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8화 (98/184)

98화

비비안은 트리샤의 자세하고 노골적인 설명이 끝난 후에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입까지 반쯤 벌어진 채였으니 그 충격은 짐작할 만도 했다.

여태 비비안이 알던 세계가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숙한 여인의 몸가짐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트리샤가 알려 준 것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같은 행위를 두고도 이렇게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 건…… 트리샤 네가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절대 아냐.”

몇 번이고 비비안이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트리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호하게 제 주장을 관철했다. 남녀 간의 행위에서 수동적인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는 없다는 것과 사내의 마음을 붙드는 데 정사만 한 것이 없다는 것도 포함해서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는 고결한 분이셔. 일반적인 사내가 아니잖아.”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결함으로 판단할 게 아니야.”

트리샤의 말이 옳았다.

“내 말 잘 들어, 비비안.”

트리샤는 그 시침 시녀가 하혈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보다 다소 기가 죽은 시녀장 니나의 꼴이 퍽 볼만했다.

트리샤는 피임에 아카리 잎만을 사용한 안일함을 황후에게 고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간 시침 시녀들이 했던 일에 대해 털어놓게 했다. 역시나 트리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 루카스가 했던 추잡한 행동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도 열여덟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셔. 그리고…….”

트리샤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순진한 비비안이 시침 시녀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지 않으면 비비안은 루카스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고작해야 지겹고 목석같이 뻣뻣한 황태자비라고밖에는. 트리샤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건 곤란했다.

“이미 여인의 몸에 대해선 전부 아시는 분이라서 처음의 호기심이나 특별한 것을 기대하면 안 될 것 같아.”

“황태자 전하께서도 당연히 아실 건 아시겠지.”

“단지 아시는 게 아니야. 이미…… 여인을 꽤 많이 안아 보셨을 거야.”

트리샤가 조심스레 말을 뱉고 비비안의 안색을 살폈다.

“그것도 당연하지.”

그러나 비비안의 반응은 트리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무런 놀라움이 없었다.

“원래 사내들은 그렇잖아. 어머니도 그런 건 당연하다고 하셨어.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 시침 시녀를 들이셨을 거라고도.”

드물게 트리샤가 놀랄 정도로 비비안의 태도가 차분했다. 그동안 순진하다고 내심 얕잡아 봤던 비비안인데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는 게 눈으로 보면서도 쉬이 믿기질 않았다.

“투기는 쓸모없는 짓이야.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하찮은 신분의 여자들인데 그냥 하루 이용하고 마시는 거겠지.”

“그, 그래…….”

울컥, 트리샤의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태연한 비비안의 표정 위에서 하혈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던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도 남작가의 딸이라고 했다. 신분으로만 따지자면 그 자리에 트리샤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비비안은 이렇게 다정히 트리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마치 티타임의 수다나 떨 듯이 그녀들을 말했다. 그건 정말이지 기묘한 느낌이었다.

“실은, 그 시침 시녀를 관리했던 시녀장을 우연히 만나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어.”

트리샤는 애써 쓸데없는 감정을 떨치고 말을 이었다. 비비안이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나았다.

“황태자 전하께선 가만히 있는 여인을 싫어하신대. 그렇다고 너무 나서는 것도 싫어하시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음…… 황태자 전하께서 주도하시되, 전하께서 하시는 행위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는 걸 즐거워하신대.”

이 말을 하는 트리샤도 정작 처녀였다. 하지만 약초를 다뤘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남들의 사생활이나 성생활에 대해 들을 기회가 많았다. 사라는 여러 여인이 찾아와 비밀스러운 고민을 털어놓기 좋은 상대였다. 트리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들의 적나라한 행위를 들으며 자랐다.

“황태자 전하께서 네 몸을 만지시면 느끼는 대로 반응하고, 때가 무르익었다고 느끼면 목을 끌어안는 거야. 그…… 교성이나 신음을 참지 말고 그대로 흘리는 게 중요해.”

“그런…… 천박한 행동을.”

비비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시침 시녀 따위가 아니라, 황태자비야. 어떻게 그런 품위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어.”

“맞아, 비비안 너는 황태자비야. 황태자 전하의 하나뿐인 아내라고. 부부 사이에 침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없어.”

트리샤의 설득력은 언제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니 이전의 생에서 몇 번이고 디아나를 기만할 수 있었다. 이건 블랑 남작 특유의 사기꾼 기질을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고 척박한 삶을 살면서 후천적으로 익힌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트리샤는 제 능력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어머니께선…….”

“비비안, 후작부인께서도 항상 네게 가르치신 것처럼 행동하셨어?”

비비안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언니의 죽음 이후 자신에게 엄격한 교육을 하는 모습이 거의 다였다. 그러나 정작 비비안을 가르친 사람은 어머니가 고용한 교사들이었다. 그 시간에 어머니는 파티와 사교계를 누비기 바빴다. 비비안은 입에도 대지 못하게 했던 술을 마신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공작 부채로 부치던 모습은 익숙했다.

“그래, 비비안. 여태까지 영애로서 너는 정숙해야 했지만, 막상 부인이 되면 달라져.”

트리샤의 말은 달콤하고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여인의 인생은 결혼으로 변하는 거야. 넌 이제 교육이 필요한 영애가 아니잖아?”

비비안의 억눌렸던 반발심을 교묘하게 부추기는 말이었다.

“넌 하나뿐인 황태자 전하의 부인이야. 헤렌 제국의 황태자비 전하라고.”

“……맞아.”

“어머니의 가르침을 전부 따를 필요는 없어.”

비비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릴 때부터 마음속의 자신이 외치던 바로 그 말이었다.

“이제부턴 다 비비안이 결정해야 해. 지루하고 목석같은 황태자비로 남을지, 사랑스러운 새신부가 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비비안은 루카스가 따분하게 쳐다보던 눈초리가 떠올랐다. 평생 그런 취급을 받으며 살고 싶진 않았다. 비비안은 여태까지 후작가에서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는 영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 순종을 강요하던 어머니는 없었다.

“그래, 트리샤 네 말이 전부 다 맞아.”

이곳엔 어머니가 교육을 강요하는 대신 자신을 차갑게 기계적으로 대하는 시녀들이 있었다. 동이 트기 전부터 일어나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는 살인적인 일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비비안을 위해 융통성을 전혀 발휘하지 않았다.

“황태자비가 되었으니 반드시 황태자 전하의 사랑을 얻어야 해.”

비비안을 둘러싼 시녀들은 그녀를 위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초야에 루카스가 나타나지 않자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덕분에 비비안은 자신이 데려온 시녀 신분인 트리샤조차 지금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고마워, 트리샤. 넌 정말 진심으로 날 생각해 주는 친구야.”

만일 합궁에서 루카스의 외면을 받게 되면 앞으로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고작 며칠 만에 비비안은 이 황실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은 트리샤였다. 비비안의 유일한 친구이자, 현재의 유일한 아군이었다.

“나, 힘내서 꼭 황태자비로서 자리를 잡을게.”

비비안의 표정이 한층 결연해졌다. 트리샤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

“내게 힘이 생기면 가장 먼저 널 황태자비전의 시녀장으로 임명하겠어.”

그것은 상당한 권력이었다. 본래 트리샤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것을 노리고 함께 입궁한 것이기에 트리샤는 내심 흡족한 웃음을 감췄다. 이럴 때는 감동을 한 친구로서의 순수한 표정을 보여 줘야 했다.

“너만 행복하다면 난 아무래도 좋아. 네 곁에 있는 게 내 행복인걸.”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일 때면 아직도 디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고아한 속눈썹이 드리운 푸른 눈동자는 마법처럼 사람을 홀렸다. 그 앞에서 트리샤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말이 진심이었으니까.

“아냐, 꼭 네게도 보상을 해 줄 거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너무 쑥스럽잖아. 난 정말 괜찮아. 디아나, 네 곁에 있을 수 있는데 무슨 직책이면 어때.”

트리샤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비비안의 얼굴은 굳어졌다. 트리샤는 방금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였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트리샤는 디아나라고 말했다. 눈앞에 비비안을 두고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며 말했다. 트리샤가 어릴 때부터 디아나 카를의 곁에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아버지가 트리샤를 데려온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이런 상황이 되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표정이 갑자기 너무 안 좋아졌는데?”

“그냥, 앞일을 생각하니까 좀 심란해져서 그래.”

비비안이 아무렇게나 얼버무리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굳이 트리샤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사과하는 것이 비비안에겐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침 적절한 때에 노크가 울렸다. 트리샤더러 그만 물러나란 뜻이었다. 트리샤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비비안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방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비비안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난 항상 두 번째구나.”

자조적인 말이었다. 비비안은 단지 동갑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디아나와 비교를 당해야 했다. 어딜 가도, 심지어 부모님조차 디아나를 기준으로 잡고 그보다 더 나아지길 강요했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비비안이 그걸 납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디아나 카를의 실물을 본 순간, 비비안은 깨달았다. 애초에 그건 경쟁이 아니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비비안이 아닌 누구였어도 마찬가지다.

“괜찮아.”

비비안이 낮게 읊조렸다. 약간 서늘한 표정은 그녀의 부친을 조금 닮았다.

“두 번째가 마지막이면 되니까.”

결국 황태자비가 된 것은 비비안이다. 트리샤의 친구가 된 것도, 평생 트리샤가 곁을 지킬 사람도 비비안이다. 시간이 지나면 디아나 카를의 존재는 전부 풍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어차피 승자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차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비비안은 이제 두 번째가 아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