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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1화 (101/184)

101화

비비안은 흔들리는 촛불을 응시했다. 오늘은 예부에서 정한 합궁 일이었다. 아무리 루카스가 제멋대로라고 해도 두 번이나 초야를 거부할 수는 없을 테니, 곧 이 침소에 찾아올 것이다.

비비안은 정신이 없었던 결혼식 날보다 더 생생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날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정작 트리샤의 말을 듣고 나니 부담까지 커졌다.

“괜찮아…….”

비비안이 혼잣말로 자신을 달랬다. 예법대로 하얀 홑옷 하나만을 걸친 비비안의 속살이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반쯤 비쳤다. 디자인은 단순해서 노출이 거의 없었지만, 가슴 근처의 리본을 잡아당기면 일순간에 나신이 될 수 있었다. 다분히 초야에 일어날 일을 의식한 복장이었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침소 밖에서 근엄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바람을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당장 닥칠 일이 걱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비안은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뚜벅뚜벅 루카스의 발이 비비안의 시야에 멈췄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비비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먼저 침묵을 깼다. 루카스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했다. 루카스가 아는 황태자비의 인상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틀림없이 인형처럼 얼어붙어서 숨도 겨우 쉴 줄 알았는데, 대담히 먼저 말을 꺼내다니 예상 밖이었다.

“고개를 들라.”

“감사합니다, 전하.”

루카스의 시야에 살짝 뺨을 붉히며 미소를 짓는 비비안이 들어왔다. 결혼식에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솔직히 루카스가 예상한 광경과는 전혀 달랐다. 황태자비가 되는 영예를 얻었으니 기세가 등등했을 텐데, 막상 초야를 홀로 보내게 된 새신부였다. 쉬이 미소가 나올 상황은 아니란 것이다.

“왜 웃지?”

차가운 목소리에도 비비안은 애써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하를 가까이서 뵐 수 있는 시간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아, 내가 그런 황태자비를 더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삐딱한 루카스의 말과 시선이 날카롭게 비비안을 훑었다.

“아뇨. 실은 오늘 뵐 수 있어서 더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어째서?”

“그날은 제가 너무 긴장해서…… 전하께 부족한 모습을 보일까 두려웠습니다.”

비비안은 첫인상과 달리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허어.”

루카스는 이 지겨운 시간을 어찌 보낼지 고민하며 침소에 들었지만, 이제 막 흥미가 생기려고 했다. 당연히 바람을 맞은 일로 뚱한 표정을 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즐거운 오산이었다.

“사실, 결혼식 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비안은 필사적으로 침묵을 막았다.

“무엇이?”

“부끄럽지만, 전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나온 것 같은 남편을 맞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가까이서 전하를 뵈었는데…… 정말 그림처럼 수려하셔서…….”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꽤 만족감이 어렸다.

“황태자비가 된 것도 큰 영광이지만, 무엇보다 전하처럼 수려한 분의 비가 될 수 있어서 저는 이미 소원을 이룬 것이 아닌가…….”

비비안이 부끄러움에 살짝 제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 뺨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황태자비로서 보내는 첫날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대담한 고백이었다.

“내가 두렵지 않나?”

루카스도 제 이름에 딸려 오는 악명을 대충 알고 있었다. 애초에 오만하고 잔혹하지 않은 황족은 없었다. 루카스가 알기론 그랬다. 그런데 감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이 작은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려웠지만, 막상 전하를 뵙고 나니 다 잊어버렸습니다.”

정답이었다. 루카스의 입가에 씩, 미소가 어렸다.

“하, 이미 소원을 이뤘다? 발칙하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카스로선 처음 접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게 자신의 비라고 생각하니 한층 더 흥미로웠다. 비비안은 루카스의 기색을 보고 자신이 옳은 답을 내놨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전하를 사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아직 정도 나누지 않은 사이에 날 사모한다?”

“소녀는 결혼식에서 이미 운명을 느꼈으니, 그저 혼자서만 사모할 뿐입니다.”

여태 이런 말을 하는 여자는 없었다. 루카스가 여인으로 접했던 이들은 모두 시침 시녀로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동적인 인형이었고 루카스가 명령하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심지어 루카스는 그들 중 누구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황태자비는 따분한 줄 알았는데, 참 특이한 구석이 있군.”

하지만 비비안은 달랐다. 어찌 됐든, 비비안은 하나밖에 없는 황태자비였다. 비비안은 자신의 신분이 주는 한 번의 기회를 붙잡고 싶었다.

“저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처음이라서 제 모습이 낯설어요.”

비비안이 약간 촉촉해진 갈색 눈동자를 들어 루카스의 눈을 봤다. 순수한 얼굴과 붉어진 뺨이 대조를 이뤘다.

“난 그대를 사모하지 않는다.”

루카스의 단호한 말에도 비비안은 실망한 기색 하나 없이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 작은 여인 어디에서 이런 곧은 심지가 나오는 건지.

“하지만 나의 비에게 하룻밤 정을 줄 수는 있지.”

루카스가 손을 뻗어 비비안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비비안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녀의 맨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루카스의 눈에도 고스란히 보였다.

루카스는 그 목덜미를 난폭하게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서툴고 당황한 몸짓이었지만, 비비안은 순순히 제 입술을 열었고 그 안에 루카스의 혀가 급하게 파고들었다.

시침 시녀는 천하다고 생각해서 입을 맞추지 않았던 루카스였기에 키스가 주는 환희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다른 행위도 다를지 모른다. 그의 머릿속에 흥미로운 생각이 스쳤다. 비비안의 의도대로였다.

“지금도 두렵지 않나?”

루카스가 입술을 떼자 투명한 침이 색정적으로 이어졌다.

“저는…….”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과 비비안의 순진한 얼굴이 묘한 배덕감과 자극을 줬다. 루카스는 오랜만에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하가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뭐든지?”

루카스의 눈동자에 색기가 어렸다. 비비안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뭐든지 받아들이겠어요. ……그리고.”

여기선 용기가 필요했다. 비비안은 제 손으로 가슴의 리본 끝을 잡았다.

“전하께 모든 걸 바치고 싶습니다.”

비비안이 리본을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옷이 흘러내리고 하얀 목덜미를 따라 풍만한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루카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본능을 따라 그 젖가슴을 쥐었다. 다 똑같은 여인의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페니스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 물건은 성이 났군.”

루카스에겐 이것이 최초로 감정적 교류를 하는, 적어도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과의 정사였다. 본인만 깨닫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걸로 뭘 할지도 아나?”

루카스가 단단해진 제 물건을 꺼냈다. 비비안은 처음 보는 남성의 페니스에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 또한 루카스에겐 묘한 자극이었다.

“……네.”

“솔직해서 좋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손이 가슴을 주무르다가 유두를 비틀자 저도 모르게 놀란 숨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모든 반응을 숨기고 침묵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본능은 트리샤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가 아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걸.”

“네?”

“귀족 영애였던 그대가 고작 뭘 알겠나. 이걸로 아래의 구멍을 쑤셔 댈 거라는 거?”

적나라한 말에 비비안은 얼굴을 붉혔다. 더 붉어질 얼굴도 없을 정도로 뺨이 화끈거렸다.

“네, 저는 잘 모르니까…….”

비비안은 말끝을 흐리다가 젖은 눈동자로 루카스를 올려다봤다.

“전하께서 가르쳐 주세요.”

입술이 탔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핥았다. 그 순간, 루카스의 강한 힘이 비비안을 침대로 밀고서 위로 올라탔다.

황태자비의 초야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

디아나가 공작저에서 조용히 자신의 공작 즉위를 준비하던 때, 황실과 사교계에선 새로운 황태자비가 뜨거운 화제로 급부상했다.

결혼식 당일의 초야에서 바람을 맞았던 가련한 황태자비는 이제 없었다. 시녀장은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혈흔이 묻은 이부자리를 위풍당당하게 들고 나오는 것으로 이 결혼이 완벽히 성사됐음을 알렸다.

“정말 대단해. 이렇게나 많은 선물이 또 오다니…….”

황태자비의 티타임은 트리샤의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비비안이 초야를 치렀다는, 게다가 황태자가 비비안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위치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황태자는 첫날밤의 행위를 치른 후에도 새로운 황태자비의 처소에서 잠을 청했고, 아침을 맞이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한데 다음 날 오후엔 직접 시종장을 시켜 다과를 보내기까지 했다.

“비비안, 정말 뭐라고 축하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냐, 트리샤. 네 조언 덕분이야.”

“그래도 황태자비는 너인걸. 전부 네가 잘 해낸 거지.”

비비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갑작스레 많은 것을 얻었지만, 결코 트리샤처럼 경거망동하지 않는 자세에서 그간의 교육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은 비비안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늘 칭찬에 인색했던 어머니가 이 광경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그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정반대로 수행해서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비비안은 우스운 생각을 떠올렸다.

“시녀장도 참 우스워. 처음엔 날 근처에도 못 오게 하고 널 그렇게 차갑게 대하더니.”

예상보다 황태자의 큰 관심을 끈 황태자비는 더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루카스가 몸소 시종장을 시켜 다과를 보냈다는 것이 알려진 순간, 시녀장은 황태자비에게 복종을 선언했다. 덕분에 트리샤는 자유롭게 비비안의 개인 시녀로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저기…… 황태자 전하는 어떠셔?”

“수려한 분이야.”

“그 외에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게 비비안을 위해 보낸 반짝이는 선물을 죄 풀어 본 후였다. 이제는 다른 비밀을 풀어 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밤에 말이야…….”

“음, 그건.”

비비안이 장난스레 트리샤의 눈을 응시했다. 단지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한층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날 밤은 비비안의 인생에서 어떤 기점이었다.

“트리샤 너도 결혼하게 되면 알려 줄게.”

“에이, 뭐야!”

“영애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인걸. 예법을 지키시죠, 트리샤 영애.”

온화하게 웃으며 트리샤를 향해 장난을 거는 비비안은 여전히 똑같은 친구였다.

“예, 황태자비 전하. 분부를 받들겠사옵니다.”

두 여인의 평화로운 한때가 지나고 있었다. 아직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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