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국혼 이후로도 선대공비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세워져 있었다. 이미 황태자비 자리는 샤리즈 후작가에 넘어갔고, 그레이스가 괜한 욕심을 품은 탓에 후작가와의 관계도 악화했다. 먼 옛날엔 체스터 대공가의 가신에 불과했던 가문이라 얕잡아 봤던 것이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괘씸한 것들.”
한때는 대공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아첨을 해 댔던 샤리즈 후작가는 없었다. 국혼 후, 온갖 데에 선물을 돌렸다고 들었는데 대공저에는 소식 하나 없었으니 아주 명백한 태세전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웃을 수 있을까?”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애초에 황실에서 원한 건 후계자를 낳아 줄 적당한 신분의 여인이었다. 최초의 후보가 디아나 카를이었던 가장 큰 이유도 그녀의 선친이 작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실에서 샤리즈 후작가가 외척으로 설치게 둘 리는 없었다.
“제 딸만 희생한 셈이지.”
황후도 만만치 않았지만, 국혼의 당사자인 루카스는 황태자란 신분을 제외하면 최악의 신랑감이었다. 샤리즈 후작가가 외척의 권세를 얻지 못할 거라면, 비비안은 허상을 위해 희생당한 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레이스가 픽, 실소를 뱉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고 그레이스의 호출에 긴장한 하프먼이 들어와 예를 갖췄다.
“선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어찌 찾으셨는지요?”
그레이스가 직접 집사장인 하프먼을 찾는 일은 드물었다. 전달할 사항이 있으면 시녀장이 왔지, 그레이스가 부를 일은 없었다.
“하프먼, 자네는 영리한 사람이지. 여태 이 대공저를 잘 꾸려 올 만큼.”
“황공하옵니다.”
“영리한 자네가 답해 보게. 내가 왜 자네를 찾았을 것 같나.”
하프먼이 고개를 숙인 채 곤란한 표정을 감췄다. 오늘, 그레이스의 호출을 들었을 때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집사장인 자신도 알아챌 만큼 에드윈의 최근 행보가 수상한데 어머니인 선대공비가 모를 리 없었다.
“소인은 선대공비 전하의 뜻을 읽기엔 너무 아둔한지라…… 가르쳐 주시지요.”
그나마 가장 현명한 답이었다.
“고개를 들라.”
하프먼이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선대공비를 봤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그런 하프먼을 아래위로 훑었다.
“아무래도 에드윈에게 내가 모르는 취미 생활이 생긴 것 같다. 뭐, 어엿한 대공이고 스물하나인 청년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그레이스는 제 아들에게 숨겨 둔 연인이 여럿이라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에드윈에겐 그럴 능력도 자격도 충분했다. 적어도 어머니로서 그레이스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 연애 놀음을 굳이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어려서부터 사내란 그런 것이라고 드노아 경에게 배우며 자랐으니 태연한 것이다.
“하지만 뭐든 정도를 지나치면 곤란하다. 최근 수상한 외출도 잦은 것 같던데…… 그 정도로 푹 빠진 상대가 있는데도 결혼은 한사코 마다하다니 그 상대의 신분이 대공가엔 걸맞지 않은 건지.”
그레이스의 추리는 미묘하게 빗나갔지만, 어느 정도는 적중했다.
“대공 전하께선 충실히 정무를 돌보고 계십니다. 아마 루모스 기사단원들과 어울리시는 것이 아닌지…… 선대공비 전하께서 크게 우려하실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건 내가 판단한다.”
하프먼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설프게 에드윈의 편을 들어 봐야 역효과만 날 것이다.
“어차피 내가 묻는다고 해도 대답하지 않겠지. 그러나 하프먼 자네는 에드윈이 태어났을 때부터 섬긴 이잖나.”
“소인의 영광이옵니다.”
“그 영광에 보답하고 싶거든, 지금 에드윈의 정신을 빼놓은 발칙한 영애가 누군지 알아내라.”
“소인이 어찌…….”
“자네의 영리함에 기대를 실어 보지.”
선대공비가 말을 잘랐다. 일방적인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하프먼은 고뇌를 가득 안은 채로 알현실을 나섰다. 선대공비가 저리 의심을 품었으니 대충 넘어가기는 틀렸다.
하프먼이 보기에도 최근의 에드윈은 수상했다. 누가 봐도 연애의 조짐이었다. 그러면서도 혼담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군…….”
하프먼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늘 냉소적이고 엄격한 선대공비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활기와 특유의 대담함, 그리고 관대함으로 이 대공저를 밝혀 온 에드윈이었다.
하프먼은 이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지만, 절대로 에드윈의 마음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선대공비에게 어설픈 답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노련한 집사장은 뜻밖의 고뇌를 품으며 걸음을 옮겼다.
***
모처럼 황후전에 웃음꽃이 피었다. 만족스럽게 국혼을 치러 낸 스텔라는 큰 짐을 던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루카스가 초야에 신부의 침소로 향하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도 웃어넘길 정도였다. 어차피 예부에서 합궁 일을 정하게 되면 루카스도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다. 처음엔 기를 좀 죽여 두는 게 여러모로 나으니까.”
스텔라도 과거엔 한없이 신랑을 기다리는 새신부였다. 웃전이 어려웠고, 남편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스텔라는 과거의 자신조차 잊었다.
권력이란 그런 거였다. 황실의 권세를 틀어쥐게 되자 정든 저택을 떠나서 외로움과 수치심에 떨었을 황태자비를 향한 동정심 따위는 모르는 차가운 심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는 아이는 돌려보낼까요?”
황후전의 시녀장인 모니카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태자비와 함께 입궁한 샤리즈가의 시녀인 트리샤 블랑을 일컫는 말이었다. 샤리즈 후작가에서 예물을 가져왔다며 황후전에 알현을 청하는 속셈이 뻔했다.
“아니. 그대로 둬라. 이 겨울의 정취를 느끼는 것도 좋겠지.”
“폐하께선 역시 자비로우십니다.”
모니카가 황후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본래 황실의 웃전을 직접 모시는 시녀가 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비가 결혼 전에 데리고 있던 시녀를 같이 입궁시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다.
“헌데, 폐하. 그…… 별궁의 일 말이옵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황후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 별궁의 일이란 루카스를 위한 시침 시녀를 들인 것을 뜻했다. 감히 황후가 입에 담기도 천박하다며 그리 부르는 것이다.
“폐하의 명으로 직접 그 일을 주관했던 니나 시녀장이 폐하께 알현을 청했습니다.”
“뭐라.”
“아마, 그…… 문제 때문일 것 같습니다.”
황후의 눈썹이 금세 찡그려졌다. 마치 들어선 안 될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런 것 하나도 제대로 처리를 못 하고.”
스텔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모니카는 눈치를 읽고 재빠르게 니나 시녀장을 불러들였다. 본래라면 황후의 특명을 잘 수행한 상을 받아야 할 차례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대역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시침 시녀들을 선발하고 은밀한 곳까지 적나라하게 들춰서 물건처럼 품평하고 검사하던 여인의 기세는 어딜 가고 없었다.
“황후 폐하께 고해라. 상세히,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모니카가 황후를 대신해 말하자 니나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예…… 전에 말씀드렸던 시침 시녀에 관한 일입니다. 이름은 안나라고 하옵고 신분은 남작가의 서출이온데, 전하를 모신 지 2달이 지났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허, 황후가 짧은 탄식을 뱉었다.
“시침 시녀는 모두 뒤탈이 없도록 조치하라고 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생긴 건가?”
모니카가 복잡한 심경의 황후를 대신해서 물었다. 황후의 심기를 먼저 읽고 말을 대신하는 것도 시녀장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분명히 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약도 먹였고…… 어찌 이런 일이 생긴 건지는 소인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시침 시녀는 절대 황실의 후사를 낳아선 안 되는 천한 것들이다. 무늬만 귀족이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관리가 철저했다.
선발할 때는 처녀 검사를 했고, 황태자가 범하고 나면 임신을 막는다는 약초 물을 입과 아래의 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그리고 용도가 끝나면 월경을 하는 걸 시녀장이 직접 확인한 후에 일정한 사례를 들려서 출궁시켰다. 당연히 국혼을 앞두고 모든 시침 시녀가 출궁했지만, 안나라는 아이만은 월경할 기미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별궁에 숨겨 뒀다.
“어찌……하올까요.”
니나가 어렵게 질문을 꺼냈다. 시침 시녀 따위 남모르게 목 졸라 죽여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특수했다. 어쨌거나 황태자와 살을 섞었던 몸이고 혹여나 황실의 핏줄을 잉태했을 가능성이 컸다.
“국혼을 마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일로 피를 볼 수는 없다. 그건 너무 불길해.”
황후는 미신을 잘 믿는 편이었다. 그래서 니나도 제 손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황후에게 고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천것이 황실의 핏줄을 낳는 것도 안 되지.”
편두통이 밀려오는지, 황후가 긴 손톱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전의는 뭐라던가?”
“전의들도 이런 일은 잘 다루어 보지 않아서 확답을 못 한다고 합니다. 행여 그 여인의 목숨까지 해하게 될 수도 있다고…….”
황실의 전의들은 어떻게든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에 골몰했고, 애초에 엄격한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기에 피임이나 임신을 중지하는 것은 알지 못했다. 암암리에 민간에서 쓰는 요법을 조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신뢰도가 너무 떨어졌다.
“막 국혼을 치른 참에 그리 더러운 피를 보게 되면 불길하지 않으냐!”
황후가 걱정하는 건 그 시침 시녀의 목숨이나 혹여 그녀가 품고 있을 생명이 아니었다. 그저 큰 경사 이후에 괜히 찝찝한 일을 벌여서 훗날 불길한 일이 벌어지는 게 싫은 것이다. 퍽 씁쓸하고도 우스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이 달린 일인데 정작 아무도 그 생명에 대해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라. 그 목숨은 붙여 두되, 후환은 제거할 방법을!”
하지만 이 촌극은 어떤 이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바로 알현실 너머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트리샤였다. 비비안의 처지를 생각한 샤리즈 후작부인의 강요로 뇌물 아닌 뇌물을 전달하러 온 것까진 좋았는데, 계속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오나, 전의들은…….”
“전의가 안 되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자를 찾아!”
그러던 차에 황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시녀들이 드나드는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트리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척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만일 제 말을 끝마칠 시간만 주어진다면 이건 분명히 엄청난 기회였다. 그리고 트리샤는 이미 그 영악한 기회주의에 인생을 맡긴 터였다.
“황후 폐하!”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트리샤가 쥐새끼처럼 빠르게 시녀장의 뒤에 섰다. 그러고 바로 납작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댔다.
“감히 허락도 없이 폐하의 앞에 나선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황후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두 시녀장이 그런 트리샤를 양쪽에서 붙들고 끌어내려고 했지만, 트리샤는 악착같이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제발 한 말씀만 고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 후에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