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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8화 (108/184)

108화

에드윈이 측근만 대동한 채 사냥에 나섰다. 황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사냥터 따위가 아닌 진짜 거친 산세를 말로 달리는 사냥이었다. 수도에서 사냥이란 여러 명의 수고가 들어가는 일종의 유희였지만, 에드윈은 선대 대공인 아버지로부터 북쪽 땅의 사냥 방식을 배웠다.

“전하, 그쪽으로 갑니다!”

딜런의 외침에 에드윈의 시선이 사냥감을 향했다. 에드윈은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도망치는 사냥감을 응시했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사냥감이 달아날 길, 모든 것이 변수였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에드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때가 되면 절로 숨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가 활시위를 놓을 때였다.

허공을 가른 에드윈의 화살이 사냥감의 목을 푹, 관통했다. 기다리고 있던 딜런이 손수 목숨이 끊긴 사냥감을 들고 에드윈의 곁으로 말을 몰아왔다.

“이 정도면 할당량은 다 채운 것 같습니다만.”

딜런이 뒤를 흘깃 바라봤다. 하인이 끌고 있는 수레엔 목에 화살이 박힌 하얀 여우가 몇 마리 더 쌓여 있었다.

“전하께서 아끼시는 분의 체구가 전하만큼 크신 것이 아니라면, 외투를 만들고도 남을 겁니다.”

그 말에 에드윈이 딜런을 노려봤다. 이 사냥의 목적은 딜런의 말처럼 디아나를 위한 외투를 만들기 위한 재료의 수집이었다. 마침 이 시기엔 북쪽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여우들이 수도 가까이 침엽수림까지 내려왔다.

대공인 에드윈이 줄 수 있는 선물은 무수했지만, 디아나에게 줄 선물은 자신이 직접 공을 들이고 싶었다. 딜런도 그 속셈을 뻔히 알기에 저리 밉살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딜런, 내 손에는 아직 무기가 있다만.”

“그래서 자제하는 중입니다. 달아나는 여우의 목만을 노려서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루모스 기사단을 통틀어도 없을 테니까요.”

이번 사냥의 목적이 특별한 만큼, 에드윈은 가죽에 최소한의 손상만 줄 수 있도록 목만을 노렸다. 말이 쉽지, 달리는 말에 탄 채로 빠르게 달아나는 사냥감을 향해 풍향과 풍속까지 고려해서 단 한 순간에 결판을 내야 했다. 모든 방면에서 출중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루모스 기사단의 주인인 거다.”

“……반박할 여지가 없군요. 하지만 그런 전하께서 여기 오래 머무시면, 내년엔 하얀 여우의 씨가 마를 겁니다.”

이번에는 에드윈이 반박의 여지를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에드윈은 자신이 사냥한 여우들을 확인했다. 눈처럼 빛나는 탐스러운 털을 직접 만져 보고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군.”

“전하, 솔직히 이런 건 황실에서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것이지.”

에드윈이 슬쩍 턱을 치켜들었다. 황실 사냥터에서 개들을 풀어 놓고 남들이 몰아 둔 사냥감을 죽이는 것 따위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이 입을 것이니, 아무리 신경을 써도 부족하다.”

딜런이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의 주군을 응시했다. 에드윈이 본래 뻔뻔한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런 낯간지러운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참, 신기한 일이지. 무엇을 해 줘도 부족한 기분이 들어.”

그 말을 하는 에드윈의 흑안은 진지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전하께서요?”

에드윈은 방계 황족이자 대공이었다. 그의 출중한 기량은 애초에 루카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즉, 감히 이 제국에서 최고의 사내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만은 디아나를 만나고 사라졌다. 누가 그랬던가, 안고 있어도 부족하다고. 아마 무엇을 한대도 디아나를 두고는 부족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 여인에겐 별 관심을 안 두시는 줄 알았는데.”

“여인에겐 여전히 관심이 없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그랬다. 사내들은 여러 여인을 거느릴 수 있었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수도는 향락을 즐기기 좋은 장소였다. 모두의 선망을 받는 대공이 어느 여인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게 의문스러웠는데 이렇게 되니 또 모를 일이었다.

“디나가 특별한 사람인 것이지.”

뜻밖의 애칭에 딜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분이 대단하신 것은 인정합니다.”

에드윈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증명됐다.

“그렇지? 그리 아름다운 사람은 또 없을 거다.”

딜런의 말뜻을 오해한 에드윈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그를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아직 에드윈의 손에 활이 들려 있어 딜런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이 제국의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곧은 심지를 가졌지.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다. 그리 특별한 사람을 다신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워낙 위압감을 줘서 그렇지, 이건 다분히 팔불출다운 발언이었다. 물론 카를가의 영애가 제국에서 최고의 미인이란 소문은 파다했지만, 에드윈이 푹 빠진 것은 미모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 아끼시는데 비로 들이지 그러십니까.”

“그럴 생각이다, 언젠가는……. 그래, 디나가 허락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허락……이요?”

언제부터 대공비가 되는 데 본인의 의견이 중요했단 말인가. 게다가 둘은 이미 서로 마음을 확인한 사이다. 혼란을 느끼는 딜런과 달리 에드윈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전에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다더군.”

“그걸…… 전하께서 인정하셨다고요?”

딜런의 황당한 목소리에 에드윈이 못내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가 원한다면, 내가 빼앗을 수는 없지.”

평생 에드윈의 곁에 있어서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딜런의 오산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그녀는 내 것이니까.”

그나마 에드윈다운 말이었다. 딜런은 복잡한 마음으로 말의 머리를 돌렸다. 지금 에드윈의 모습은 루모스 기사단에서 가장 많은 연인을 가졌던 딜런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딜런이 제 말을 에드윈의 말 곁에 붙이며 물었다.

“도대체 그런 특별함은 언제 알 수 있는 겁니까?”

그런 딜런을 보는 에드윈의 눈빛이 가소로웠다. 그는 루모스 기사단에서 가장 스캔들이 많고 실제로도 무수한 연인을 지닌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실연으로 상심한 기사들에게 늘 여인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조언을 하곤 했다.

“설명해도 모를 거다.”

“예? 지금 절…… 무시하시는 겁니까?”

특별한 사람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빛을 느끼듯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깨닫듯이, 저절로 존재한다. 그다음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맞혔다.”

에드윈이 짓궂은 미소를 지은 후에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어차피 이 마음은 세상의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에드윈과 디아나 단둘의 마법이었다.

***

갑작스러운 황후의 호출에 잔뜩 긴장한 트리샤가 예를 올렸다. 황후는 가느다란 파이프에서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붉은 입술 사이로 다시 흘려보내기를 반복했다.

“지난번 네 처방이 꽤 쓸 만하더구나.”

“황공하옵니다.”

트리샤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췄다.

“모니카, 이 아이의 출신이 어쨌다고 했지?”

아직 황후에겐 트리샤의 신상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이 깊지 않았다. 무수한 궁인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녀장인 모니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트리샤를 위아래로 훑었다.

“전에 이 아이가 말한 대로, 모친이 약초를 써서 생계를 꾸린 게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황실이었다. 트리샤가 고한 말을 그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 트리샤의 재능이 쓸모 있다고 생각한 황후가 따로 알아본 것이리라.

“대외적으로는 약초를 가공해서 약재상에 공급했지만, 암암리에 따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더군요. 꽤…… 효과에 대한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렇다는구나. 사실이냐?”

황후의 눈초리가 트리샤를 향했다.

“예,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흐음, 황후가 묘한 소리를 흘리며 트리샤를 위아래로 훑었다. 꽤 편리한 재주였다.

“지난번 네가 처리한 일이 마음에 들었다. 쓸모가 있었어. 전의들은 죄 고지식해서 정작 필요한 구석은 긁어 주지 못하는 때가 많으니…… 쯧.”

황실의 전의들은 모두 아카데미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민간요법을 불신했고, 특히나 황실의 여인들이 필요로 할 만한 어두운 방면의 일엔 어두웠다. 그건 헤렌 제국 황실이 대대로 여인의 간섭을 막으려 일부러 그리 놔둔 것인데, 현재 황후가 실권을 잡았으니 상황이 바뀌었다.

“국혼도 치렀으니, 하루라도 빨리 후사가 생기면 좋겠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그야, 당연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지난 사건에서 얻은 것도 있어. 성가셨지만, 어쨌든 황태자가 후계를 생산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뜻이 되지.”

황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었다. 트리샤에겐 지금 상황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 시침 시녀가 잉태한 것도 루카스의 핏줄이었다. 그건 억지로 지워 버리고 새로운 후계를 위해 이리 서두르는 황후의 모습은 퍽 아이러니했다.

“이미 품은 것을 떨어트릴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한가?”

“반대라…… 하오시면?”

“황태자비의 회임을 촉진할 방도가 없냐는 거다.”

이제 막 국혼을 치렀는데, 자연히 기다려도 될 것을 굳이 재촉하는 황후의 성미가 무척 급했다.

“그것은…….”

트리샤가 말을 흐렸다. 임신을 촉진하는 마법 같은 약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건강인데 그것은 지금 전의들이 올리는 약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것으로 모자란 것이다. 그건 트리샤가 잡아야 할 기회이기도 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아기집을 튼튼히 하도록 돕는 약재들이 있습니다. 본래 잉태가 되더라도 초기엔 불안정하니 그것을 꼭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호오.”

황후가 자욱한 연기를 뱉었다.

“그럼 준비해 봐라. 모니카, 그것을 시험할 자들을 준비해 두고.”

뭐든 황족의 몸에 바로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먼저 안정성과 효과를 검증할 시험 대상이 필요했다.

“어디, 그러면…… 내 너에게 특별히 휴가를 내어 주마.”

이 대화는 비밀이라는 뜻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가서 준비를 해 오라는 뜻이기도 했다.

“황태자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폐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래, 앞으로 네 쓸모를 봐서 상을 내릴 테니 재주를 부려 봐라.”

“황공하옵니다.”

트리샤가 다시 한 번 황후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모니카, 이 아이에게 넉넉한 은화와 마차, 시종을 딸려 보내라.”

파격적인 대우였다. 트리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서 공손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에서 내어 준 마차와 시종이라니, 예전의 트리샤로선 꿈도 꿀 수 없었던 호사였다. 그러니 수단은 만들어 내면 된다. 트리샤의 야망이 어느 때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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