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2화 (102/184)

102화

디아나는 햇빛이 비치는 곳에서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모습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머리를 스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그림자가 조금 기울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 안 되겠어.”

디아나가 간신히 참았던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디아나를 관찰하고 있던 화가가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는 내일 하지.”

“예.”

화가는 못내 아쉬운 눈길로 자신의 완벽한 모델을 보다가 문을 나섰다. 디아나는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면서 답답했던 몸을 풀었다. 새로운 공작이 되기 전에 제대로 된 초상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옳았지만, 그게 이렇게 어려운 것일 줄은 몰랐다.

“아가씨, 아직 완성까진 한참 남았는데요.”

“적당히 얼굴만 그리고 나머지는 화가들이…….”

“그럴 수는 없지요. 이게 어떤 초상화인데요.”

샬롯의 단호한 말에 디아나가 한숨을 쉬었다. 현재의 공작저에도 선친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여태까진 당연히 생각했던 것인데 이젠 디아나의 초상화를 걸어야 했다. 그리고 그 초상화의 실제 크기는 디아나 본인의 몸집보다 컸다.

“그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세요.”

헤일리 부인이 공작 즉위식을 위해 만든 드레스는 위엄과 우아함을 두루 갖췄다. 목을 감싼 끈 아래로 반투명한 목 장식이 마치 다이아몬드 목걸이처럼 만개했고 드러낸 맨어깨의 선은 디아나가 원했던 과감함이 있었다.

평소 즐겨 입던 푸른색보다 한층 짙은 푸른색이 디아나의 성장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염료의 값이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황실에서 쓰는 초상화가와 카를가에서 쓰던 초상화가가 달라서 다행이에요.”

“아, 그랬던가?”

“네. 국혼을 치른 후에 새로운 황태자 전하 내외의 초상화를 그린다고 난리라던데요.”

샬롯은 은근히 국혼이 잘 성사됐음을 귀띔했다. 디아나도 그 의미를 읽고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새 황태자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디아나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어떤 자리를 원하느냐는 다른 것이다.

“두 분 전하께서 화목하시다면 이 제국의 기쁨이지.”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악몽 속에서 발목을 옭아매는 루카스의 늪 같은 집착에서 드디어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서로의 인연이었는지 모른다. 이제야 퍼즐의 잘못된 조각을 바로잡은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제롬 경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디아나에겐 남은 퍼즐이 또 있었다. 루카스를 제거해도 트리샤가 남는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트리샤는 언제라도 과거의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계기는 디아나가 알 수 없기에 미리 대비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내가 경을 기다리게 했군요.”

“아닙니다.”

제롬이 싱긋 웃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시간은 금이니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내가 바라던 바예요.”

초상화도 이렇게 본론만 간단히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나는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품었다.

“트리샤 블랑, 아니…… 사라 블랑에 관한 조사에서 실마리가 좀 나왔습니다.”

디아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계속해요.”

“그때도 말씀드렸듯이 사라 블랑은 출신이 불분명합니다. 여러 근거로 동쪽 땅에서 왔을 거로 추정했지만요. 그 땅에선 불과 몇십 년 전에도 이단 심문이 있었고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 심문은 역사에나 등장하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동쪽 땅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트리샤의 정체를 떠올리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볼 때, 아니 누가 보더라도 마녀라는 정체는 상식 밖이니까.

“전부 추정이고, 그 둘을 연결하려면 증거가 필요했죠. 비슷한 걸 이번에 찾은 것 같습니다. 우리 조사원의 보고로는 그쪽에서 아직 작은 부족 같은 걸 이루고 사는 산 사람들이 있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일이지만, 그다음이 흥미로워서요.”

제롬이 주머니에서 메모를 꺼냈다.

“그대로 읽겠습니다.”

개인적 의견 없이 사실을 보고하겠단 뜻이었다.

“약 30여 명에서 50여 명 사이로 구성된 일족은 가끔 마을에 내려와서 약재와 생필품을 맞바꾸어서 살아가며, 동쪽 침엽수림에서 천막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목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며 무슨 이유에선지 그 땅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

제롬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울렸다. 아무리 사람이 적은 동쪽 땅이라도 그렇게 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척 특이한 점은 일족의 여성 대부분이 붉은 머리카락이라는 것과 남자에겐 그런 형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약초 수집 등의 노동을 해서 생활하고, 남자들은 전혀 생활 능력이 없으며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관찰된다. 이 점은 남성에게만 관찰되는 점이다.”

그 대목에서 디아나가 눈썹을 기울였다. 사라 블랑을 찾아갔다가 만난 니콜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홉 살이라기엔 너무도 부족하고 산만했던 그 모습이 바로 제롬의 보고와 일치한 것이다.

“그 아이, 니콜라도…….”

“예, 저도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물증까진 아니어도 사라 블랑과 그 일족을 연결할 고리가 생기죠. 이런 우연이 흔한 건 아니니까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나 사라를 제외하고 붉은 머리카락을 본 적은 없었다. 제롬 또한 그 머리 색이 흔치 않다고 했다. 게다가 성이 없고 동쪽 땅의 기법으로 가공한 약재를 팔아 온 사라 블랑, 무슨 이유에선지 지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니콜라의 모습…… 모두 제롬이 조사한 내용과 일치했다.

“저는 그 일족이 어떤 종교 집단일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근거……는요?”

디아나는 이미 트리샤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제롬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제롬의 의견이 중요했다. 다른 이들에게도 그 정체를 입증할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 지역에 오래 전해지는 전설은 어떤 사실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전달과 경고의 의미를 아주 적절하게 섞어서 말이죠. 동쪽 땅에선 어린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붉은 마녀가 와서 잡아간다는 말이 흔하더군요. 우연일까요?”

“경은 마녀라는 것을 믿나요?”

“황당한 소리겠죠. 고쳐 말하겠습니다. 마녀든 아니든, 무언가 수상한 목적을 가진 집단이라고 할까요? 과학적으로도 일단 수상한 근거가 많습니다. 그들의 거처 말인데…… 장소를 알아도 도달할 수가 없다더군요.”

“그거야말로 황당한 소리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조사원의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요. 그 산 전체를 뒤져도 안개에 휩싸여서 길을 잃고 마는 지점이 생긴다고 합니다. 즉, 그들이 그곳에 사는 건 알아도 자꾸만 길이 어긋난다고 해야 하나, 마치 지도가 매번 달라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거기까지 말한 제롬이 잠깐 말을 멈추고 디아나를 봤다.

“제게 들인 수임료가 아깝다고 생각하시죠? 이해합니다.”

제롬은 지극한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조사원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호기심이 많고 뭐든 이치에 맞춰 설명하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안개에 싸인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 이야기였다. 제롬 자신도 자조적 한숨이 나올 만했다.

“……아뇨, 난 경의 판단력을 믿어요.”

“영애, 아니 차기 공작님께선 항상 제 예상보다 대담하시군요.”

“하지만 수수께끼로 끝낼 생각은 없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롬 하이든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그래요. 그 마음이면 충분해요.”

이건 이미 돈을 떠난 제롬의 자존심이었다. 게다가 이단 심문이 연루된 이상 제롬의 개인적 호기심까지 건드려 버렸다. 제롬이 찾는 것은 감춰진 진실이지 안개 같은 현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둘러 줘요. 시간은 무한한 게 아니니까.”

“제게 주실 힌트는 없습니까? 혹시, 혹시나 말입니다. 어떤 추측이나 꿈이어도 됩니다.”

제롬은 디아나가 하필 이 문제를 가져온 것에 근원적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디아나가 파헤치기 전까지 트리샤 블랑은 그저 천박한 붉은 머리카락을 한 보잘것없는 남작가의 딸이었다. 게다가 사라 블랑은 좁고 더러운 방에서 기침이나 하다 죽어 갈 운명이었다. 그것을 수면으로 끄집어낸 디아나의 본심이 알고 싶었다.

“시간이 없다면, 어떤 꿈결 같은 이야기라도 참고하고 싶은데요.”

제롬이 빙빙 돌려서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추궁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난 악몽을 꿨어요. 트리샤가 마녀가 되어 날 저주해 죽이는 꿈이었죠.”

“그거 참 끔찍한 꿈이군요.”

“그 꿈에서 그녀가 말하더군요. 자신은 붉은 마녀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어때요, 너무 황당한 꿈인가요?”

제롬은 잠자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들어 있었다.

“……물려받았다고?”

그 말을 문득 뱉은 제롬의 눈빛에 광채가 서렸다. 아무리 짙은 안개도 거짓을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은 그것을 끝까지 추적한 자들이 없었기에 비밀로 남는 것이다. 제롬의 비상한 머릿속에 몇 가지 요소들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딸,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

그 일족의 특이성을 옮겨 오면 그대로 트리샤의 가정이 됐다.

“그래요. 물려받는 겁니다. 반복되는 거였어.”

어떤 생각은 방향을 조금만 비틀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들은 같거나 닮은 게 아니었어요. 그저 반복하고 있던 겁니다.”

연결고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제롬의 입가에 희열을 담은 미소가 번졌다.

“그건 이미 발견한 연결고리 아닌가요?”

“네, 하지만 제가 놓쳤던 부분이 있죠.”

디아나의 눈이 제롬의 답을 재촉했다.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손에 이미 트리샤 블랑의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디아나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사라 블랑의 존재에 대해 느끼던 기묘함이었다. 자신을 살해하던 트리샤의 마력은 강력했다. 루카스를 미혹하고 누구도 모르게 디아나를 독살했다. 그러나 사라 블랑의 지금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마녀는커녕, 언제 죽어도 모를 병자였다.

“사라 블랑이 협조할까요? 그래도 부모인데. 게다가 트리샤와 어머니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 딸이 어머니의 요양 장소가 바뀌어도 모른다니, 묘하군요. 뭐,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경은 뭘 하려는 거죠?”

“가엾은 사라 블랑을 만나러 갈 겁니다. 그녀의 딸이 정성껏 쓴 편지와 함께요.”

이번에는 디아나도 고개를 갸웃할 소리였다. 하지만 더 질문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디아나는 서둘러 넉넉한 보수와 함께 제롬을 떠나보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같았다.

진실. 트리샤 블랑의 비밀에 대한 진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