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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7화 (97/184)

97화

시녀장들이 트리샤를 끌어내기 전에 황후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트리샤는 이 일에 제 목숨이 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안간힘을 썼다.

“제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후는 여전히 트리샤 따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녀장들은 벌써 트리샤를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여인의 목숨은 해치지 않으면서 후환을 없앨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흐읍!”

시녀장 하나가 악착같이 몸을 수그리고 있는 트리샤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신음이 나오면서 순간적으로 몸의 힘이 풀어졌다. 너무 과격한 도박이었던 걸까. 트리샤는 시녀장들에게 두 팔을 붙들린 채 끌려 나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 정도 각오도 하지 않고 덤빈 도박이 아니었다.

“붉은 등롱꽃과 그 뿌리를 달여 먹이면 무조건 하혈을 하지만, 죽진 않…….”

“잠깐.”

황후가 한 손을 들었다. 트리샤는 그곳에서 희망이 비추는 것을 느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자신이 이 승부에서 이겼단 뜻이다. 무능한 아버지와는 달리, 트리샤는 도박에 능한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봐라.”

“예…… 폐하께 전해 드릴 선물을 들고 기다리던 와중에 우연히도 말씀을 엿듣고 말았습니다.”

트리샤가 거친 숨을 애써 골랐다.

“그따위 것 말고, 조금 전 말했던 그 방도를 고해라.”

“앗, 예! 소인의 집안은 약초를 다뤄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있어선 안 되는 잉태를 한 여인들도 적지 않았기에…… 몇 번이고 사용했던 방도이니 확실합니다. 그저 비법대로 달인 물을 먹이기만 하면 됩니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의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걸 무릅쓰고 제 안전에 나섰으니 그 방도에 제 목숨을 걸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잘못되면 제 목숨을 거두셔도 됩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당사자가 죽지 않아야 한다는 건 확실히 알겠지?”

“물론입니다. 여태 수많은 여인에게 썼지만, 몸이 상하기는 해도 죽은 자는 없습니다. 다만, 두 번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될 수는…….”

“관계없다. 죽지만 않으면 돼.”

황후의 시선이 제 앞에서 넙죽 엎드린 붉은 머리카락의 트리샤를 향했다.

“네 목숨을 담보로 하겠다면, 좋아. 기회를 주마.”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영리하게 빛났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선뜻 제 목숨을 걸었으리라.

“제게 맡겨 주십시오.”

황후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시녀장인 모니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공해 줘라. 그리고 오늘 밤에 끝내.”

“예, 폐하.”

“결과가 어떻든 다시 여기로 끌고 와라.”

“예, 폐하.”

결과가 황후의 뜻대로 된다면 트리샤는 제 이름을 고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고, 잘못된다면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트리샤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결과도 이미 알고 있었다.

붉은 등롱꽃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겨울이라 꽃은 피지 않았지만, 전의들의 약재 저장고에 마련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같은 풀이라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트리샤는 말린 꽃과 뿌리를 곱게 갈아서 비율을 섬세히 조정한 후에 달였다.

“정식으로 시녀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런지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곁에서 감시하던 니나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시침 시녀들은 전부 전하의 손을 탄 후엔 어김없이 피임 조치를 받았다. 그래도 이런 일이 생겼는데, 그걸 전의도 아닌 고작 너 따위가 해결할 수 있다고?”

“외람되지만, 피임 조치는 어찌하셨는지요.”

트리샤가 고운 천에 담긴 약재를 짜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

“약초에 대해 잘 안다며 그것도 모르느냐?”

“북쪽 침엽수림의 아카리 잎입니까? 나름대로 독성이 있어서 피임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트리샤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것은 관계 직후에만 효과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연속해서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처음 사정한 정액은 이미 몸 안으로 들어가서 한발 늦게 되지요.”

“어린 것이 천박한 말을 잘도…….”

우스운 일이었다. 직접 시침 시녀의 다리를 벌리게 하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안에 들어간 정액을 파내라 지시한 후에 약물을 붓던 시녀장이 하는 말치고는 그랬다.

“그저, 약재상의 정확한 사실을 고하는 것입니다.”

“허. 그래, 네가 만든 건 다르다는 말이지? 하긴, 내 목숨이 달린 일은 아니다.”

아니, 이번 일이 잘못되면 니나에게도 여파가 미친다. 니나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불안한 것은 자신이면서, 초조하게 트리샤가 달인 약초 물을 보는 시선이 트리샤의 눈엔 참 하찮게 보였다.

“다 됐습니다. 이대로 먹이면 됩니다.”

“그게 다인가?”

“예. 아무리 늦어도 3시간 이내에 하혈을 시작할 겁니다. 몸 안에 품은 모든 핏덩이를 쏟아 내고서야 멈추겠죠. 그때 풍한이 들고 크게 빈혈 증상이 올 테니, 이것도 같이.”

트리샤가 가루로 된 약을 건넸다. 이게 그나마 트리샤가 베풀 수 있는 자비였다. 물론 혹시라도 여인의 몸이 너무 연약해서 하혈하다 쇼크로 죽을까 염려한 것이 컸지만.

“……그래. 네 목숨줄이 어떻게 될지는 곧 알겠구나.”

니나가 약을 들고 방을 나섰다. 트리샤는 그제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귀족으로서 약초를 다루고 약재상에 내다 파는 것은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항상 어머니 사라의 강요로 약초학을 외우고, 뜻 모를 책들을 외워 댔던 보상이 이렇게 오다니 인생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이 도박은 결과가 정해졌어.”

트리샤가 혼잣말했다.

“난 아버지처럼 무능한 도박사가 아니거든.”

도박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는 트리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도박이 아니었다. 트리샤는 처음부터 조커를 들고 있었고, 기회를 쟁취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금 무리해서 용기를 낸 것이 다였다.

그리고 트리샤의 패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의 시침 시녀는 1시간이 되기도 전에 하혈을 시작했고 황후의 골칫거리도 사라졌다. 황후는 다시 제 앞에 엎드린 트리샤를 향해 처음으로 관심 어린 눈길을 주고 있었다.

“일어서라. 넌 이제 죄인이 아니다.”

“황공하옵니다.”

트리샤가 일어서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네가 황태자비를 따라서 입궁했다던 시녀라던데.”

“그렇사옵니다.”

“약초에 박식한 건…… 때에 따라 아주 유용하겠구나.”

“부끄러운 잔재주에 불과합니다.”

토독, 토독, 황후의 기다란 손톱이 화려한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네 이름이 뭐냐.”

트리샤가 기다렸던 운명적 순간이었다.

“트리샤 블랑이라고 하옵니다.”

트리샤가 수줍게 붉은 눈동자를 들었다. 황후의 시선은 여전히 트리샤를 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트리샤가 좋은 쪽으로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기억해 두마.”

무수한 시녀들 속에서 황후에게 직접 제 이름을 알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산을 넘은 것과 같았다. 어떤 시녀는 그걸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상으로 바라는 것이 있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트리샤는 여전히 순진하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제 이름을 물으신 것만으로도 일가의 영광이옵니다.”

픽, 황후가 실소를 뱉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 영리한 시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말재간도 어느 정도 되니 나쁠 것은 없었다.

“정말 바라는 것이 없느냐?”

“저는 황태자비 전하를 모시기 위해 입궁한 몸. 제 본분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오호.”

황후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저 영리한 정도가 아니라 제법 수준이 높았다. 그 은혜를 황태자비에게 돌리겠다는 은근한 말이었다. 그것은 초야에 외면당한 제 주인의 처지를 의식한 것이다.

“네 충심은 잘 알았다, 트리샤.”

“황공……하옵니다.”

트리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헤렌 제국의 황후가 지금 제 이름을 부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트리샤는 방금 권력의 달콤함과 환희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

비비안이 애타게 찾던 트리샤는 밤중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잠옷 차림의 비비안은 트리샤를 보자마자 그간의 서러움이 울컥했는지 꽉 끌어안았다. 그런 비비안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를 한참, 그제야 조금 진정된 비비안이 의자에 앉았다.

“트리샤,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여기 시녀들은 전부 목석같아. 다들 아무 감정도 없고, 기계적이야. 널 부르는 것도 정말 힘들었어.”

“비비안, 아니…… 전하.”

달라진 트리샤의 호칭에 비비안은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약속했잖아요, 전하. 입궁하면 법도를 따르기로.”

“응…… 그래도 우린 여전히 친구지?”

“그럼요.”

그 말에 비비안의 미소가 돌아왔다.

“그러면 둘이 있을 때만은 예전처럼 대화하자. 이건, 명령이야!”

“……그러다 들키면.”

“괜찮아, 둘이 있을 때만이야.”

“알았어, 비비안.”

드디어 익숙한 사람과 재회한 비비안은 긴 숨을 내쉬었다.

“넌 어때? 혹시 네가 나랑 입궁한 시녀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

“나는 괜찮아. 그보다 비비안 네가 더 힘들잖아.”

“그건…… 황실 사람들이 다들 비웃지?”

자조적인 미소가 비비안의 입가에 어렸다.

“초야에 바람을 맞은 황태자비라니. 다들 떠들 만도 해.”

“아냐, 누가 감히! 그리고 그날은 황태자 전하께서 기쁜 마음에 너무 과음하셔서 그랬다고 들었어.”

트리샤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할 줄은 알았다. 비비안은 그걸 알면서도 성의를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 실은 내일이 합궁 일이래. 예부에서 정했다고 들었어.”

“정말 잘됐다.”

트리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황후가 트리샤의 성의를 높이 사서 이런 방식으로 상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트리샤는 황태자비에게 딸린 시녀였다. 우선은 비비안의 위치를 다져야 했다.

“저기, 비비안. 그…… 초야에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응, 그야 어머니께 배웠지.”

비비안이 살짝 뺨을 붉혔다. 그 순진한 얼굴에 트리샤는 약간 불안해졌다. 샤리즈 후작부인은 정작 본인의 행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제 딸에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반듯하고 고귀한 여인이 되도록 교육했다. 트리샤의 예상대로라면 후작부인의 교육은 실전에서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뭐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여인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정숙한 모습을 보이면 되는 거잖아.”

역시나. 트리샤의 머리가 아파졌다. 이래선 황태자의 마음은커녕 관심조차 끌 수 없을 것이다.

“비비안. 내가 꼭 해 줄 말이 있어.”

“응.”

비비안이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트리샤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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