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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2화 (112/184)

112화

하룻밤 사이 예고도 없던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사방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수도의 역사에서 이런 규모의 폭설이 내린 것은 무려 73년 만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은 평소 보기 어려웠던 함박눈에 신이 나서 온 골목을 뛰어다녔지만, 어른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세상에…… 이게 정말 하룻밤 사이에 내린 눈이야?”

“네. 저도 믿기진 않지만요.”

디아나는 온통 하얗게 뒤덮인 창밖을 보면서 연신 눈을 깜박였다. 하얗고 소담한 눈은 햇빛이 반사되어 무척 반짝거려 아름다웠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것들은 곧 온 수도의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다행히 눈이 내리는 것은 멈춘 모양이에요.”

샬롯도 새삼 신기한 듯 창밖을 봤다.

“그레이와 하인들이 고생이죠.”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내리는 것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쌓여 버린 눈은 이야기가 달랐다. 하필 기온도 떨어지고 있어서 저택의 벽난로마다 장작을 더 채워 넣었다고 했다. 막상 눈이 내릴 때는 포근하게 느껴지지만, 그 후에 한파가 닥친다면 골치도 그런 골치가 없었다.

“샬롯, 집사장에게 소금을 사용하라고 해. 저급 소금이라면, 그리 비싸지 않잖아.”

“그렇지만…… 소금을 어디다 쓰나요?”

사실 디아나도 그 원리는 몰랐다. 막연히 현대에선 폭설이 내리면 도로마다 소금과 비슷한 화학물질을 가져다 둔다는 것 정도만 아는 거다.

“그…… 책에서 봤어. 뿌려 두면 눈이 녹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아가씨는 정말 박식하시네요.”

디아나는 샬롯의 말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샬롯, 검은 교각 너머는 멀어?”

에드윈은 그곳을 건너 사냥을 하러 갔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꽤 멀죠. 수도에서도 3시간은 말을 달려야 갈 수 있을 거예요. 사실상, 남부 땅의 경계 너머죠.”

“전하께서 거기로 사냥을 하러 가셨는데.”

“네? 저런. 당분간 돌아오기 힘드실지도 몰라요.”

“그 정도야?”

샬롯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교각은 가파른 절벽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제국에서 가장 따뜻한 수도의 골목길까지 눈이 얼어붙기 시작했는데, 그 길을 건너는 건 무리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곳엔 경비 초소가 있으니 지내시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당분간은 못 돌아오실 거라는 뜻이지?”

“아마도요.”

언제나 손쉽게 공작저의 담을 넘던 에드윈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자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이건 디아나의 생각이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일이었다.

“조심해야겠어. 샬롯, 저택의 사람들에게도 무리하지 말고 평소보다 뭐든 조심하라고 전해 줘.”

“네, 아가씨.”

다행히 공작저에 쌓인 눈은 밤이 되기 전에 치웠다. 디아나의 작은 지혜 덕분이었다. 수도의 큰길도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서 눈을 치우느라 종일 난리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기에 눈이 얼기 전에 치울 수 있어서 그나마 큰 문제로 번지진 않았다.

하지만 괜찮은 것은 수도 정도였고, 당분간은 이곳에서 아무도 나갈 수 없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눈이 만들어 낸 견고한 감옥이었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야지.”

디아나가 손을 꼭 쥐고 소망을 읊조렸다.

***

갑작스러운 폭설에 의회가 쉬게 됐다. 루카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태자전으로 와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막상 의회에 나가기 전엔 묘한 의욕도 들었으나, 실제로 루카스가 본 의회의 사람들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어차피 황제가 있는 나라인데 쓸모없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개들을 데려와라.”

“예, 전하.”

황실의 눈 대부분은 궁인들이 치웠지만, 루카스의 명령으로 정원의 눈은 그대로 뒀다. 황실은 수도에서도 가장 따뜻한 곳에 있었고 자연히 루카스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눈을 구경할 수 없었다.

“전하, 개들을 데려왔습니다.”

“정원에 풀어라. 하얀 눈밭에 까만 개들이니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예, 전하.”

개들도 눈이 낯선지, 몇 번이고 코를 킁킁거리다가 이내 신이 난 어린아이들처럼 껑충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남에겐 보이지 않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개들이 계속해서 껑충대자 루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괜찮은 건가. 시종장?”

“송구하오나 전하, 저는 개에 대해서는 잘 모르옵니다.”

“그랬었지.”

황실에서 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건 루카스뿐이었다. 그때, 루카스의 뇌리에 어떤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 황실에서 유일하게 개들을 능숙하게 다뤘던 붉은 머리카락의 시녀였다.

“시종장, 황태자비전에 가서 시녀 트리샤를 데려와라.”

“시녀만…… 데려오면 됩니까?”

“그래, 시녀만이다.”

트리샤의 예상대로 루카스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곧 트리샤가 루카스 앞에 와서 예를 갖추자 루카스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개들이 좀 이상한 것 같다.”

인사를 건너뛴 루카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루카스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개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었다.

“트리샤, 네가 한번 살펴봐라.”

루카스가 처음으로 트리샤를 불렀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엔 눈보다 더 반짝이는 환희가 가득 찼다.

“네, 전하! 얘들아, 이리 온.”

트리샤가 얼른 정원으로 뛰어가서 개들을 불러 모았다. 루카스가 자신을 불렀을 땐 개와 관련된 일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이미 개들을 홀리는 가루를 옷에 잔뜩 묻힌 후였다. 예상대로 트리샤의 주위로 몰려든 개들은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고 트리샤를 핥아 댔다.

“아이, 간지러워. 전하께서 너희들이 너무 신이 난 것 같아서 걱정이신가 봐. 어디 보자, 괜찮니?”

루카스는 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명령만 듣도록 훈련시킨 개들은 서열에 있어 인간보다 민감했다. 본능으로 제 주인인 루카스의 서열이 높다는 것을 인식한 개들은 루카스를 제외한 이들은 결코,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궁인들을 물어뜯어 상처를 입히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개들이 저 트리샤라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만 보면 주인인 자신에게보다 더 반갑게 꼬리를 치고 여기저기를 핥아 대는 게 신기했다.

“자, 하나씩 앉아 보자. 스톤, 이리 와! 카탄은 그만 핥고.”

그 순간, 루카스의 온 신경이 트리샤에게 쏠렸다. 개의 이름은 한 번밖에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설령 트리샤가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라고 쳐도 매일 개들을 돌보는 궁인조차 셋을 제대로 구분하는 적이 드물었다.

“루키, 눈썹에 온통 눈이 묻었잖아. 그래, 그래…… 발바닥이 너무 차갑구나. 너희도 이런 눈은 처음 보니? 나도 그래.”

재잘거리는 트리샤의 발랄한 목소리는 루카스의 걸음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눈이 쌓인 정원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때 트리샤가 고개를 들고 루카스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전하, 개들은 모두 괜찮아요. 아마 눈을 밟는 게 처음이라 흥분한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군.”

“하긴, 저도 이렇게 쌓인 눈을 밟는 건 처음이라 설렜어요. 걸을 때마다 뽀득거리는 게 너무 신기해요.”

트리샤가 새처럼 지저귀는 모습이 꼭 소녀 같았다. 이내 자신이 너무 많이 떠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애써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루카스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까지도.

“뽀득거린다니?”

루카스가 선선히 답하자 금세 트리샤의 얼굴이 도로 밝아졌다.

“눈이 쌓인 곳을 밟으면 뽀득거리는 소리가 나요.”

“그래?”

“네, 정말 신기해요!”

그 환한 미소가 눈에 반사되어 더 빛나는 것 같았다.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쌓인 정원으로 한 발짝을 디뎠다. 뽀득거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한 걸음만 내디뎌도 트리샤의 표현이 꼭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 정말이군.”

“그렇죠? 이렇게 큰 눈은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개들도 신이 났나 봐요.”

루카스도 즐거운 듯이 제 발의 감촉을 느끼며 근처에서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이제야 개들이 정신을 놓고 뛰어다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루카스도 체면이 없었다면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개들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사실이다.

“전에 황태자비 전하께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아니, 내 말은…… 이름은 그렇다 치고, 개들을 어떻게 구분했냐는 거다.”

세 마리의 개들은 모두 검었고 형제였다. 남들이 보고 구분할 만한 특징도 딱히 없었다.

“그야, 전부 다르게 생겼는걸요.”

트리샤가 제 발밑의 눈을 뽀드득 밟으며 웃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개 중 하나를 가리켰다.

“덩치는 카탄이 제일 탄탄하고, 루키는 귀가 더 뾰족해요. 스톤의 꼬리는 유난히 멋지죠. 물론, 세 마리 다 멋지지만요.”

“허어.”

루카스가 묘한 소리를 흘렸다. 여태까지 그건 루카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개들이 워낙 사나워 자세히 관찰할 기회조차 없었던 거지만, 트리샤의 관찰력이 유난히 뛰어난 것도 인정해야 했다.

“동물을 좋아하나?”

“네, 동물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요. 그리고 왠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도 이미 동물은 중요한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루카스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트리샤를 빤히 주시했다.

“아, 송구합니다. 소인이 너무 들떠서 그만.”

“아니다. 우연히 나도 같은 생각이라.”

트리샤의 뺨이 묘하게 달아올랐다. 심장은 이미 쿵쾅거리고 있었다.

“트리샤 너는 머리카락 색만 특이한 게 아니군.”

붉은 눈동자가 루카스를 바라봤다. 새하얀 눈을 배경으로 꿈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너무 설레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황태자인 루카스가 제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트리샤, 한 사람만을.

“그래, 개들은 아첨하지도 않고 날 속이지도 않아.”

휘익, 루카스가 휘파람을 불자 세 마리의 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꼬리를 치며 킁킁거리는 개들은 기분이 퍽 좋은 것 같았다. 그건 트리샤가 뿌려 둔 가루가 개들을 묘하게 흥분시키기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루카스로서는 트리샤가 특별하다고 여기기 충분했다.

“황실엔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 없지. 모두 개만도 못한 머저리들이야.”

트리샤는 곤란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도 붉은색이었군.”

“예…….”

트리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수줍은 듯 깜박이는 눈동자와 귀에서 달랑거리는 루비 귀걸이가 잘 어울렸다. 이 폭설은 트리샤에게 일대의 행운이었다. 하얀 눈밭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검은 개가 아니라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였다.

루카스가 트리샤를 각인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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