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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3화 (113/184)

113화

추위를 유독 타는 황태자비를 위해 시녀들이 바삐 움직였다. 비비안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새로 시녀장 엠마가 건네는 뜨거운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안았다. 진작 황태자전에서 오늘 들르지 않겠다고 전언이 와서 그나마 마음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트리샤는?”

질문을 던지는 비비안의 목소리가 새초롬했다.

“아까 황태자전의 부름을 받고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비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날, 개들에 둘러싸인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이후로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났다. 비비안도 제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제가 찾아볼까요? 어디로 샜을지도 모르니…….”

엠마가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초야에서 바람을 맞은 황태자비라고 무시하던 것이 무색한 행동이었다. 황태자가 정식으로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그 후 관심을 보이자 언제 냉랭했냐는 듯 황태자비전의 모든 궁인이 비비안의 기분을 맞추느라 바빴다.

“됐어, 돌아오면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해.”

“예, 전하.”

비비안은 이 복잡하고 불쾌한 심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황실의 생활에 몸이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대체 자기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비비안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찰나, 노크가 들리고 트리샤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비비안은 일부러 트리샤에게 보란 듯이 홱 등을 돌려서 누워 버렸다. 트리샤는 한숨을 삼키고 다시 비비안의 고개가 있는 쪽으로 돌아가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장에게 들었어. 내가 없어서 찾았다고…… 많이 불편했어?”

“뭣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비비안의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트리샤를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개들이 이상한 것 같다고 한번 살펴보라고 하셔서, 미안.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애써 변명하는 트리샤의 손이 얼어서 빨갰다. 비비안은 그걸 보고서 못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실은 루카스와 정원에서 개들과 즐겁게 노느라 그런 것인데, 개들의 사육장에 가서 험한 일을 했다고 오해하기 딱 좋았다.

다시 보니 트리샤의 가쁜 숨과 찬 바람에 붉어진 뺨도 보였다. 그 또한 개들과 신나게 뛰어노느라 그런 거지만, 비비안이 알 도리는 없었다.

“손, 이리 줘.”

“응?”

비비안은 더 말하는 대신 트리샤의 손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비비안, 아직 손이 차가운데…….”

“그러니까.”

비비안이 트리샤를 곱게 노려봤다. 트리샤는 얼어붙었는지도 몰랐던 제 손끝에 비비안이 품고 있던 물주머니의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루카스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꿈만 같아서 여태 추운 줄도 몰랐다.

“안 되겠어. 이불로 들어와.”

“비비안! 나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고, 무엇보다 황태자비의 침대엔 누울 수 없어.”

“내 명령이야.”

오늘따라 비비안이 고집을 부렸다. 후작저에선 종종 한 침대에서 누워 자곤 했지만, 황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감기에 걸려서 쉬면 내가 쓸쓸하잖아.”

“……알았어.”

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이곤 비비안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둘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 마주 본 채로 몸을 말고 누웠다.

“또 개 시중을 들라고 하면 적당히 핑계를 대. 어디 황태자비전의 시녀에게 짐승의 수발을 맡겨.”

아까부터 비비안은 묘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트리샤로선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내신 물건 중에 빠진 게 너무 많아. 아무튼,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한텐 관심도 없으시지!”

“아냐, 비비안. 아직 황실이 어려워서 그러실 거야.”

비비안은 바로 이런 사탕발림이 듣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커다란 황실에서 버틸 기운이 난다. 누군가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 주고, 부정하고 싶은 것들을 지워 주는 트리샤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트리샤.”

“응?”

“우린 친구지? 둘도 없는.”

“응, 당연하지.”

비비안이 이제 다 녹은 트리샤의 손을 잡았다.

“……디아나 영애보다?”

그날, 트리샤가 말실수로 디아나의 이름을 대신 부른 이후 내내 마음에 맴돌던 것이다. 비비안은 항상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디아나와 비교를 당하며 자랐고 실제로 본 디아나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때 비비안은 이미 졌다. 그런데 트리샤는 그런 디아나의 곁을 떠나서 제게로 온 친구였다.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트리샤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왜 없어? 디아나 영애랑 그렇게 친했다면 왜 후작가에 온 거야?”

비비안은 트리샤의 현실적인 처지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트리샤는 여전히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비비안을 응시했다. 동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영원히 어리고 어릴 비비안을.

“디아나 영애와는…… 함께할 시간이 줄어든 거야.”

그러나 이 정도로 비비안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트리샤는 다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때, 네 소문을 들었어. 마침 아버지께서 샤리즈 후작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셔서 부탁을 드렸지.”

“내 소문?”

“응, 샤리즈가의 영애가 정말 아름답고…… 마음씨가 그렇게 곱다고. 그래서 꼭 친구가 되고 싶었거든.”

그제야 비비안의 눈동자에 만족이 서렸다. 트리샤는 그 눈빛에서 칼을 떠올렸다.

“정말이야? 아버지랑 같이 꾸며 낸 거 아니지?”

“에이, 그런 이야기를 뭐하러 꾸며.”

“그건…… 그래.”

비비안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당장의 달콤함이었다. 트리샤는 다정하게 손을 뻗어 비비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속으로는 백번이고 실소가 나올 만한 일이었다. 동갑인 황태자비를 이렇게 재워 줘야 한다는 게 우습고 하찮았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트리샤 너의 가장 소중한…….”

“응, 친구야.”

트리샤의 말에 비비안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갔다.

***

폭설의 영향은 황후전에도 미쳤다. 평소 중요한 서류는 모두 드노아의 공작저로 보내곤 했는데 오늘은 도로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황후가 급한 일을 우선 처리해야 했다.

물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인 스텔라와 루카스의 역할이 될 것이다. 드노아 경에게도 숨기고 있는 그녀만의 야심이었다.

“……또 남았나?”

“네, 한 가지 있습니다.”

모니카가 조심스레 전갈을 건넸다.

“밀레타 공국?”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에 황후가 눈썹을 꿈틀했다. 밀레타 공국의 영애도 황태자비 후보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발칙하게도 황후가 점찍었던 디아나 카를에게 흙탕물을 튀기기 시작한 가문이었다.

국혼 이후 너무 분주했던 나머지 언젠가 그 빚을 갚아 주겠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잊었다.

“그때 황태자비 간택 문제로 제국에 왔다가 영식만 수도를 둘러보겠다고 남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기상 이변으로 당분간 배를 띄울 수도, 항구에 갈 수도 없으니…… 외교적인 선처를 부탁드린다고.”

“아니, 그건 나도 읽을 수 있다.”

전갈에 쓰인 내용은 뻔했다. 흥청망청 수도의 유흥을 다 체험한 영식이 마침 여비가 떨어져 돌아가려는 찰나 이런 상황이 됐으니 황실에서 돌봐 달란 뜻이었다.

“내 말은, 내가 왜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하냐는 거다.”

“하긴, 참으로 염치가 없는 요청이죠. 명색이 공국이라면서.”

모니카가 재빠르게 황후의 말에 동조했다.

“그냥 무시하심이 어떨까요? 황후 폐하의 답을 전하기도 하찮습니다.”

“그야 그렇지.”

황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파이프를 물었다.

“……잠깐.”

모니카가 서류들을 정리해서 나가려는 찰나, 황후가 한 손을 들었다.

“그 영식이라는 자 말이다.”

“예, 리암 밀레타라고 합니다.”

“나이가 몇이지? 부인은 있나?”

“그러고 보니…… 나이는 스물인데, 첫 부인과 사별했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황후의 입꼬리가 한쪽만 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아버지인 드노아가 묘수를 떠올렸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침 잘됐군. 어차피 항구까지 갈 수 있게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사이 유익한 만남을 가져 볼 수도 있겠어.”

드노아 경은 항상 스텔라를 그레이스만 못하다고 과소평가했지만, 적어도 이런 흉계를 꾸미는 일에서만큼은 드노아 경 이상으로 우수한 게 스텔라였다. 쉽게 말하면 단순한 심술이었고, 그런 쪽으로 머리가 유난히 비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폐하의 말씀을 잘 모르겠습니다.”

모니카가 솔직한 소감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짝을 이루지 못한 가엾은 영애를 이미 알고 있잖나.”

“예? ……설마. 하지만, 그분은 공작위를 계승하실 거라고.”

“그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지?”

황후가 뿌연 연기를 허공에 흩날렸다. 늘 붉게 칠하고 다니는 도톰한 입술에선 벌써 즐거움이 배어났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오나, 소인이 어리석어 이해가 가질 않는데…… 카를가의 영애는 다른 곳에 주시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스텔라는 아직도 그레이스가 제 위신을 꺾었다고 생각했다. 선대공비가 뭐라고 감히 황실의 혼사를 흔들려고 했단 말인가.

“참견하려거든 제대로 했어야지. 내게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황태자비를 얻게 하려고 했다. 그 시커먼 속내야 뻔하지.”

그레이스는 고의로 중간에서 디아나가 불임이란 사실을 숨기고 황태자비 후보로 밀어 넣었다. 황태자비가 후계를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답답하게 속을 태울 스텔라를 보며 제 아들에겐 제대로 된 신붓감을 찾아 주며 뿌듯하게 웃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서 천불이 났다.

“본인 입으로 그리 칭찬을 했던 신붓감을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니 그 꼴이 참 우습게 될 것이다.”

“그럼 어찌 밀레타 영식과 카를의 영애를…….”

“뻔하잖나.”

황후가 높은 웃음소리를 울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혼담이 파탄 나 버린 영애를 차기 대공비로 거론한다는 것 자체에 분해 죽을 거다. 그 얼굴을 어서 빨리 보고 싶어.”

황후가 기다란 손톱을 매만지며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스는 디아나가 불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슨 짓을 해서든 대공비로 맞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텔라의 심술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그레이스의 성정에 하자가 있는, 게다가 파혼 딱지가 붙은 영애를 제 금쪽같은 아들에게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분해 죽을 일이었다.

“모니카, 날이 밝는 대로 양측에 알려라.”

“영식은 그렇다 치고, 카를가의 영애에겐 뭐라고 해야 할지…….”

“난 그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문제를 공론화한 적 없다. 즉, 공식적으로 카를가의 영애는 국혼에서 탈락한 것뿐. 그리 소문이 나고도 성사되지 못했으니 내 안타까운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보내는 제안이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을 거다.”

과연, 모니카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랜 시간 황후를 모셨지만, 아직도 못된 짓을 궁리하는 저 두뇌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참으로 반가운 눈이구나.”

황후의 눈빛이 유달리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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