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까무룩 잠이 들었던 디아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에드윈의 너르고 따뜻한 품에서 눈을 뜨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 마주 웃어 주는 에드윈은 아까부터 내내 제품에서 잠든 디아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 잠들었었어요?”
“그래, 어린아이처럼 이도 갈고 코도 골더군.”
“거짓말.”
디아나가 툭, 에드윈의 가슴을 치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난 거짓말엔 소질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좋아요.”
솔직한 디아나의 말에 에드윈은 자상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넘겨 줬다.
“디나, 그대의 머리카락은 봐도 봐도 신기해. 은은한 달빛에 형태가 있으면 이런 빛일까.”
이젠 에드윈이 부르는 애칭이 제법 익숙해졌다. 둘만의 특별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이름만 들어도 마음에 분홍빛 물이 드는 것 같았다.
“공작 즉위식 날짜가 조정됐다지?”
“그건 저도 오늘 들었는데, 어떻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에드윈은 디아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 그 정보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당사자인 디아나가 신기할 정도였다.
“디나, 그대의 생일에 맞춘 즉위식이라…… 좋은 생각이야.”
디아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어차피 즉위식과 생일이 비슷하게 되니 합쳐서 더 큰 경사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디아나로서도 성가신 연회를 한 번으로 줄일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선물은 기대해도 좋다.”
“아뇨, 이제 전하에게 받기만 할 수는 없어요.”
“내가 준대도. 그리고…… 전하가 아니겠지?”
“그래요, 에드. 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전하가 아니니까, 명령은 듣지 않아도 되겠죠?”
이번에는 에드윈이 한 방 먹었다.
“흐음…… 그래도 이번엔 이미 준비를 마쳐서. 그 대신, 그대도 내게 선물을 주면 될 것 같은데.”
“선물요?”
에드윈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인 에드윈에게 부족한 것은 달리 없을 텐데, 꽤 어려운 제안이었다.
“뭘 드려야 할지…… 생각해 볼게요.”
“아니, 그것도 내가 정했어.”
“……네?”
에드윈은 가끔 뻔뻔했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대의 초상화를 봤다.”
그건 1층의 햇빛이 잘 드는 방에 있었다. 게다가 미완성이었다.
“그대의 집사장에게 눈으로만 보겠다고 약속했지.”
에드윈은 신사적이었다. 하지만 보여 주기 전까진 도저히 자리를 떠나지 않을 기세를 보여 줬다. 그 기에 질린 그레이가 눈으로 보는 것만 허락한 것이다.
“그레이를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안 괴롭혔다.”
에드윈이 슬쩍 디아나의 손을 끌어다가 당겼다. 불리한 일을 회피하는 기술이었다. 그 속내를 다 알면서도 디아나는 매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디아나의 손바닥을 펼친 에드윈이 그 위를 덧그리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가 좋겠군. 화가에게 같은 것으로 그려 달라고 해서 내게 주면 된다.”
“뭘…… 하시게요?”
“그야, 팬던트 안에 달아서 늘 품에 넣고 다니려고 그러지.”
에드윈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연인의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시대였다는 것을 디아나가 잠시 잊은 탓도 있었다.
“그럼 저도 받아야겠어요.”
“그럴 줄 알고 이미 의뢰해 뒀다.”
디아나는 문득 제 연인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측해서 준비하는 것과 디아나에 관한 정보를 본인만큼이나 잘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기, 전하. 대공저의 공무는…… 하시는 거죠?”
“물론이다. 겨울의 끝 무렵엔 북쪽 땅으로 떠나야 할 테니, 그 준비를 시키고 있지.”
그제야 디아나는 정사 이전에 하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맞아, 그거…… 왜 저한테는 숨기신 거예요?”
“숨긴 적은 없는데.”
“어쨌든 모르게 두신 거잖아요. 전하도 저와 함께 북쪽으로 갈 거라는 것을.”
에드윈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뚜렷한 흑안이 디아나를 꿰뚫을 듯이 바라봤다.
“그럼, 설마 그대를 혼자 보낼 거라고 생각했나? ……내가?”
“그렇게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줄은…… 네, 몰랐죠.”
흐음, 에드윈이 애매한 소리를 흘리고는 이내 눈을 감은 채 디아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이럴 때는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사람의 속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꼭 맞았다. 디아나는 에드윈을 알아 갈수록 몰랐던 면모를 하나씩 발견하고 있었다. 그게 타인에서 우리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그의 새로운 면모가 싫었던 적은 없으니까.
“앞으로는 그 철저한 준비성을 저와 공유해 주실래요?”
“……노력은 해 보지.”
물론 가끔 얄밉긴 했다. 디아나는 제 마음을 담아서 톡, 에드윈의 이마를 두드렸지만, 그는 여전히 모른 체 눈을 감고 있었다.
“과연, 디나 그대가 따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밉살스러운 말을 하며 능청을 떠는 에드윈을 디아나가 곱게 노려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야속한 동이 터 올 것이다. 체온을 겹치고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짧아서 늘 아쉽고, 비밀이라서 더 달콤한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
트리샤는 비비안의 잠자리를 돌봐 준 후에 제 처소로 돌아왔다.
비비안이 황태자비로서 자리를 잡자 바로 트리샤의 대우도 달라졌다. 일반 시녀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개인 처소가 그 증거였다. 사실 트리샤가 평생 처음으로 가져 본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어디 갔지? 밥 먹을 시간이야.”
트리샤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가구는 단출했지만, 황실의 것이니만큼 제각각 품위가 있었다. 트리샤 본인의 짐이 적은 탓에 방이 꽤 크게 느껴졌다. 트리샤는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살피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곤 바닥에 엎드렸다.
“또 숨었구나. 아직 아기라 겁이 많은 거지?”
트리샤가 바닥에 엎드린 채 침대 밑의 공간을 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웅크린 파란색 눈동자가 트리샤를 조심스레 살피더니 몇 걸음 기어 나왔다. 루카스가 하사한 문제의 털 뭉치였다. 비비안은 이제 그 털 뭉치를 무서워하진 않았지만, 딱히 정을 주지도 않았다.
“이리 나와. 너 주려고 우유까지 얻어 왔어.”
꼬물거리는, 아직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새끼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트리샤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장거리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우유를 핥아먹는 고양이를 보며 트리샤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트리샤는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워낙 동물을 좋아했다. 게다가 동물들도 트리샤를 곧잘 따랐다. 사납기로 유명한 이웃의 말을 달랜 덕분에 저녁거리를 얻은 적도 있었다.
“그래, 착하지. 많이 먹고 빨리 자라라.”
새끼 고양이는 우유 그릇에 코를 박은 채 연신 할짝거렸다. 본래라면 어미 곁에서 보살핌을 받을 때인데, 무리하게 무역선에 실어서 공물로 가져왔으니 가엾은 일이다. 작은 동물들이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결과, 저 새끼 고양이는 어미와 형제를 잃고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괜찮아, 어떤 가족은 없는 게 더 나으니까.”
트리샤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그건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아직도 마음 한구석엔 블랑가의 쾨쾨한 곰팡이가 슬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싫어서 트리샤는 일부러 가족에 대한 일을 떠올리거나 끄집어내지 않았다.
집안의 일은 샤리즈 후작이 돌봐 주기로 했고, 어머니는 디아나가 귀족의 요양 시설에 보냈다. 굳이 트리샤가 그 꼴을 마주 보고 무언가를 할 이유는 없었다. 트리샤는 아직도 구질구질한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환상이 깨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넌 나랑 닮았어. 그렇지?”
어느새 우유 접시를 다 비운 고양이가 트리샤 앞을 알짱거렸다.
“물론 네가 더 귀엽지만.”
트리샤는 사람보다 동물을 대하는 게 더 편했다. 그들을 상대로는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가식을 떨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사람보다 동물이 가식을 더 잘 알아채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서로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배가 빵빵해졌네?”
워낙 작은 새끼라 그런지 금세 배가 꺼지고 금세 배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곧 트리샤가 잠자리에 누우면 침대로 올려 달라고 낑낑거린 후에 트리샤와 고개를 맞대고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표정으로 잠이 들 생물이었다.
“이런…… 난 네 주인이 아닌데.”
트리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손에 부벼 대는 새끼 고양이의 몸짓을 거부하지 않았다.
“사실, 너도 나도 황태자비전에 속한 부품일 뿐이란다. 그냥, 소유물이지.”
다분히 자조적인 말이었다. 샤리즈 후작가에서 꿈꿨던 황실의 생활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비비안은 단둘이 있을 때면 여전히 친근하게 말을 걸어 줬지만, 남들이 볼 때 트리샤는 비비안의 시중이나 드는 시녀에 불과했다.
비비안 또한 공석에서는 황태자비로서 처신했다. 즉, 시녀를 친구처럼 대하는 교양 없는 행동을 삼간 것이다. 비비안으로선 옳은 처신이었다. 하지만 그게 트리샤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비비안이 잘 해냈기에 트리샤가 이렇게나마 제 공간을 누릴 수 있고, 황실에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 트리샤의 공은 어디에도 없다.
“걱정하지 마, 비비안은 널 싫어하는 것 같지만…… 넌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 하사하신 거니까, 어쩌면 나보다 나은 신세야.”
황태자가 하사한 것은 종이 한 장, 심지어 길가의 돌멩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하사품은 그것을 내린 웃전의 신분과 같이 고귀하게 다뤄야 하는 게 황실의 법도였다.
그것은 이 새끼 고양이에게도 적용됐다. 하녀들이나 일반 시녀들은 이 고양이에게 감히 손도 댈 수 없었다. 루카스의 사냥개들이 아무리 패악을 부리고 다녀도 다친 하녀가 사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 이리 온.”
트리샤가 손을 뻗자 고양이가 익숙하게 그 위로 올라왔다.
“그래, 착하지.”
트리샤는 고양이를 든 채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차피 올려 달라고 낑낑거릴 테니 처음부터 함께 잠을 청할 작정이었다.
“넌 정말 예쁘구나.”
트리샤가 하얀 털을 쓰다듬었다. 눈처럼 새하얀 털은 너무 부드러워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무엇보다 구슬처럼,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빛의 눈동자는 한번 바라보면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비밀인데, 이 황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너일 거야.”
트리샤가 가만히 속삭이며 고양이를 간질였다. 비비안은 만들어진 황태자비였다. 타고난 소양이 좋아도 최고는 아니었고 그 나머지를 메우기 위해 평생 부단한 노력을 했다.
“너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지. 그게 설령 황태자비라고 해도…… 한참 부족해.”
그래. 처음부터 모든 것을 타고난 디아나와는 달랐다. 어떤 것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어떤 것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디아나가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나 그 눈동자에 깃든 투명한 영혼이 그랬다.
“벌써 잠들었니? 귀여워라.”
트리샤가 잠든 고양이를 내려 보며 머리맡의 램프를 껐다.
“예쁜 꿈 꾸렴, 디나.”
트리샤는 눈처럼 하얗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의 이름을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