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비비안은 갑작스러운 트리샤의 휴가에 놀란 것 같았지만, 시녀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라는 설명에 달리 반발하진 못했다. 며칠이라도 트리샤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못내 마음에 안 드는 내색을 했지만, 이 기회에 후작가에 들러 안부를 전하겠다고 하자 겨우 수긍했다. 실제로 트리샤가 출궁해서 가장 먼저 갈 곳은 샤리즈 후작가였다. 그러려고 고용된 몸이었으니까.
“샤리즈 후작님을 뵙습니다.”
“이런, 우리 사이에 딱딱한 호칭은 필요 없잖나.”
칼 경이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트리샤를 보고 싱긋 웃었다. 후작부인은 며칠이나 이어진 연회 끝에 몸살이 나서 자는 중이라고 했고, 어차피 트리샤를 직접 고용한 것도 칼 경이니 그의 응접실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 황태자비 전하의 소식은?”
“무척 잘 해내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황태자 전하께서 큰 관심을 주시는 은혜가 있어서 앞으로도 더욱 잘 해내실 거예요.”
“관심이라는 건? 정확히 말해 봐라. 초야 후에도 자주 들르신다는 건가?”
귀족치고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결혼한 딸의 침실 생활까지 알려 한다는 건 황태자비라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건지.
“네…… 다섯 번 정도 오셨어요. 또, 친히 공물로 들어온 것을 하사하셨고요.”
“오, 공물이라면.”
“하얗고 눈이 푸른 새끼 고양이인데, 제국에는 없는 종이라서.”
칼 경은 김이 팍 샌 표정을 숨기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그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비비안이 왜 동물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쨌거나, 만사가 잘 돌아가는 것 같군. 안 그런가, 트리샤 블랑?”
어느새 칼 경이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다. 트리샤는 살짝 몸을 뒤로 뺀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날 너무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 말했듯이 난 네 아버지의 친우니까.”
칼 경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트리샤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정말 친우였다면 블랑가의 지붕이 샐 때나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나타났을 거다. 그러니 블랑 남작은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도박판에서 몇 번 안면을 익힌 건 사실이겠지만, 트리샤가 선택된 것은 디아나의 친구로서 마지막 증언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몇 가지 일을 겪으며 트리샤가 내린 결론이었다.
“모처럼 휴가를 얻었으니 아버지를 보러 갈 건가? 난 그러지 않기를 추천하네만.”
“예?”
“어제도 도박판에서 가진 돈을 모조리 잃은 후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갔거든.”
트리샤는 간신히 한숨을 삼켰다. 그 인간은 변하질 않았다. 트리샤의 아버지는 그렇게 쾨쾨한 곰팡이와 함께 엉망으로 취한 채 가치도 없는 숨을 쉬다 죽을 운명이었다.
“걱정할 것은 없어. 네가 내 딸을 돌봐 주는 만큼, 나도 네 아버지를 돌보거든. 비록, 블랑 남작가에 보내는 하녀가 자주 그만둔다는 게 골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칼 경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친구가 널 많이 힘들게 했다는 건 이해한다.”
그의 손이 트리샤의 어깨를 도닥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어차피 넌 우리 비비안과 평생을 함께할 운명…… 날 아버지처럼 여겨도 좋단다.”
“제가 감히…….”
“아니, 아니지. 그래야 딸을 둔 아비로서 더 안심되거든. 비비안은 외로움을 타는 아이라 더욱.”
듣긴 좋은 말이었다. 다신 자신이 자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트리샤에게 죄책감을 지워 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트리샤는 초라한 집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샤리즈 후작의 충고로 집에 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 트리샤가 나쁜 게 아니란 말이다.
“경의 말씀은 감사히 듣겠어요.”
“그럼, 오늘은 후작가에 머무는 거지?”
“아뇨. 그…… 시녀들이 휴가 때 묵어야 하는 여관이 정해져 있어서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칼 경에게 통했으니 됐다. 그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집사장에게서 몇 가지 물건을 가져가도록. 검은색 주머니 안의 것은 트리샤 너의 것이니, 우리의 호의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예, 감사합니다. 칼 경.”
트리샤는 빠르게 칼과의 어색한 자리를 벗어났다. 후작가의 현관엔 황실에서 딸려 보낸 시종이 트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리샤는 일부러 천천히 그의 시중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후작가의 집사장이 전달한 것은 대부분 비비안이 아끼던 물건이었다. 트리샤 몫이라고 했던 검은 주머니는 무척 작았다. 트리샤는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주머니를 풀어 봤다.
“와…….”
한 쌍의 귀걸이는 트리샤의 눈동자 색처럼 붉은 루비였다. 보석이 크진 않았지만, 트리샤가 태어나서 가져 본 자신의 물건 중에서 가장 귀했다.
트리샤는 당장 그 귀걸이를 귀에 걸고 손거울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이 바뀐 것 같았다. 황실 소유의 마차를 타고 시종을 부리며 루비 귀걸이를 건 모습을 직접 보자 제 꿈이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 났다.
“그래, 이젠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야.”
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황후도 직접 그렇게 말했다. 술에 취한 무능한 아버지는 트리샤더러 늘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계집이라고 욕설을 퍼부어 댔지만, 그는 틀렸다. 아니, 모두가 틀렸다.
“이제부터 그걸 보여 줘야겠어.”
트리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것이다. 여태까지의 자신은 고치 속의 애벌레에 불과했고, 이제야 날개를 찾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 순간 떠오른 사람은 한 명이었다.
“잠깐.”
트리샤가 마부석으로 향하는 벽을 두드렸다.
“카를 공작저로 가 줘.”
이젠 낮추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마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
디아나가 불청객의 소식을 들었을 땐 오후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황궁의 시녀라고 했는데?”
“네. 타고 온 마차를 보니 그런 것 같더군요. 정식으로 출궁한 것 같아요.”
“……뭐지, 어머니의 소재를 찾는 걸까?”
디아나의 물음에 샬롯도 뚜렷한 대답을 내놓진 못했다.
“들이지 말까요?”
샬롯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사라 블랑의 신병에 대해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트리샤는 이미 황태자비 검증에서 알지도 못하는 디아나의 몸 상태에 대해서 증언했다. 그 부채감을 적절히 이용하면 오히려 성가신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다.
“응접실로 들여.”
“네, 아가씨.”
잠시 후, 추억에 잠겨 응접실 이모저모를 살펴보던 트리샤 앞에 디아나가 나타났다. 황태자비 검증 이후로 처음 만나는 디아나였다. 그때 곁눈질로 훔쳐봤던 것보다 한층 싱그럽게 미모가 꽃핀 디아나를 보자마자 마음이 울컥했다. 바로 이 빛이었다. 비비안에게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디아나만이 가진 빛이다.
“디아나, 나…….”
트리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아나가 먼저 응접실의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얼굴조차 넋을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다. 다행히, 디아나에게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뭘?”
“그러니까…… 그때 황태자비 검증에서 너에게 불리한 말을 한 거…….”
트리샤가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디아나를 봤다. 웃어 주길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멀어진 거리에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절대로 내 뜻이 아니었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샤리즈 후작가에 약점을 잡혀서, 그래. 우리 아버지 때문에, 그래서 협박을 받는 신세였어!”
샤리즈 후작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였다. 물론 트리샤가 거짓 증언까지 각오하고 고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그 이후로 황태자비의 시녀가 된 것은 트리샤 본인이었다. 디아나가 그 내막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라도 트리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내 유일한 친구인 너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용서를 구하는 것도 염치없겠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감히 디아나를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디아나는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고 트리샤를 응시했다.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소녀의 모습은 지워지고 어엿한 황실 시녀의 품새가 제법 났다.
“아니야, 트리샤.”
트리샤가 안달이 난 눈으로 쳐다본 지 한참, 디아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황태자비 검증은 네가 아니었어도 같은 결과였을 거야.”
“그래도 네 친구인 내가…….”
친구, 친구, 친구! 그 말이 가장 디아나의 심기를 거슬렀다. 오히려 황태자비 검증에서 트리샤의 수작 덕을 봐서 나았건만, 눈앞에서 친구라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트리샤가 도로 짜증을 돋웠다.
“난 정말 괜찮아. 네가 고의가 아니었을 거라고 믿었어.”
트리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라면 더한 거짓말도 할 수 있었다. 깊은 한숨을 쉬며 안도하는 트리샤가 가증스러운 것과는 별개였다.
“디아나, 넌 정말…… 어디까지 너그러운 거니.”
트리샤가 감격을 숨기지 못하고 디아나에게 다가와서 덥석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은 불쾌했지만, 트리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디아나와 오랜만에 맞잡은 손에 집중해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순간도 마음이 편했던 적 없어. 내가 꼭 널 방해한 것 같아서…….”
“아니야. 아니라는 거, 내가 아니까 됐어.”
“역시, 디아나야.”
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디아나를 봤다. 어린 시절, 하찮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줬던 때와 변한 것 없이,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다워진 디아나의 모습이 눈부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디아나는 여전히 천사처럼 트리샤의 손을 잡아 줬다. 그게 트리샤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트리샤는 이 우정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그럼, 나 용서해 주는 거야?”
“그래.”
그 말에 트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줬다.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결국 트리샤가 얻고 싶었던 것은 면죄부였다. 멋대로 일을 저지르고 멋대로 용서받으며 자신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거다.
“그동안 더 예뻐진 것 같아.”
“너도 좋아 보여.”
트리샤는 디아나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머쓱하게 웃을 뿐이다.
“황실 시녀가 돼서 좀 나아졌어. 물론 황실은 마음 편할 날이 없긴 해도…… 나 황태자비 전하의 개인 시녀거든. 실제로 단둘이 있을 땐 반말을 쓸 정도로, 날 친구라 생각하셔.”
트리샤가 자못 우쭐대는 표정을 숨기려 애쓰는 게 보였다. 디아나는 참지 못하고 픽, 실소를 뱉었다. 트리샤는 그 웃음의 의미도 읽지 못한 채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