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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4화 (104/184)

104화

오웬은 가장 먼저 공작령의 지리와 중요한 시설, 공작가를 섬기는 가신들의 가문에 대해서 가르쳐 줬다.

디아나는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집중해서 오웬의 말을 들었다. 카를 공작령이 그려진 지도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가신들의 이야기는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제가 있는 어거스트 백작가는 물론, 차기 공작님의 편입니다.”

나머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카를 영지에 남은 가신들은 대대로 유구한 역사와 함께 공작가를 섬겼던 핏줄입니다.”

“즉, 내가 제대로 된 공작이 되면 날 섬길 거란 뜻인가.”

“역시 영명하십니다.”

권력에 대한 사리사욕이 있거나 정계에 뜻을 둔 자들은 이미 북쪽 땅을 떠나서 수도에 자리를 잡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카를에 남아 가신의 위치를 지켜 온 자들이라면 마땅히 나름대로 신념이 있을 것이다.

“선대께선 항상 카를의 부흥에 대해서 힘을 쓰셨습니다만, 아론 경께서는 아무래도…….”

오웬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아론이 그에게 잊지 못할 고통스러운 경험을 준 모양이다.

“저는 단순히 선대의 자제분이라는 이유로 차기 공작님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무척 깊었다. 눈가에 진 가느다란 주름들은 모두 옳은 답을 찾기 위해 고뇌했던 세월의 흔적이었다. 과연, 제국에서 몇 안 되는 현자의 칭호를 받은 자였다.

“그럼 뭐지?”

“차기 공작님께서, 선친의 유지를 잇기 위해 보여 주신 의지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여태 오웬이 아론의 무심한 통치를 손 놓고 지켜봤던 건 설마 옛날에 봤던 그 어린 영애가 공작이 되려 할 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현자라도 그것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선친의 작고 후,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공공연한 소문도 한몫했다.

“모두를 실망하게 할 생각은 없다.”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 연구 외에는 온통 무심해서 공작령을 돌보지도 않았던 아론의 뒤를 이어 찾아온 공작이 아직 어린 여성이라는 것에 이미 실망한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박혀 있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디아나가 바꿀 수 있었다.

“난 단지 명예나 내 몫을 찾겠다는 욕심으로 공작이 되려는 게 아니야.”

“그리 말씀해 주시니 이 늙은이로선 기쁠 뿐입니다.”

“물론 그대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난, 공작의 의무를 다할 마음이니까.”

빙그레, 오웬이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면 이제부터 더 본격적인 걸 배우셔도 좋겠군요.”

“……으응?”

오웬의 호박색 눈동자가 차기 공작의 가능성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아론에게 역으로 교육당했던 회한까지 모조리 디아나를 가르치며 풀어 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디아나는 어쩐지 기쁘면서도 기쁘지 않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선 묻겠습니다. 차기 공작님께선 카를의 공작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선친이 그러셨듯이 카를 공작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건 절반만 정답입니다.”

디아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디아나는 카를의 후계자였고 아론의 협조로 곧 공작위에 오른다. 공작 즉위식은 헤렌 제국의 황실에서 주관할 것이고 더 필요한 절차는 없었다.

“내가 제국의 인정을 받아 공작위를 상속하는 것 외에 뭐가 더 필요하지?”

“바로 그 마음을 버리셔야 합니다.”

갈수록 알기 어려운 말이었다.

“차기 공작님께선 이곳 수도의 공작저에서 오랜 세월 영애로 살아오셨지요. 그러나 그것은 본래대로 따지자면 앞뒤가 바뀐 것과 같습니다.”

만에 하나, 선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오웬이 직접 카를로 데려갔을 거다. 이곳 수도엔 황실과 의회와 사교계가 있었지만, 진정한 공작은 저택 따위가 아닌 성에서 자라는 게 맞았다.

“카를에선 공작이 군주입니다.”

오웬의 한 마디가 디아나를 일깨웠다.

“그곳의 땅과 백성을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이죠. 그리고 각각의 군주가 황실에 충성을 맹세했을 뿐…… 카를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카를가의 군주여야 합니다.”

디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오웬의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수도에선 모든 것이 황실을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공작령에선 공작이 왕이다. 어디를 중심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여태 디아나는 수도와 황실을 중심으로 단순히 공작위를 받는다고 여겼지만, 카를에선 새로운 왕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차기 공작님의 탓이 아닙니다. 세태가 많이 바뀐 탓에, 대부분의 군주가 이곳 수도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예전엔 아니었나?”

“선친께서 젊으실 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문마다 다릅니다. 아직도 제 영지를 지키는 군주가 있는가 하면, 몇 대에 걸쳐서 자신의 영지를 밟아 본 적도 없는 가문도 있죠.”

오웬이 늙은 몸으로 무리해서 먼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성장한 디아나를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수도에서 자란 디아나의 시야를 짐작했을 것이다. 오웬을 미리 만난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전혀 다른 세상처럼 들리는군.”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니, 솔직히…… 북쪽의 사람인 제게는 이 수도가 그리 느껴지는걸요.”

“아, 그럴 수도. 그렇게 많이 다른가?”

“예. 겨울의 가혹함부터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까지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미리 경계하실 것은 없습니다. 이제 차기 공작님의 백성이고, 막상 가서 보시면 아실 테니까요.”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의 선친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다. 비록, 부모라는 체감이 쉽게 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인망과 그로 인해 디아나가 받을 수 있었던 유산은 제법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차기 공작님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예. 북쪽은 사교계라고 칭할 정도로 거창한 모임도 없고, 드레스 같은 사치품도 드물지요. 수도의 수준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디아나가 푸른 눈동자를 들어서 오웬을 응시했다. 여태까지의 온화함이 모두 사라진 그저 투명하기만 한 눈동자였다.

“아직도 날 시험하는군.”

디아나의 강한 눈빛엔 선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웬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오웬이 수북한 수염을 민망한 듯 쓸어내렸다. 막상 마주한 디아나는 오웬의 상상보다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방문한 수도는 자신의 기억보다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카를 공작저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혹시라도 디아나가 북쪽의 투박함과 소박함에 질릴까 봐 내심 걱정된 것도 사실이다. 디아나가 아직 너무도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더욱.

“난 그따위 것들에 미련을 갖지 않아.”

디아나의 말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제야 오웬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항상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수도에서 불행히 지내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왔을 텐데 유감입니다…….”

황실에서 보냈던 지난 기억은 아팠다. 지금은 벗어났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었다. 디아나는 아예 모든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수도를 떠나길 원했다. 물론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카를 공작저에 정이 들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행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리고 한 가지, 강력하게 디아나의 마음을 붙드는 존재도 있었다. 에드윈이었다.

아마 에드윈은 디아나가 이렇게 빨리 북쪽으로 떠날 생각을 하는 줄 모를 것이다.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너른 품에 안기면 잠시 머리 아픈 일을 잊고 싶기도 했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도 두려웠지만, 대공인 그가 자신의 책무를 저버리고 디아나를 쫓아오는 것도 두려웠다.

사실, 에드윈의 행동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디아나의 곁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결국 디아나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힘겨워하는 연인을 보게 될 테다.

“오늘은 이쯤 해 두고…… 한 가지 당부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디아나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주의 비밀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오웬은 에드윈의 존재를 몰랐다. 하지만 디아나의 반짝이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서 막연히 넘겨짚을 수는 있었다. 디아나는 누군가의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현자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산 노인으로서의 지혜였다.

“그럼, 늙은이는 이만 지친 몸을 쉬러 가겠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디아나를 두고 예를 갖춘 오웬이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엔 디아나의 고민이 고였다. 비밀 언약을 맺고 연인이 된 것은 행복 그 자체였고, 디아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확실치 못한 남녀관계는 큰 치부가 된다. 그것이 개인이 아닌 군주라면 더욱.

또다시 어려운 결정이 디아나의 앞에 놓였다. 디아나는 손을 뻗어 오웬이 펼쳐 뒀던, 곧 자신의 것이 될 영토가 그려진 지도를 매만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여태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글씨를 봤다.

“이런…… 일이…….”

눈을 다시 뜨고 봤지만, 글자는 또렷했다. 카를가의 땅보다 훨씬 광활한 영토엔 유려한 필체로 ‘체스터 대공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디아나는 그제야 에드윈이 앞으로의 구체적인 행보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이번에는 디아나가 너무 앞서가는 줄 알았는데, 결과는 에드윈이 한발 빨랐다.

“아니, 내가 너무 바보 같은 건가.”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이상했다. 공작이 되면 당연히 공작령으로 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것을 에드윈도 잘 알 텐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지, 어쩌면 그도 자신처럼 먹먹한 마음이 큰 건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래.”

디아나가 묘한 웃음을 뱉었다. 에드윈의 흑안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드윈의 시선은 항상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미래의 디아나까지.

“그래야 그 사람이지.”

에드윈은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고선 일부러 디아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디아나가 그에게 갖는 일말의 죄책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에드윈은 결코, 디아나를 놓지 않는다. 디아나는 새삼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었다. 아직은 헤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 적어도 아직은 이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 있다면 디아나는 기꺼이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

지난 인생이 남긴 교훈은 많고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디아나 자신이었다.

“착한 아이가 될 필요는 없어.”

처음, 이 책에 들어왔을 때는 막연히 달라지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고 순종했다. 자신은 원작의 디아나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맞서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고귀한 부인이 될 필요는 더욱…… 없지.”

감정을 억누르고 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황후로 살았던 생에서 루카스는 자신의 몸에 올라타면서 트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남은 것은 피폐해진 마음과 버석거리는 영혼이었다.

고통은 충분했다. 디아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삶을 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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