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반 테스 공작저에 마차가 멈췄다. 딜런이 먼저 내려서 에드윈을 부축하려 했지만, 에드윈은 쳐다도 보지 않고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의회에 가는 것도 아닌데 둘 다 정복을 입은 채 잔뜩 경직된 태도였다.
“여긴 언제 와도 숨이 막히는군요.”
딜런이 침묵을 깼다. 반 테스 공작저는 황실과 의회를 움직이는 그림자의 실세가 있는 곳이었다. 사적으로는 에드윈의 외조부였지만, 그도 이 무거운 공기를 부정하진 않았다.
“새삼, 전하가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날 따라오겠다고 자처한 게 누구더라?”
“열병식 훈련보다는 나을 줄 알았죠.”
픽, 에드윈이 웃자 그나마 무거운 공기가 좀 누그러졌다.
“게다가 열병식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이 따로 있어서요.”
“아, 혈기왕성할 때지.”
루모스 기사단원의 영광스러운 업적 중 하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기는 완벽했다. 굳이 에드윈의 측근인 딜런까지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전 전하의 호위를 위해 여기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대부분은 딜런처럼 드노아 경과 만나는 것을 꺼렸다. 세월이 흘러 노쇠했음에도 사람을 꿰뚫어 보는 안광이나 등 뒤로 서린 묘한 위압감은 절로 상대의 숨이 막히게 했다. 그건 동물적인 감각에 가까웠다. 드노아 경의 안광은 마치 맹수와도 같았으니 딜런처럼 단련해서 상대를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피하기 마련이었다.
“왜 아니겠나.”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이곤 미리 전갈을 보낸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권력에 눈이 먼 어리석은 자들은 드노아 경의 실체를 모를 것이다.
그들에겐 권력의 중추이자 정치를 틀어쥐고 있는 실세까진 보여도 늘 살기를 머금고 상대를 꿰뚫으려는 드노아 경의 본성까지 보이진 않는 것이다. 하긴, 권력에 눈이 멀어서 돈을 갖다 바치는 이들은 어리석기 마련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근엄한 시종장이 고하는 것을 확인한 에드윈이 응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또한, 딜런 이상으로 감각이 발달한 사람이다. 드노아 경은 자신의 외조부였지만, 단 한 번도 그를 가깝게 느낀 적은 없었다. 드노아 경도 에드윈의 자질을 일찍이 간파하고선 절묘한 균형과 거리를 깨지 않았다.
“이런, 이런…… 늙은이를 보러 대공 전하까지 행차하실 필요는 없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에드윈이 드노아의 너스레를 일축했다.
“그래, 대공저에는 별고가 없으신지?”
“예. 공작님 덕분에 모든 것이 평안합니다.”
에드윈은 어린 시절 이후로 드노아 경을 꼬박 존칭으로 불렀다. 드노아 경도 딱히 에드윈에게 할아버지로 불리고 싶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혜가 필요한 일이라서요.”
“그것은 대공저의 선대공비 전하도 마찬가지일 텐데.”
묘한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에드윈은 선대공비를 설득할 구실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을 테니까.
“대공가를 확실히 해 둬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스터가의 영토는 북쪽에 있고, 수도에서 살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공인 제가 마땅히 돌봐야 할 일이지요.”
“헌데, 체스터가의 일을 왜 내게…….”
“그만 놀리십시오.”
에드윈이 선을 긋자 씩, 짓궂은 미소가 드노아의 입가에 피었다. 노인인데도 마치 소년 같은 미소였다.
“하도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와 모처럼 놀아 주려는 것도 모르고, 쯧.”
“제가 그럴 나이는 아닙니다만.”
재미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드노아가 자리에 앉았다. 에드윈도 그 곁의 의자에 앉아 제 외조부를 바라봤다. 그의 완고한 옆얼굴은 그레이스를 연상시켰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아무리 자라도 네가 내 손자인 건 변함없어. 그리고 부모 마음도 마찬가지지.”
드노아는 이미 에드윈의 목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에드윈의 성미엔 정면 돌파가 어울렸다.
“예, 어머니는 제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아시죠.”
“너를 걱정하는 게야. 또한 네 아비도 북쪽 땅에서 죽었으니…….”
끌끌, 드노아가 제 딸의 가련한 처지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저까지 북쪽 땅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건 제 것입니다.”
드노아가 말없이 에드윈을 주시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제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드러내 놓고 언급한 적은 없지만, 드노아는 성마른 스텔라보다 차분하고 계략에 능한 그레이스를 총애했다. 그건 대를 거쳐도 마찬가지인지 어려서부터 유약했던 루카스보단 이 건장한 손자에게 더 기대가 컸다. 과연, 에드윈은 그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모습으로 드노아의 눈앞에 있었다.
“북쪽으로 가서 영토선을 정비해야겠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제 땅을 보지 않고선 무엇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대공이라 할 수도 없겠지요.”
“날 설득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다.”
드노아가 천천히 입을 뗐다.
“하지만 네 어미를 설득하는 일은 내가 맡아 달라…… 그런 어리광을 부리러 온 게지?”
“예.”
에드윈은 과감하고 솔직했다. 사내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드노아는 장성한 손자를 보며 이번만큼은 조금 물러지기로 했다.
“쯧쯔,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여인인지라 두려움이 많아.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선대공비인 그레이스를 이르는 말이었다. 아무리 드노아라도 이번 일을 설득하는 건 성가신 일이었다.
“오랜만에 손자의 재롱을 본 셈 치시고 도와주시죠.”
“이젠 강요까지.”
그러나 뻔뻔한 에드윈을 보는 드노아의 표정에 흐뭇함이 서린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가만 보니, 너는 나를 닮았군?”
“그렇습니까?”
에드윈은 곧 죽어도 인정은 하지 않았다.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드노아의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에드윈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 저택의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늙은이를 이용만 하다니, 참으로 무정하구나.”
“그럴 리가요. 공사다망할 뿐입니다.”
드노아가 자신의 손자를 대상으로 약간 무른 감은 있었지만, 이 또한 그의 이권에 필요한 부분이었다. 에드윈이야말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았다. 북쪽의 영토를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이 줄어들 수도 있다. 선대가 죽고 시간이 꽤 지났으니 에드윈이 다시 자리매김을 할 때였다. 즉, 드노아는 선심을 쓰는 체하며 제 실속도 챙기는 것이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에드윈이 짧은 인사를 끝으로 드노아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허어…….”
드노아의 묘한 한숨이 남았다.
“또 이렇게 저울이 기울면 곤란한데 말이다.”
드노아의 머릿속에서 두 손자를 둔 치밀한 체스판의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오늘도 오웬과 공작령에 대해 논의를 하던 디아나의 집무실에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샬롯이 귀엣말을 했다. 디아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웬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샬롯이 몰래 가져온 쪽지를 건넸다.
“언제 이런 걸.”
“하…… 말도 마세요. 이젠 그분뿐만 아니라 그분의 측근도 우리 공작저의 담을 넘는답니다.”
샬롯이 목소리를 낮춰 디아나에게 하소연했다. 이 쪽지는 딜런이 직접 툴툴거리며 담을 넘어 집사장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우리 공작저의 담이 이렇게 낮아진 건지. 무엇보다 그레이 집사장이 괴로워해요.”
“주의를…… 줄게. 그레이에게도 전해 줘.”
샬롯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갔다. 쪽지를 펼치자 에드윈의 유려한 필체가 보였다. 오늘부터 기사단의 측근을 이끌고 사냥을 나서느라 오지 못한다는 소식이었다.
“이 한겨울에 사냥을……?”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쪽지를 접어 품에 넣고는 다시 오웬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저어, 차기 공작님.”
“뭐지?”
오웬이 무척 어색한 눈길로 방 끝의 화가를 가리켰다.
“이 상황이…… 좀.”
디아나는 오웬의 설명을 들어야 할 부분이 오면 화가를 불러들여서 포즈를 취했다. 그 상태로 오웬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은 꽤 좋은 생각이라 시간이 많이 단축됐다. 이 효율적인 발상에 나름대로 뿌듯함을 가질 정도인데 어째 오웬과 화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아주 효율적인 상황인데, 뭘.”
말을 마친 디아나가 다시 화가의 모델로 돌아갔다. 오웬은 햇빛을 받으며 인형처럼 앉은 디아나를 보며 차기 공작이 제 예상보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선친을 닮아 영명하고 어질 것이라고 막연히 예상했지만, 실제로 만난 디아나는 훨씬 생동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가끔 엉뚱한 발상을 내놓고 밀어붙이는 저력도 있었다. 군주로선 좋은 자질이었다.
“그럼 아까 말씀드린 부분에 이어서…… 카를의 가신 세력 중 무력을 관장하는 발루아 기사단에 관해서입니다.”
아직 카를 성에선 디아나의 실물을 본 이가 없었다. 그러니 가신의 반응도 완벽히 예측할 수 없었다. 오죽 걱정이 되었으면 모두의 만류를 뿌리친 오웬이 긴 여정에 올랐을까.
“다른 가신들은 몰라도, 발루아 기사단의 복종을 받아 내는 것이 큰 관건입니다.”
아무리 성공한 가문이라도 당대에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유구한 역사와 그것을 함께하는 기사단의 존재였다. 에드윈이 루모스 기사단의 주인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물론, 카를도 유구함에선 체스터가에 뒤지지 않았기에 발루아라는 기사단이 있었다.
“발루아 기사단은 제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훌륭한 기사단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엄격한 기사도를 수호합니다. 굉장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집단이지요.”
그건 바꿔 말하면 여태까지의 관행을 깬 젊은 여성 군주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오웬은 그런 부분이 나올 때면 보수적이라는 단어로 애써 돌려 표현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기사단장은 특히나 그런 성향이 강합니다. 이 늙은이의 말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요.”
오웬이 한탄하듯 덧붙였다. 바로 그 부분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디아나는 슬쩍 무시하기로 했다.
“그놈들…… 이런, 실례. 그들은 작위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오웬이 태연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디아나는 방금 똑똑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꽤 사이가 나쁜 모양이지.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한 위기를 넘겼다.
“유감스럽게도 아론 경께서 공작령을 내버려 두신 탓에 위치가 미묘해진 겁니다.”
하긴, 카를의 사람들 처지에서 생각하면 보이지도 않는 공작의 존재가 그리 대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월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만큼 공작의 존재는 희미해졌을 거다. 디아나도 각오는 했던 부분이다.
“그럼 그들은 무엇에 복종하지?”
디아나가 입을 연 순간, 화가가 몰래 한숨을 쉬었다.
“군주, 그 자체입니다.”
오웬은 명확한 답을 내놨다. 디아나는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침, 내가 하려던 일과 같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디아나는 애초의 각오를 떠올렸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기로 했고 공작이 되고자 한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제 디아나는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