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트리샤의 손을 놓았다. 트리샤는 자만심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허술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는 너뿐이야. 아무리 비비안, 아…… 둘이 있을 땐 이름을 부르거든.”
예상대로 트리샤는 자신의 대단함을 과시하기 바빴다. 황태자비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다. 오랜 시간 공작이라는 작위와 제 신분 차이를 자격지심으로 의식하고 있었단 반증이었다.
“황태자비 전하와 가깝게 지낸다니 다행이네.”
“아냐, 그냥 일방적으로 비비안이 내게 의지하는 구석이 있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비비안은 너와 비교하면 뭐 하나 뛰어난 게 없어.”
트리샤가 또 그 잘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냥 평범한 영애야.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던데 중요한 건 정작 모르기도 하고. 자꾸 날 찾아서 내가 많이 피곤해. 네가 황태자비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였다. 트리샤는 제게 곁을 내어 주지 않는 디아나에게 불안을 느꼈고 샤리즈 후작가의 손을 잡았다. 목적대로 황태자비의 시녀까지 됐으면서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이렇게 기만을 한다니, 과연 트리샤였다.
“황태자비 전하도 훌륭한 분이라고 들었어.”
“그 겸손까지 네가 훨씬 나은걸.”
푹, 트리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관심을 가져 주셔서 다행이야. 글쎄, 얼마 전에는 눈처럼 하얗고 눈이 푸른 새끼 고양이를 하사하셨어. 얼마나 귀여운지, 꼭 너처럼 예뻐.”
트리샤는 그 고양이를 볼 때마다 디아나를 떠올렸다. 물론, 디아나가 그 고양이의 이름을 알았다면 소름이 끼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트리샤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참, 트리샤 네 어머니 말이야.”
디아나가 본론을 꺼냈다. 정작 딸인 트리샤는 황실의 생활에 대해 더 떠들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걸 다 들어 주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아, 항상 감사하고 있어……. 네 덕분에 우리 어머니가 요양하실 수 있는 거잖아.”
“응, 그런데 수도원에서 더 좋은 요양 시설을 짓게 되어서 그쪽으로 모셨어. 혹시 네가 나중에 놀랄까 봐.”
“정말? 지금도 빚을 진 기분인데…… 그런 데는 아주 비싸지 않아? 아직 내가 봉급이 적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돈을 받으면 내 마음이 불편할 거야. 참, 휴가를 받아서 나왔을 텐데 집엔 아직 안 들렀나 봐?”
“으응. 아버지는 항상 취해 계시니까. 내가 가 봐야 화만 돋울 거야. 니콜라야 돌봐 주는 사람이 있을 테니…….”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리 좋은 기억이 없는 가족이라도 어린 니콜라는 죄가 없는데, 이미 트리샤의 안중에도 없는 거다.
“사실, 니콜라가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해서 같은 시설에서 기르기로 했어. 어머니가 직접 지켜볼 수 있으니 더 안심도 되실 거야.”
“세상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준 거야?”
조금 전까진 제 가족의 안부조차 묻지 않은 주제에 트리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애초에 가족의 안위는 트리샤의 안중이 아니었다.
지금 트리샤가 기쁨으로 넘치는 건 자신을 향한 디아나의 손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디아나 자신의 말처럼, 정말로 트리샤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불안까지 말끔하게 씻겨 나간 것 같아서 후련했다.
“니콜라는 아직 어리니까 어머니가 돌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항상 네게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괜찮아, 트리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너는 당분간 황실의 일로 바쁠 테니, 내가 계속 돌봐 드려도 되지?”
그게 디아나의 목적이었다. 트리샤의 방해 없이, 사라와 니콜라를 조사할 수 있는 것. 제롬은 이미 트리샤의 편지를 가장해서 사라에게 접촉하고 있었다. 진짜 트리샤가 나타나면 곤란했다.
“나야 고맙지!”
다행히 트리샤는 무정한 딸이자 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귓가를 맴돌던 기침 소리와 니콜라가 떼를 쓰고 사고를 치는 소리, 아버지의 술주정……. 아직도 악몽을 꿀 때면 그때의 환청이 들려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황실 시녀가 된 지금, 그런 구질구질한 과거를 마주하는 건 사절이었다.
“그래. 어머니와 니콜라는 걱정하지 마. 그동안 네가 고생이 많았지?”
이토록 다정하게 제 마음을 들여다봐 주는 것도 디아나뿐이었다. 트리샤는 잠시 촉촉해진 눈동자를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 네가 내 친구라는 건 정말……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야.”
디아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트리샤의 말은 사실이다. 지난 몇 번의 생에서도 늘 그랬다. 디아나라는 친구를 제물로 차근차근 제 야망을 실현하던 트리샤의 모습은 지금도 그 근본이 같았다.
“나도 트리샤 네가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친구인 것이 나았다. 어차피 트리샤는 반드시 디아나의 운명을 가로막고 그 발목을 붙들어 암흑으로 끌고 들어갈 존재다. 그렇다면 디아나도 친구라는 미명을 이용해서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지금, 그녀의 가족들을 숨겨 두고 트리샤가 각성할 힘을 대비하는 것처럼.
“난 너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트리샤, 난 정말 괜찮아. 하지만 정 뭔가 해 주고 싶다면…… 가끔 내게 편지를 써 줘.”
제롬은 트리샤의 편지를 가장하려고 블랑가에 숨어들었지만, 충분히 많은 필적이 없어서 어렵다고 했다. 게다가 트리샤는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해서 개인의 어투가 더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현재 진행되는 트리샤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응, 그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
트리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귀에 달린 루비 귀걸이가 같이 달랑였다. 그건 기만의 증거였다. 어리석은 트리샤는 제 허영심을 이기지 못하고 기만의 증거를 단 채로 디아나에게 용서를 구하러 왔다. 그게 트리샤의 한계였다. 디아나는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
트리샤는 제 목적을 달성한 후, 바로 황실로 돌아갔다. 그 목적에 가족을 만나는 일은 포함되지 않아서 디아나로선 다행스러웠다.
며칠 후, 공작저엔 서툰 필적으로 쓰인 트리샤의 편지가 도착했다. 디아나는 마침 보고를 위해서 찾아온 제롬에게 그 서신을 건넸다.
“역시, 수준을 낮춰서 쓰길 잘했군요. 새로운 자료가 생겼으니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사라 블랑이 믿던가요?”
“네. 게다가 병 때문인지 시력이 극도로 약해서 더듬거리며 읽더군요.”
제롬은 쇠약해진 사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는 허약한 환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굵어진 손마디는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방향으로 제각각 휘었고, 제 아들인 니콜라가 남보다 모자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일단은 안부로 시작했습니다. 아주 반가워하던데요.”
“그렇겠죠……. 정작 진짜 딸은 제 어머니에 대해서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 같지만요.”
트리샤가 사라를 찾을까 봐 내심 긴장했던 게 허무할 정도로 트리샤는 가족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일은 수월해졌지만, 어쩐지 입이 썼다.
“그리고 제가 직접 동쪽에 가 보려고 합니다. 이제 조사원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제롬 경이 직접 가 준다면 나야 안심이 되겠지만……. 괜찮겠어요?”
“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미리 기존 업무를 다 정리해 뒀습니다.”
“이런. 공작저의 지출이 더 커지겠군요.”
디아나가 반쯤 농담 같은 말을 던졌지만, 제롬은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뇨. 추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흥미와도 관련이 있어요.”
“트리샤 블랑에 대해서요?”
제롬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조사로 드러난 피상적인 일들……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그 너머엔 반드시 뭔가 있어요.”
그는 제국에서 가장 영리하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디아나도 직설적으로 자신의 회귀를 말하진 못 했지만, 그는 착실히 증거를 찾아 진실에 다가가고 있었다.
“제국 교황청의 비공식적인 이단 심문과 동쪽 땅의 수상한 일족. 전 거기서 마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요.”
제롬의 표정이 결연했다. 교황청이 이단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그 후의 심문은 모두 비공식적으로 행해졌으며 세상의 분위기도 점차 마녀나 미신을 믿지 않는 쪽으로 바뀌었기에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소리였다.
“차기 공작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이건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제롬 경.”
디아나가 차분히 말했다.
“처음 이 일을 맡길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난 경의 상식을 내려놓고 이 일을 봐 달라고 했어요.”
“네, 실제로 그렇게 됐죠.”
제롬의 마음 한구석에 남은 고정관념을 깰 때였다. 디아나의 믿음이 제롬을 진실로 떠밀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디아나는 이전의 생으로 마녀란 진실을 이미 확인했지만, 제롬은 아니었다. 그처럼 영리한 남자가 이런 판단을 내렸을 때는 논리 외에 다른 것이 작용할 거라는 게 디아나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이유예요. 제롬 경의 이유는 뭐죠? 이건 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거로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늘 느끼지만, 영명하십니다.”
제롬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자 그 현명함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유가 없는 건 싫어합니다, 저도. 그러니…… 솔직해져야겠군요.”
“경이 이번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나요?”
“집착이라, 참 정확한 단어군요. 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 비공식적인 이단 심문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그건 제 인생에서 꼭 마주하고 결론을 지어야 할 문제거든요.”
디아나는 되묻는 대신 제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 비밀 수도원에서 자랐습니다. 특히 절 키워 주셨던 수도사께선 제 할아버지뻘이었는데, 무척 인자하셨죠.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제롬 하이든은 재판에서 연전 승리를 기록하고 살인적인 보수로 유명했지만, 그 출신은 비밀스러웠다. 디아나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가 연기처럼 수도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불과 몇십 년 전에도 이단 심문이 있었다는 기록을 제가 훔쳐봤다고 말씀드렸던가요?”
“네.”
“그때 제가 고의로 누락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기록에 없었으니 누락은 아니군요.”
제롬은 금색 눈동자를 감았다가 떴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기록은 수도사의 자애로움과 불현듯 찾아온 커다란 혼란, 그리고 또 혼란이었다. 마치 중간 부분이 사라진 이야기 같았다.
“동쪽 땅을 상대로 한 이단 심문은…… 10여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자리에 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토록 자애로웠던 수도사는 사람들을 잡아서 화형을 시키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제롬의 기억이 끊겼다. 진실을 탐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것은 제롬의 근본적 욕구였다.
“전, 그게 옳은 일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만일 동쪽 땅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일족이 정말로 마녀의 힘을 가졌다면 정당한 심문이 된다. 디아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제롬의 몫이었다.
“우린 서로에게 적임자였군요.”
“네. 반드시 진실을 찾아오겠습니다.”
누구보다 영리한 그였으니 단지 사실이 아닌 증거까지 찾아올 것이다. 디아나에겐 없는 것이다. 이젠 서두르는 것만이 남았다. 관건은 트리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었다. 이번만은 패배해선 안 된다. 디아나는 굳은 결심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