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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00화 (100/184)

100화

두 사람의 차분한 눈 맞춤이 이어졌다. 서로를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그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 시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다. 특히 상대가 노인일수록 쉬웠다. 그의 인품과 살아온 과정이 얼굴에 죄 새겨져 증거가 될 테니 말이다.

“좋아, 어거스트 경.”

“제 이름은 오웬입니다. 그리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래. 오웬 경…… 내게 무엇을 가르쳐 줄 건가?”

오웬이 노인 특유의 짓궂은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차기 공작님의 행보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스승다운 발언이군.”

“그저 길을 안내하는 노인이라 여겨 주십시오.”

디아나에게 오웬의 존재는 꽤 반가웠다. 처음 공작령에서 가신이 왔다고 했을 때는 염려가 있었다.

“북쪽 땅에서 내 존재를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군.”

“솔직히 그렇지 않은 자가 더 많습니다.”

직선적인 말도 나쁘지 않았다. 보수적인 북쪽 땅에서 디아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차기 공작님의 행보에 따라 그들을 복종시키시면 됩니다. 그것이 군주의 자질이지요.”

비록 잔소리할 사람이 하나 늘어난 기분이 들었지만, 오웬은 북쪽의 카를 공작령에서 처음으로 디아나의 편을 자처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군주가 되는 길은 멀기에, 제 안내를 들으실 날도 길 겁니다.”

“그럴 것 같군. 그대의 장수를 기원해야겠어.”

다소 장난스러운 디아나의 말에도 오웬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문득, 디아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오웬이 카를 공작령의 가신이라면 이전까지는 아론을 섬겼어야 했다. 그랬다면 굳이 새로운 공작을 이렇게 반길 이유가 있을까.

“선친이 돌아가신 후, 숙부인 아론 경이 공작이 되셨다. 그럼 그대는 숙부님의 책사이자 스승이지 않았나?”

“그것은…….”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어쩐지 오웬은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는 아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의 표정에서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시도는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거스트가의 사명이기에.”

빛나던 호박색 눈동자가 불쑥 제 나이처럼 보였다. 대체 아론이 저 온화한 노인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디아나가 아는 바로 아론은 무심한 방관자였지만, 악한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론 경은…… 공작이라는 직위와 군주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지요.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디아나가 눈빛으로 나머지 말을 채근했다.

“도저히 아론 경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체념한 듯, 오웬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를 상상만 해도 기운이 빠진다는 표정이었다.

“숙부님이 공무에 관심이 없으시단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 현자라는 칭호를 마음에서 내려놨습니다.”

오웬이 지쳤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로써 디아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오웬은 공작령에서 현자의 칭호를 가진 모양이다. 수도에서도 그리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조건이 무척 까다로웠다. 오웬도 그 과정을 거친 검증된 인재란 뜻이다. 하지만 그 인재에게 대체 아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모르겠다니? 비밀에 부치겠다. 내가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디아나 특유의 호기심에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저는 분명 공작님께 군주로서 자각을 가져 주십사 설득을 하러 갔습니다. 거기까진 기억이 또렷한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제가 관개 수로에 대해 이틀 동안 설명을 듣고 있더군요. 아니, 사흘이었을지도…….”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디아나는 눈앞의 가엾은 오웬을 위해 실소를 간신히 참았다. 지독한 연구자인 아론의 눈앞에 어느 날 나타난 현자란 얼마나 반가운 먹잇감이었을까.

“그래도 사흘 만에 풀려났으니 다행이다.”

딱히 위로할 말이 이것뿐이었다.

“아닙니다.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넘은 후였습니다. 제가…… 공작님의 골치였던 배관의 연결부 설계를 마친 후였죠. 주도는 공작님이 하셨지만, 후우…….”

더 물었다간 오웬이 지레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제 오웬이 디아나를 반기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했다. 그건 이해타산이나 저의 같은 게 아니었다. 아론의 연구 지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경험이 지독한 나머지 그나마 공작이 될 생각이라도 있는 디아나에게 감격한 것이리라.

“추운 겨울에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만.”

빙긋, 오웬의 입가에 다시 평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북쪽 땅에서 이 정도 날씨는 따스한 축이랍니다.”

“그 정도인가?”

“예…… 수도엔 진정한 겨울이 없는 셈이지요.”

묘한 말이었다. 그것은 디아나가 곧 겪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비단 날씨뿐이 아니다. 북쪽의 영지는 디아나가 모르는 세계였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

“얘, 재스퍼.”

“예, 현자님.”

아까 오웬을 부축했던 소년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꾸벅 뒤늦은 인사를 했다.

“재스퍼 어거스트입니다. 현자님을 모시는 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 아까 말한 오웬 경의 손자인가?”

“아뇨, 백작님은 오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거스트가의 방계 자손입니다.”

카를 공작가의 유서가 깊은 만큼, 어거스트의 유서도 깊을 것이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둘이 응접실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봤다.

“현자라.”

그런 사람들은 황실의 아카데미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공작령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제 가신은 누구인지도 아직 모른다. 확실히, 안내자가 필요한 상태였다.

오웬은 그것을 눈치챘기에 무리해서 먼저 디아나를 찾아온 거였다. 디아나가 아무것도 모른 채 공작령에 가서 서투른 모습을 보이기 전에 늙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와서 미리 안내자 역할을 맡은 것이다. 아무리 대를 이어 온 가신이라지만, 참으로 절절한 충심이었다.

“어떠세요, 아가씨? 그레이가 소개장을 받았는데 북쪽 땅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현자라고 들었어요. 정말 그리 현명하던가요?”

호기심 어린 샬롯의 질문에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내 예감이지만…… 아무래도 잔소리를 잘할 것 같아.”

“어머, 그건 곤란한데요. 저와 역할이 겹치잖아요.”

샬롯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디아나는 조금 착잡하게 그 미소를 따라지었다.

***

공작저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한 채로 밤을 맞이했다. 디아나에겐 익숙한 또 다른 손님이 오는 날이었다. 그레이는 여느 때처럼 뻔뻔한 얼굴로 제 집사실 창문을 넘어온 에드윈에게 그 손님의 존재를 알리고 주의를 당부했다.

아직 그 현자가 어디까지 디아나의 사람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조심성이 많은 그레이로선 사실, 이 밀회 자체가 불안했지만, 그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현자라…… 북쪽 땅에 그런 자는 거의 안 남았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이 대공이 집사실의 벽난로 앞에서 로브를 벗은 채 불을 쬐고 있었다. 그레이는 조금 황당한 시선으로 에드윈을 봤다. 밀회하러 왔으면 응당 도둑처럼 조심스럽게 침실로 향해야지, 제집처럼 당당한 이 태도는 뭐란 말인가.

“어거스트 백작가는 본래 카를가의 오랜 가신입니다. 유구한 가문이죠.”

그레이가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직 조금은 남았다고 들었다.”

“아마 현자의 칭호를 받은 자로선 유일할 겁니다.”

“아니. 북쪽 땅에서 제 뿌리를 지키며 수도로 와서 헛된 권력과 세속을 좇지 않는 자들 말이다.”

에드윈의 태연한 말과 달리 그레이는 당혹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에드윈이 말한 헛된 것들을 좇는 자들엔 현재의 대공가와 공작가 모두가 포함됐다. 다분히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그레이가 해선 안 될 생각이었다.

“방금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괜찮다. 그대도 기사도를 아는 자고, 디나의 사람이니 내 사람과 같아.”

“……예?”

얼떨떨한 반문이었다. 그레이는 우선 뭐부터 따져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주인을 디나라고 뻔뻔하게 부르는 것도 그렇고, 멋대로 제 사람과 같다고 하는 것도 그레이의 상식 밖이었다.

“너무 어려워할 것 없다.”

정작 그 당사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제 손을 불가에 대고 열심히 온기를 쬐고 있었다.

“저…… 전하.”

“왜?”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건지……. 전하께서 절 만나러 오신 게 아니라면.”

에드윈을 내쫓고 싶기도 했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이런 행동을 태연히 하는 건지, 그레이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 밖이 추우니 내 몸에 한기가 깃들었을 거 아닌가.”

“예, 겨울이니까요.”

“그 한기가 내 디나의 몸을 해칠까 걱정이 되어 여기서 떨치려는 거다.”

이번엔 심지어 애칭 앞에 소유격을 붙였다. 그레이는 왜 자신이 부끄럽고 민망한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몸에서 한기가 묻어나면 괜한 걱정을 하거든.”

그 말을 하는 에드윈의 옆얼굴에 벽난로의 불길이 어른거렸다. 적어도 이 사내는 진심이었다. 그레이는 그것으로 이 황당한 시간을 합리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

노크도 없이 침실의 문이 열렸다. 디아나는 아까부터 문이 보이는 곳의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조용히 미소만을 지었다. 그러나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에 차오르는 감정을 보자 저도 모르게 팔을 벌렸다. 전에는 보자마자 와락 껴안아서 곤란했는데 최근엔 추위 탓으로 에드윈이 먼저 안아 주지 않았던 것이 조금 서운했던 탓이다.

“디나.”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로 특별한 이름이 울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애정만큼 디아나의 입가에 분홍빛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이내 에드윈이 다가와 디아나의 벌린 팔이 서운하지 않게 꼭 안아 줬다. 그 품에 한기는 한 자락도 없었고, 에드윈 특유의 체취와 다소 높은 체온이 가득했다.

“보고 싶었다. 디나.”

그저 애칭만을 반복해서 부르는데 왜 이렇게 수줍고 뺨이 붉어지는지 모르겠다.

“……나의 디나.”

서로에게 가장 은밀한 곳까지 허락했는데, 그러느라 혹시나 그의 마음이 너무 쉬이 질릴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관계는 나날이 설레고 더 애를 태웠다.

“오늘은 전하의 품이 차지 않네요. 최근 한기가 있다면서…….”

디아나는 에드윈을 보면 바로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그 품이 아무리 차가워도 자신을 위해 달려오느라 식은 것이니 더 애틋했다.

“오늘은 날이 포근하더군.”

거짓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디아나는 더 깊이 에드윈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레이의 벽난로를 빼앗으신 거죠?”

“음…… 디나, 그대는 늘 내 생각보다 영명하군.”

그 말을 하면서 에드윈이 디아나를 더 빠듯하게 안았다. 서로만의 애칭을 정한 후로 에드윈은 틈만 나면 말 사이에 꼭 디나를 끼워 넣었다.

“그야, 당신의 연인은 바보가 아니니까요…… 에드.”

단둘이서 속삭이는 이름이 너무도 달콤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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