고도 아직 주먹이 덜덜 떨렸다.

“참아야 해.”

디아나가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지금은…… 아니, 지금만.”

그간 겪었던 몇 번의 생이 스쳐 지나갔다. 디아나는 몇 번의 죽음을 겪으며 배움을 얻었다.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거나,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샬롯의 말처럼 비상식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건 죽기 딱 좋은 생각이었다.

“그래, 아직은 결말이 아니야.”

소설에선 결말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수많은 갈등과 위기가 찾아온다. 디아나는 자신의 인생도 그러한 큰 흐름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위기였다. 세찬 바람이 디아나를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디아나는 맞서는 대신, 잠시 힘을 빼고 바람에 몸을 맡길 것이다.

아직은 디아나가 일어설 때가 아니다. ……아직은.

***

황후는 무척이나 친절을 과시했다. 리암 밀레타를 위해 영사관으로 쓰이는 저택을 선뜻 내주곤, 디아나와의 만남에 자신의 측근 시녀장과 시종까지 보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모조리 황후의 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디아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후에 저택으로 들어섰다. 시종장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디아나를 응접실로 인도했다.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 드십니다.”

디아나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리암이 대놓고 화색을 보였다. 소문으로는 무척 단순한 성격이라고 했지만, 성급히 재단할 수는 없었다.

“디아나 카를입니다.”

디아나가 살며시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췄다.

“나는, 아…… 물론 알고 있겠지만, 리암 밀레타. 밀레타 공국의 영식이자 유일한 후계자요.”

“예.”

대놓고 심드렁한 대답에도 리암은 만면의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디아나가 들어오는 순간, 나머지 시야가 바래지는 줄 알았다. 심지어 그녀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주위에 시중을 드는 사람이 몇 명인지도 몰랐다. 리암에겐 그저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여기, 어서 자리에. 나머지는 물러가라.”

리암의 말에 황후의 수족들이 물러갔다. 이제 응접실엔 단둘이었다.

“어서 앉아요, 영애.”

“예.”

디아나가 기계적으로 답하고 리암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미리 준비된 티세트엔 꽤 공이 들어가 있었고 황실의 풍이 많이 보였다. 여긴 장소만 달랐지 황후의 영향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은 배치였다.

“영애는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렸겠지만, 정말로 미인입니다.”

밝기만 한 그의 목소리에 디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밀레타 영애를 닮은 금발에 노란빛을 띠는 갈색 눈동자, 그리고 왠지 과도하게 씩씩한 인상이었다.

“예.”

다시 한 번, 디아나가 냉정하게 답했다. 그런데도 리암은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들뜬 기색까지 보였다.

“애초에 아이리스 따위가 영애와 경쟁하려고 했다는 게 우습군요.”

“예……?”

디아나의 말투가 처음으로 의문형이 됐다.

“아, 내 여동생이요. 그런 망아지 같은 아이가 감히 영애와 견주다니, 백 년은 이릅니다.”

상상했던 밀레타 공국의 영식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당연히 황태자비 간택에 참여했던 가문으로서 디아나에게 호감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황후도 그걸 노리고 일부러 곤란에 빠트린 거라고 짐작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영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나도…… 영애에겐 초라한 상대겠죠?”

너무 소탈한 말에 디아나가 눈을 깜박였다.

“이게 정상적인 맞선 자리가 아니라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내가.”

리암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괜히 겸연쩍어서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도는 실패했다.

“뭐, 좁은 공국에서 여생을 보낼 팔자에 언제 또 영애 같은 사람을 만나 볼까 싶어서 수락했습니다. 영애가 불쾌했겠지요? 시골뜨기의 호기심이라 생각하고 용서하십시오.”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디아나에겐 늘 이유가 중요했다. 리암은 여태 디아나가 아는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라니 기본적으로 거만함이 있을 줄 알았는데 거만은 고사하고 귀족다운 풍모도 없었다. 솔직히 다른 복장으로 만났으면 그의 신분을 짐작도 못 했을 거다.

“왜라니, 그야…… 뭐, 딱 봐도 내가 영애의 배필이 될 것같이 생기진 않았잖습니까?”

또 호탕한 웃음이었다. 저런 말을 하는데도 자조적인 느낌은커녕, 유쾌한 느낌이 들었다. 디아나는 이제야 세간에서 도는 단순한 남자라는 그의 평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망아지 같은 내 누이와는 달리, 난 내 주제를 잘 압니다.”

“아뇨, 그런 말씀은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가 크게 손을 휘저었다. 설마 술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디아나가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놀랍게도 그는 맨정신이었다.

“사실 난 작은 공국에서만 자라다 보니, 황후 폐하의 깊은 생각 같은 건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눈동자가 디아나를 봤다.

“하지만, 달리 거절할 처지도 아니죠. 우리 둘 다 발이 묶인 처지 아닙니까? 주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요.”

허심탄회한 이야기였다. 그는 언뜻 바보 같아 보였지만, 진짜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영애에게 다른 마음을 품진 않았습니다. 기대도 안 했고, 그저 시골뜨기의 호기심과 높은 분을 향한 존중의 의미…… 그게 다입니다.”

과연 그를 단지 시골뜨기로 표현할 수 있을까. 디아나는 그 소탈한 언행에 깔린 진중하고 유쾌한 성정을 읽었다.

“궁인들은 우리가 대충 두어 시간 정도 때우고 나면 만족할 것 같은데요. 심심하시면 책이라도?”

“아뇨,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사실 난 책이랑 거리가 멀어서 그런 건 없거든요.”

겨우 디아나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영애는 공작이 된다죠?”

“네. 경처럼요.”

“카를과 밀레타의 우호가 있기를 바라죠. 보시다시피 내가 좀 허술한 편이라 영애에게 배울 게 많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디아나가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리암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면서도 굳이 가벼운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처음부터 둘의 사이를 정해 둔 것 같은 모양이다. 디아나로서도 그게 편했다.

“음…… 뭐로 두어 시간을 때운다? 잡담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소문엔 경이 수도의 유흥을 즐기느라 바빴다던데 사실인가요?”

“하하, 내가 방탕하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뭐, 한심한 사내들이 하는 짓이야 다 똑같지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여쭙는 거예요.”

푸른 눈동자가 리암을 꿰뚫듯이 응시했다.

“허어…… 예상보다 까다로운 분이군요. 그럼, 비밀을 하나 말해 드리죠. 단, 정말로 비밀입니다.”

“뭐죠?”

“그게 말이죠…….”

리암이 괜한 뜸을 들였다. 디아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겐 정혼자가 있습니다. 그게 비밀인 이유는 우리가 정혼자란 걸 우리 둘밖에 몰라서고.”

잠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으나 이내 짐작이 갔다. 아마도 디아나와 에드윈 같은 어떤 장벽이 있을 것이다.

“다시 수도에 나올 기회는 좀처럼 없을 테고, 예물을 사러 돌아다녔습니다. 아직 찾지 못해서 곤란합니다만.”

“수도의 보석상을 소개해 드릴까요?”

“아뇨, 내가 원하는 예물은 그런 게 아니에요.”

리암이 곤란한 듯 씩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드물게 타인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느꼈다. 최악이 될 거라고 예견했던 맞선은 다른 의미로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