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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5화 (95/184)

95화

며칠 후, 고대하던 밀회가 이루어졌다. 어느새 겨울이 훌쩍 다가오면서 에드윈의 몸에서 한기가 배어났다. 에드윈은 제 품의 추위가 디아나를 해칠까 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손만 와락 붙들었다. 다행히 미리 피워 둔 벽난로에 방 안의 공기가 훈훈했다.

“잘 지냈나.”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는데, 정작 디아나의 얼굴을 보니 나오는 것은 안부뿐이었다. 디아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붙든 에드윈의 손을 살폈다. 아직 온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흉이…… 지겠어요.”

디아나의 목소리가 속상하게 울렸다.

“오히려 그랬으면 한다. 내겐 영광의 상처니까.”

에드윈이 한기가 가신 손으로 디아나의 뺨을 감싼 채 눈을 맞췄다. 고작 이 정도 상처로 디아나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힌 것이다. 에드윈은 그 순간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디아나를 만난 순간부터 모든 선택이 그랬다.

“이제 황태자비가 정해져서 안심이야. 그리 만전을 기했는데도, 어쩐지 마지막까지 안심이 되질 않더군.”

그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디아나의 불안이 에드윈에게 옮았나 보다.

“국혼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젠 괜찮아요.”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에드윈을 바라봤다.

“어느 기사님 덕분에 마지막의 위기도 모면했고요.”

“그거…… 말로만 들어도 무척 멋진 기사인 것 같군.”

새삼 뻔뻔스러운 에드윈의 말에 디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에드윈의 입에도 웃음기가 묻었다.

“네, 아주 멋진 기사님이었죠.”

디아나의 분홍빛 입술이 사랑스럽게 움직였다. 이게 뭐라고, 며칠을 못 봐서 에드윈의 가슴이 내내 답답했다.

“덕분에 무사히 공작 즉위식을 준비할 수 있게 됐어요.”

에드윈은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디아나를 품에 안았다. 그 너른 품의 빈자리가 디아나를 안자 꼭 맞게 채워졌다.

“그 준비, 조금 소홀히 했으면 좋겠는데.”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난 세상에 그대의 아름다움을 보이고 싶지 않다.”

“무슨, 그런…… 그 정도는 아니에요.”

“맞아. 늘 말하지만, 두 눈이 제대로 달린 사내라면 그대를 보고 반하겠지.”

에드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이 귀엽기도 하고 내심 설레기도 했다.

“전하처럼요?”

“그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에드윈의 솔직함은 언제나 디아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디아나를 보는 에드윈의 흑안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볼 때의 눈빛이었다. 디아나가 절세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한 건 사실이었지만, 에드윈의 시선엔 단지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제게 너무 관대하신 거 아닌가요.”

디아나가 망설이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에드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어렸다.

“그대는 황태자비의 관도 버렸잖아.”

“그건, 제가 싫어서…….”

“덕분에 계속 그대의 연인으로 남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황태자비가 다 무엇일까. 에드윈의 시선을 받으면 디아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어여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건 황후의 관을 쓰고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한 사람이 고귀해질 수 있는 건 그리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디아나는 이제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전하의 결혼은…… 재촉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대공가는 황실 다음으로 존귀한 가문이었다. 에드윈의 나이는 이제 스물하나로 지금도 결혼이 늦은 축이었다. 디아나가 만나 봤던 선대공비는 보통이 아닌 여자였으니 당연히 채근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에드윈은 어찌 이리 여유가 넘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많은 정도가 아니지.”

에드윈이 픽, 실소했다. 하지만 디아나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내 결혼도 결정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하지도 않아.”

에드윈은 디아나의 불안을 지우려는 것이다. 당장은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디아나의 뜻이 에드윈을 조금 힘들게 해도 이미 디아나에게 준 마음은 다른 누구에게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세상에 나서서 제 삶을 살아가는 디아나의 모습은 여태 본 무엇보다 반짝이고 아름다울 것이다. 에드윈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기로 빛나는 디아나를 보고 싶었다.

“제가 이기적이라서 전하에게 또 짐을 지우네요.”

디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디아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렇게 가벼운 짐이라면 얼마든지.”

에드윈이 다시 디아나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후에 따스한 미소를 머금었다.

“디아나 그대가 그대의 인생을 택했듯이, 나도 그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거다. 그저, 그뿐이야.”

디아나도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었다. 에드윈의 마음을 알면서, 심지어 함께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당장은 그의 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디아나 카를로 살아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더 이기적인 것도 있어요.”

에드윈이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디아나를 봤다. 디아나도 전부 알고는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의 목소리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하가…… 혹시라도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면, 그게 정략이든 아니든…… 전 싫어요.”

껌벅, 에드윈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에겐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저리 심각하게 하는 디아나가 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또 그 고운 눈초리로 노려보려나.

“나도 언젠가 결혼은 하겠지. 그것은 대공의 의무다.”

자못 심각한 에드윈의 목소리에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말끄러미 따라왔다. 약간 짓궂은 장난이었지만, 디아나의 저런 눈빛을 보면 에드윈은 지레 지고 말았다.

“우리도 언젠가 결혼은 하지 않겠나?”

이번엔 디아나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대가 세상을 마음껏 누비고 나면, 나와의 결혼 생활도 알아보고 싶지 않겠어? 난 그때까지 기다릴 작정이다.”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말했던 디아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더 씻어 주기 위한 에드윈의 다정한 마음이 느껴졌다.

“물론, 그대를 노리는 짐승 같은 놈들은 전부 내가 처리할 테니 그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에드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인 걸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몸은 좀…… 나아졌나.”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디아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넓은 소파에 앉은 후 디아나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렇게 몸을 포개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안정감이 밀려오다니 새삼 신기했다.

“오늘도 그대의 시녀장이 날 노려보더군. 엄청난 기세였어.”

“대공 전하께서 고작 시녀장의 눈빛을 신경 쓰시는 거예요?”

“……그대가 못 봐서 그런다.”

샬롯은 무언의 경고를 했다. 월경이 끝난 직후의 여체는 굉장히 민감하고 연약한 상태다. 그러니 우리 고운 아가씨를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최근 에드윈도 나름대로 여인의 몸에 대해서 따로 공부한 것이 있었다. 비록 제 욕정이 아무리 끓어오른대도 디아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이렇게 안고만 있는 건 괜찮겠지.”

에드윈이 멋대로 결론을 내리곤 디아나의 허리를 감싼 후에 손에 깍지를 꼈다. 그의 품은 디아나가 온몸을 파묻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디아나.”

낮은 목소리가 디아나의 이름을 또렷하게 발음했다.

“……네?”

“그냥. 불러 보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항상 디아나의 이름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이렇게나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을 에드윈은 처음 알았다.

“새삼스럽지만, 이름이라는 건 의미가 크군.”

디아나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에드윈은 내심 아쉬운 것이 있었다. 곧 디아나가 정식으로 공작이 되면 저택의 영애로 살아갈 때와는 다르게 그 이름을 부를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대가 공작이 되는 것은 좋지만…… 역시 내 심보가 그리 곱진 못하다.”

“갑자기 무슨 심보요?”

디아나의 의아한 질문에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곤 깍지를 낀 손을 더 좁혀왔다.

“공작위는 본래 그대의 것을 되찾는 거고, 그대가 원하는 일이니 나도 좋다고 생각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날개를 꺾어서 가두는 것 따위는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제 곁에 대공비라는 이름으로 가둔대도 그건 이미 자신이 사랑한 디아나가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해.”

그러는 에드윈의 목소리에 약간의 심술이 묻어났다.

“하지만, 역시 화가 난다. 의회의 음흉한 사내들이 그대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디아나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에드윈은 제법 진지했지만,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터질 뻔한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무슨 이야기를 저리 심각하게 하나 싶었더니 저런 사연인 줄은 몰랐다. 그리 대담하고 위세 높은 대공이 고작 이 정도의 일로 진지하게 분한 마음을 느낀다는 것이 왜 디아나에겐 귀여워 보이는지.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우리 사이는 특별하니까요.”

디아나의 달콤한 속삭임에도 좀처럼 에드윈의 굳은 입가가 풀어지지 않았다. 디아나는 몸을 돌려 그런 에드윈의 목을 안았다. 서로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그 증거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이름을 교환하는 건 어떨까요.”

“아무도 모르는 이름?”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은 둘만의 애칭으로 특별함을 과시했다.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트리샤와 루카스의 관계에서였다.

지난 생에서 루카스가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겠다고 했을 땐 소름이 돋았는데, 이제 그 상처가 조금은 아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디아나는 지금 에드윈만이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이름을 주고 싶었다.

“디나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니, 불러 주세요. 그건 이 세상에서 전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남길래요.”

거짓말처럼 굳었던 에드윈의 입가가 풀어졌다. 이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은 디아나뿐일 것이다.

“그런 선물을 나만 받을 수는 없지.”

에드윈이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대공가는 꽤 엄격한 분위기였고,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는 자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나머진 감히 그럴 수 없는 신분이었으니.

“나는…….”

갑자기 애칭을 떠올리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디아나에게 언제까지나 전하라는 딱딱한 호칭을 듣고 싶진 않았다. 에드윈은 환희의 순간, 제 아래에서 드문드문 이름을 부르던 디아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에드라고 불러도…… 될까요? 너무 단순한가요.”

“아니, 그게 좋다.”

그건 이 순간부터 에드윈에게 대공이란 이름보다 더 소중한 이름이 될 터였다. 디아나가 달콤하게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에드. ……뭐든지, 다요.”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더 많았다.

“디나, 그대에게라면 괜찮다. 뭐든지, 다.”

두 사람은 체온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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