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9화 (99/184)

99화

루모스 기사단은 국혼이 지나고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이미 엄청난 열병식을 선보이느라 단원들은 기진맥진했지만, 에드윈은 야속하게도 그보다 더한 것을 요구했다. 도대체 국혼보다 더 거대한 행사가 무엇인가 싶은 것도 잠시, 곧 루모스 기사단의 새로운 무대가 밝혀졌다.

“전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사단원 전부가 얼이 빠진 가운데 대표로 딜런이 나섰다.

“이 거리에서 말하는데도 못 들었으면 귀가 먹은 거 아닌가.”

“듣긴 들었는데,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과연 딜런 정도 되는 사람이어야 에드윈에게 말대꾸라도 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어린 시절 같이 나무 검으로 장난을 치던 추억 덕분이었다. 그래도 에드윈이 서늘하게 노려보는 눈초리까지 피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할 말을 한 것에 의의가 있었다.

“한 번만 더 말할 테니 똑바로 귀 후비고 듣도록.”

에드윈이 비스듬하게 선 채로 기사단원들을 둘러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선제압이 될 정도였다.

“곧 있을 카를 공작 즉위식에서 열병식을 한다.”

그건 황실의 행사보단 의회의 행사에 가까웠다. 엄밀히 따지자면 카를가 개인의 일이기도 했다. 즉, 어느 이치로 따져도 굳이 루모스 기사단이 고생을 들여 나설 이유가 없었다. 열병식이 멋들어지고 위엄을 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기사들은 차라리 전투가 낫겠다고 죽을상을 쓸 정도로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하오나, 전하.”

“카를가의 행사에 왜 우리 루모스 기사단이 끼어드느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기사란 자가 제 표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다니 실망이다.”

“전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

“다른 문제는 전혀 없다. 대공가와 공작가가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지. 또한, 국혼 때 선보였던 열병식을 잊지 않고 각자의 몸에 새겨 둘 좋은 기회다.”

딜런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말로는 에드윈을 이길 수 없다. 물론,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싸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그가 대공이 아니었어도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더욱.

“기사단의 완벽한 열병식은 후대에까지 전설처럼 전해지는 것을 알고 있겠지.”

황실의 즉위식이 있을 때면 어느 기사단이 열병식을 했는지, 단장이 누구인지도 적혔고, 음유 시인들은 그들의 멋진 기사도와 찬란한 기상을 노래했다. 그러면 제국엔 기사단을 향한 사모의 앓이가 이어지곤 했다.

“굳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빠지고 싶은 자가 있나? 말리지 않겠다만.”

“아닙니다!”

딜런의 뒤에서 기사들이 소리쳤다. 혈기왕성한 기사들은 열병식을 보며 사랑에 빠질 소녀들을 생각하자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과연 루모스 기사단을 수족으로 부리는 에드윈답게, 어떻게 해야 그들의 사기를 올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 참여하고 싶습니다!”

“후대에 남을 정도로 훌륭한 열병식을 위해서 밤샘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대공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열정의 소리에 에드윈이 말없이 딜런을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분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모두 그렇다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딜런은 카를 공작가의 즉위식에 굳이 열병식을 시키려는 에드윈의 시커먼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기사단원들은 열정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바칠 때 그 영광의 자리에 있었노라고 말할 생각에 뇌의 기능이 정지한 것 같았다. 혈기왕성한 사내들의 집단은 그게 문제였다.

“그럼 완벽히 준비하도록. 책임은 내가 아주 신임하는 딜런 경에게 맡기겠다.”

에드윈이 눈짓으로 슬쩍 딜런을 보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영광……입니다, 전하.”

딜런이 고개를 숙였다 들었을 땐, 이미 에드윈의 뒷모습이 보였다. 결국 에드윈이 연인과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동안 딜런은 열병식을 준비하게 된 꼴이었다. 역시 딜런이 예측했던 것처럼 그 둘의 인연은 위험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루모스 기사단에겐 그랬다.

***

그날, 카를 공작저에선 손님을 맞이했다. 디아나의 공작위 상속이 결정된 후에 공작령에서 출발한 귀한 손님이었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싶었는데 막상 손님을 보자 그 의문이 단번에 해결됐다. 오히려 여기까지 걸음 하게 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그 손님은 연로했다.

“차기 공작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아니, 예는 생략하고 그냥 앉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앞에 둔 디아나가 다급히 손을 내젓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노인은 지팡이까지 짚은 채로 굳이 디아나에게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고서야 자신이 데려온 시종의 부축을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그 대목에서 이미 그가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소식을 듣고 카를 공작령에서 출발했으나, 이 노구 때문에…… 마차를 타고 오느라 늦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조금도 늦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드물게 디아나가 당황했다. 노인은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옷차림은 단정하고 고급스러웠으며 별다른 장식이 없는 두꺼운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참으로…… 어려운 걸음을 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디아나는 이 한겨울에 먼 거리를 왔을 노인을 떠올리며 괜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저렇게 노쇠한 사람을 수도까지 보낼 생각을 했단 말인가. 어차피 즉위식이 끝나면 디아나가 공작령으로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할수록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즉위 후에 공작령에 갈 생각이었거늘.”

“그러나 저의 역할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컸다. 보기와는 달리 눈빛도 또렷하고 생기가 있었다. 다만, 무척 늙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늙은이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럴 리가. 아니다, 전혀.”

디아나가 어색하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샬롯은 차를 내오며 그런 디아나를 보고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지금 디아나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저는 카를 공작가의 가신으로 오랜 세월을 섬겼던 어거스트 백작입니다. 선조 때부터 북쪽의 영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지요.”

당장 본인만 봐도 충분히 오래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백작이면 꽤 높은 작위였다. 수도의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카를의 공작령이 있는 북쪽 땅에선 무척 권세가 높을 것이다.

“저희 어거스트 가문은 대대로 카를의 공작님을 받들어 때론 책사로, 때론 감히 스승으로 나서서 보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미처 몰랐군.”

디아나는 수도에서 자랐다. 디아나의 일생 대부분은 이 저택에서 일어났다. 귀족 영애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수도의 정계에 진출한 귀족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고된 길을 와 준, 카를가의 손님이라니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이 수도 외의 세상을 아직 몰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이 수도로 모인 지가 오래지요.”

헤렌 제국의 영토는 무척 넓었으나 땅이 고르고 온화한 날씨를 지닌 남쪽 땅이 수도가 됐다. 수도의 사람들은 모두 이 제국과 세상의 중심이 수도라고 착각하며 살다 죽는 것이 다수일 정도였다. 하긴, 디아나조차 공작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며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수도는 중심이 아니야. 그렇지?”

“선친을 닮아 영명하십니다.”

모두가 수도를 제국의 중심이라 여겼지만, 지리적으로 그건 틀렸다. 이 수도는 남쪽에 극히 치우쳐 있었고 그 위로 있는 광활한 영토는 북쪽 땅이니 서쪽 땅이니 하는 애매한 단어로 뭉뚱그려졌다.

“내 선친을…… 만난 적이 있는가?”

“물론이지요. 실은 차기 공작님이 어린 시절 공작령에 오셨을 때도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만…… 기억하시기엔 너무 어린 나이일 겁니다.”

“그랬군.”

“그러나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때도 무척이나 영명하셨죠.”

노인의 눈가에 주름이 지며 처음으로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를가의 유산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렇게 튀어나오곤 했다. 모두가 칭송하는 선친의 덕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제 그 이름을 이어야 하는 디아나로선 무거우면서도 영광스러운 책임감이 들었다.

“실은, 그런 아가씨께서 차기 공작이 되셨다고 해서 이 늙은이는 신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디아나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영애였던 여인이 바로 작위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풍문으로 듣기에 수도 밖은 훨씬 보수적인 분위기라고 했으니 당연히 카를 공작령에서 자신을 반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반발을 어찌 제압해야 할지를 고민할 정도였다.

“어째서지?”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질문은 단순했다. 그것이 상대의 저의를 파악하기 더 쉬울 것이다.

“선친께선 고귀한 명예와 자비를 아는 분이셨습니다. 현명함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그런 군주를 섬길 수 있던 것은 카를 공작령에 사는 모두의 축복이었지요.”

“단지, 내 선친께서 훌륭하셨기 때문에?”

“제가 비록 늙은 몸이지만 그 정도로 머리가 굳지는 않았습니다.”

노인이 빙그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공작령의 상속을 전해 듣자마자 여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오는 과정에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지요. ……예, 차기 공작님께서 당당히 권리를 찾아내신 이야기를요.”

그의 노쇠한 얼굴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그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습니다. 차기 공작님께선 분명 선친의 피를 이으셨다는 것을.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의지와 고귀함도 함께 물려받으셨다는 걸.”

쉬운 길은 아니었다. 디아나가 평범한 영애였다면 감히 떠올리지도 못할 일이었다. 지금 눈앞의 노인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디아나의 행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늙은이 생의 마지막 소명으로 차기 공작님을 섬기게 된 것은 축복입니다.”

“그건, 공작으로서의 나를 어거스트 백작가가 섬기겠다는 뜻인가.”

“예. 보시다시피…… 저는 늙어 이미 제 손자가 가문을 이끌고 있습니다만, 본래 어거스트 백작가의 가신으로서 역할은 다릅니다.”

“때론 책사로, 때론 스승으로?”

디아나가 아까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노인은 잠시 호박색 눈동자로 디아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날 가르치겠다는 건가?”

“감히 그러고자 합니다. 그것이 신의 소명이니까요.”

어쩐지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노인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무척 현명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리 연로한 자의 소명을 방해할 수는 없지.”

디아나의 허락에 노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었다. 오웬 어거스트. 북쪽 땅의 카를 공작령에서 온 첫 번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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