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트리샤는 황실로 돌아가자마자 황후를 알현했다. 여전히 나른한 연기를 내뿜는 황후의 파이프에선 몽롱하고 달콤한 냄새가 뒤섞여 묘한 향의 연기가 새어 나왔다.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모니카 시녀장님께 제가 만든 약을 드렸습니다.”
“그래, 효과를 보려면 얼마나 걸리지?”
“보통…… 서민들은 생활에 바빠서 배가 불러야 알지만, 시험 대상을 평소 월경이 규칙적이고 건강한 여인으로 한다면 월경이 찾아오지 않는 것으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군. 모니카, 해당하는 시험 대상으로 구하도록 해.”
“예, 폐하.”
“그래서…… 이것 찾고, 뭐 가족이라도 만났나?”
“아뇨, 저희 어머니께선 요양 중이라서요.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이유로 가족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모시는 웃전인 황태자비 전하의 본가인 샤리즈 후작저에 가서 전하의 물건을 몇 가지 전달받았습니다.”
“제법 기특한 시녀구나.”
황후가 짧은 소감을 말한 후,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트리샤에게 주어진 시간은 거기까지란 뜻이었다. 트리샤는 예를 갖추고 황후전을 나선 직후에 잰걸음으로 빠르게 제 처소를 향해 돌아갔다.
다른 시녀에게 먹이를 부탁하긴 했지만, 직접 보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디나! 나 왔어.”
트리샤의 목소리밖에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아니면 며칠의 부재 동안 쓸쓸했던 건지, 굳이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고양이 디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트리샤에게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왔다.
“자, 이번 우유는 황태자비전에서 쓰다 남은 건데, 본래는 전하의 오믈렛에 들어갈 용도였대. 엄청 귀한 거라는데 마침 딱 이만큼만 남아서 내가 졸라서 가져왔지.”
고양이는 킁킁, 트리샤의 옷에 묻어 온 낯선 냄새를 맡더니 우유를 그릇에 따라 주자 코를 박고 마셨다.
“그래, 귀한 우유니까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먹어.”
트리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의 명을 받들기 위해 약재를 구하는 과정에서 문득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떠올랐다. 작은 동물의 기력과 성장에 보탬이 된다는 일명 영양제를 탄 우유를 말끔히 먹어 치운 디나의 작은 배가 빵빵했다.
동그랗고 푸른 눈동자가 트리샤를 빤히 응시하더니 그대로 트리샤가 앉은 무릎을 파고들었다. 아마 이 고양이 디나는 트리샤가 제 가족인 줄 알 것이다. 트리샤도 내심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없는 동안 외로웠어?”
고양이가 대답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트리샤를 보며 느릿하게 깜박거리는 파란 눈을 보자 꼭 말이 없어도 말이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난 외로웠어. 있지, 자려고 누웠는데 네가 곁에 없으니까 엄청 허전한 거 있지?”
트리샤의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 고양이는 트리샤에게 묻은 바깥 냄새가 신기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 킁킁대고 다니던 고양이가 트리샤의 파우치 하나에 관심을 가졌다. 트리샤는 얼른 일어나 그것을 빼앗아 아직은 고양이가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뒀다.
“디나, 이건 네가 먹을 게 아니야. 오히려 먹으면 큰일 난다고.”
모니카에겐 쉽게 임신이 되고 그 임신을 오래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만을 줬다. 하지만 트리샤가 들여온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삐…… 야아…….”
아직 온전히 야옹이란 발음을 못 하는 고양이가 자꾸 트리샤의 발치를 얼쩡거렸다.
“애교 부려도 소용없어. 이걸 줄 아이들은 따로 있거든.”
트리샤가 약초를 곱게 빻아서 종이로 곱게 접어 둔 작은 뭉치를 책장의 가장 꼭대기 책들 사이에 끼웠다. 그사이 입꼬리가 슬쩍, 묘하게 올라갔다.
“나 올 때까지 잘 자고 있어.”
트리샤가 환궁했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비비안이 찾아 댈 것이다. 트리샤는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비비안 앞에서는 다른 표정을 할 예정이었다.
트리샤의 예상대로 비비안은 바로 트리샤를 찾았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트리샤는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자신을 황태자비전의 알현실까지 안내한 시종장들이 아직 보고 있었다. 비비안도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트리샤가 고개를 들었고, 시종장이 문을 닫았다.
“트리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문이 닫히기 무섭게 의젓한 황태자비는 바로 인형을 끌어안고 자던 소녀로 돌아갔다. 트리샤는 금세 달음질을 쳐서 제 손을 꼭 붙드는 비비안을 보자 새삼 디아나가 떠올랐다.
디아나와 비비안, 그리고 트리샤는 동갑이었다. 디아나는 이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의젓하고 기품이 있었는데 비비안은 보는 눈만 사라지면 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한심했다.
“아니, 아니지…… 오랜만에 가족은 만났고?”
“으응, 어머니는 요양 중이고 아버지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래도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확인했어.”
“다행이다, 그거 정말.”
“샤리즈 후작가에도 들렀어. 후작부인은 이어진 연회 때문에 감기에 걸리셔서 못 뵀고, 칼 경을 뵐 수 있었어. 네가 잘 지내고 있다니 무척 자랑스러워하시고 네가 아끼는 물건들도 함께 보내셨어.”
비비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작저의 막내이자 하나뿐인 자식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입궁해서야 깨달았다.
비비안은 자신이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시달린다고 자조하곤 했지만, 막상 황실에 입궁하니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 교육이 없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거다.
“언제쯤, 부모님을 직접 뵐 수 있을까?”
낯선 곳, 두려운 환경에서 비비안은 자신의 집과 가족에 대해 더 큰 애착이 생겼다. 한땐 엄하기만 한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덕분에 큰 화를 입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아마 회임이라도 하면 입궁시켜 주시지 않을까? 상으로 말이야.”
“으음,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으려나.”
“사실 나도 황실은 잘 몰라. 나중에 네가 황태자 전하께 여쭤봐.”
그러자 비비안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전하를 뵈러 가야 해. 마침, 네가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응? 전하를 뵙는 데 내가 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트리샤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보자고 하셔. 분명 그 개들을 데려오실 거 같아. 트리샤, 넌 동물과 친숙하지?”
“으응, 그런 편이야. 어릴 때는 이웃에 가축을 키우는 분들도…….”
그러자 비비안이 트리샤의 손을 더 세게 쥐고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좀 도와줘! 나 털 달린 짐승도 별로지만, 그 사냥개…… 너무 무서워. 하지만 그런 내색을 했다가 황태자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트리샤 네가 그 개들이 내게 못 오도록…… 어떻게든 해 주면 안 될까?”
트리샤의 대답이 채 들리기도 전에 시녀장이 노크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일단 같이 가, 트리샤. 응?”
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황태자비를 부축했다. 비비안이 청하지 않더라도 루카스에게 제 존재감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던 차인데, 어쩐지 요즘은 행운만이 트리샤를 따르는 것 같았다. 트리샤는 회심의 미소는 감춘 채, 아까 종이로 접은 약 가루 하나를 품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은 겨울 같지 않게 날이 포근하더군.”
정원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 루카스의 뒤로 사나운 세 마리의 검은 개가 보였다. 트리샤의 팔에 의지해서 걷던 비비안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싫다는 뜻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산책에 초대해 주셨으니, 제 마음은 이미 겨울이 아니라 봄인걸요.”
비비안도 헛배웠던 것은 아닌지, 가끔 저런 말로 루카스를 치켜세웠다. 순진한 체는 다 하면서 챙겨야 할 것은 다 챙기는 모습에 트리샤는 속으로 냉소했다.
“개들은 산책을 즐기거든.”
멍멍, 그 말을 따라 하듯 개들이 짖었다. 보기만 해도 사나운데, 낯선 사람이랍시고 트리샤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검은 개들은 덩치가 송아지만큼 컸다.
“내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각각 루키, 카탄, 스톤이라고 하지. 어떤가, 가까이서 보니 귀엽지?”
개들이 앞다투어 루카스의 손에 머리를 비벼 댔다. 그러나 아무리 잘 쳐줘도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비안은 억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이 굳어 있었다.
황태자가 제 이니셜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면 무척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다. 싫다고 해서도 안 되고 두렵다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비비안은 공포를 자제하기엔 너무 어렸다. 비비안은 개들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쿡쿡, 트리샤의 옆구리를 찔렀다.
“황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아…… 일전의 그 시녀군. 머리 색이 튀던.”
“황공하옵니다.”
루카스는 아직도 트리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뭐, 괜찮았다. 트리샤는 곧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할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멋진 개들은 처음 봐서 그런데, 제가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오, 개에 대해 아나?”
“어릴 때 이웃에서 사냥개를 많이 기르셨답니다. 저도 자주 놀러 갔고요.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렇게 멋진 개들은 본 적이 없어요.”
루카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트리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쭈그려 앉아서 개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보니 훨씬 개들의 이빨이 무섭게 보였다.
트리샤는 심호흡한 후에 개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제대로 훈련받은 사냥개들은 그것을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순식간에 트리샤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개들이…… 트리샤, 트리샤?”
커다란 덩치의 개 세 마리가 트리샤를 에워싸자 정작 트리샤 본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비안이 다급하게 누군가 부르려고 하는 순간, 루카스가 그 팔을 붙들었다. 괜찮다는 표정이었다. 루카스가 가리키는 곳에선 개들의 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 개들은 그대보다 그대의 시녀가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진정하고 자세히 보니 개들이 트리샤의 주위에서 꼬리를 치고 앞발을 들어서 올라타며 친근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군.”
저 개들은 루카스를 위해 특별히 훈련된 개들이었다. 루카스 외에 저 개들을 다루는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개들은 트리샤의 얼굴을 핥아 대고 그 품을 앞다투어 파고들었다.
트리샤는 천진하게 동물과의 교감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아까 손뼉을 치기 전에 손바닥에 가루를 발라 뒀고, 나머지는 종이에 싸서 제품에 넣은 것이 효과적이었다.
“거기, 시녀. 개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와라.”
루카스의 명령에 트리샤가 일어서 걸어오자 개들이 알아서 트리샤의 뒤를 쫓았다.
“개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지?”
“부끄럽지만, 살림이 어려워서 가끔 옆집의 사냥개를 돌보며 품삯을 받았던지라…….”
“그래, 막상 맡아서 기르고 돌보면 동물이 따르기 마련이지.”
이 정도 거짓말은 트리샤에게 있어 손톱만 한 가책도 주지 못했다. 루카스는 처음으로 흥미로움을 담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트리샤를 응시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트리샤 블랑이옵니다.”
루카스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유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비비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트리샤처럼 개들을 만지는 것은커녕, 지금 개들이 곁에 있어서 루카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는 채였다.
두 사람은 개들을 만지며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비안이 처음으로 느끼는 셋 중의 소외였다. 지난 생의 디아나가 피폐해질 정도로 느꼈던 소외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다음부턴 루카스가 트리샤의 이름을 부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