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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4화 (94/184)

94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비안은 커다란 침대 모퉁이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혼자 남자 국혼을 준비하느라 지쳤던 몸과 마음의 여파가 고스란히 밀려들었다. 며칠은 거의 잠도 자지 못했고, 이미 맞춘 예복 때문에 거의 먹지도 못했다.

“잠깐만, 잠깐만…… 눕는 거야.”

비비안은 어릴 때부터 귀가 밝았다. 게다가 몸을 누였어도 긴장감은 풀어지지 않았다. 황태자가 침소에 들어서면 바로 알 자신이 있었다.

비록 웅크리고 누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욱신거리던 몸이 풀어졌다. 국혼은 일방적으로 신부에게 가혹한 일정이었다. 황태자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는 과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는…… 곧 오시겠지.”

비비안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예배당에서 혼인 서약할 때 마주 봤던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고 냉소적인 빛마저 서렸다.

종일 둘이서 나눈 대화라곤 일방적으로 루카스가 비비안을 질책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비비안의 어머니가 재차 가르쳐 준 일이었다. 황족은 위엄을 보여야 하기에 쉬이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결혼이란 점차 익숙해지며 알아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때까진 현숙한 여인으로서, 황태자비로서, 참고 견뎌야 한다고 했다.

피로가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어서 잠시 정신을 놓아 버린 걸까. 비비안은 자신했던 것과 달리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거의 기절에 가까운 잠이었다.

뒤늦게 눈을 뜨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을 땐, 커튼 틈으로 희미하게 동이 트는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비비안은 어쩔 줄 몰라 상기된 얼굴로 온 침실을 두리번거렸다. 초야에 먼저 잠이 들어 버리다니, 자신이 한 짓이 두려워 손까지 떨렸다.

그러나 비비안은 이내 깨달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침소엔 여전히 비비안 혼자였고 루카스는 오지 않았다. 그저 밤이 저물고 동이 트고 있다는 것만이 달라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비비안이 초야에서 황태자에게 외면받은 가련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아마…… 너무 피곤하셨을 거야.”

비비안은 애써 루카스를 대신한 변명을 읊조렸다.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 헤렌 제국의 영광된 황태자비가 되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비안은 긴 숨을 내쉬었다. 서러운 울음을 참고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그녀만의 마법이었다.

***

디아나는 오래간만에 꿈 한 자락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은 시기였는데 국혼에 얼굴을 비치느라 긴장해서 피로감이 깊었다. 특히, 마지막에 루카스의 그 끔찍한 개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때 에드윈이 나서 주지 않았으면 어떤 곤란이 생겼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설마, 그런 자리에서 개들을 풀 줄이야.”

디아나도 그 개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지난 삶과 책의 내용에서 몇 번 언급이 되었던 것들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황후였던 디아나는 루카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기에 그 개들과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그 개들이 살아 있는 피 냄새를 맡도록 훈련됐다는 사실은 몰랐다. 역시, 루카스다운 악취미였다.

“상처는…… 괜찮을까.”

디아나는 제 앞에 나서서 손바닥을 펼쳐 보이던 에드윈을 떠올렸다. 루카스가 보란 듯이 뚝뚝 떨어지는 피가 소매까지 적시고 있었다. 아마, 임기응변으로 직접 낸 상처일 것이다.

에드윈은 늘 디아나를 지키기 위해 크든 작든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디아나가 그것을 탓한다면 시치미를 떼며 부정할 것이다. 에드윈이 그런 남자라서, 디아나는 애정을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상처가,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처럼 아팠다.

“아가씨, 깨셨어요?”

“응…… 나도 모르게 늦잠을 잤네.”

샬롯이 싱긋 웃으며 세숫물을 가져왔다. 오늘도 뜨거운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가 함께였다. 다행히 배가 아픈 것은 꽤 잦아들었다. 대신 긴장이 풀린 자리에 약간의 몸살이 남았다.

“그럴 만도 하지요. 그래도 이제 한시름 돌렸어요.”

이제 황태자비가 정해졌다. 그 사실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온전히 내 미래만 볼 수 있어.”

“네, 이제부터 공작저에선 아가씨의 공작 즉위식을 준비할 거예요. 국혼도 지났고 의회의 승인도 떨어졌으니 걱정이 없죠.”

실감이 안 나던 미래가 문득 한 발짝 앞에 놓인 기분이 들었다.

“샬롯.”

“네, 아가씨.”

“그 준비를 하기 전에…… 오늘 하루만 게으름을 부릴래.”

디아나가 다시 포근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그러셔야죠.”

샬롯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디아나의 곁을 정리한 후 물러갔다. 디아나는 천천히 자신이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여태까지는 어떤 노력을 해도 피할 수 없던 운명이었다. 그래서 국혼이 끝나고 아무 문제도 없이 다음 날이 밝기 전까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제 황태자비는 정해졌어.”

디아나 카를이 아니다. 비비안 샤리즈가 황태자비였다.

“나는 두 번 다시 그곳에 돌아가지 않아도 돼.”

디아나가 목에 걸고 있던 손바닥만 한 단검을 꼭 쥐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책이었지만, 디아나에게 돌이킬 기회를 준 것은 이 성유물이었다. 그리고 아마 다시는 사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황태자비에겐 안됐지만.”

디아나는 그녀 앞에 놓인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디아나 본인이 직접 겪었던 일이다.

루카스는 결코 다정한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인성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자였다. 한 침소에 들 때, 루카스는 후계를 생산해야 한다는 목적밖에 몰랐다. 멋대로 나타나서, 어떠한 전희나 손길조차 없이 말라붙은 아래에 제 것을 박아 대고는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서곤 했다. 단둘이 있는 침소에서도 그랬으니 나머지 상황에선 더 볼 것도 없었다.

“게다가 트리샤까지.”

새로운 황태자비는 자신의 시녀로 트리샤 블랑을 데리고 입궁했다. 모든 조건은 같았다. 그러니 비비안이 겪을 생지옥도 뻔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디아나 탓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황태자비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루카스였다. 디아나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불행을 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새로운 황태자비를 동정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가엾은 일이야.”

황태자비는 가혹한 일정의 국혼을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진짜 가혹한 일상은…… 이제부터 시작일 텐데.”

디아나는 잠시 황실의 일상을 떠올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이젠 잊어도 좋은 기억이다. 디아나는 끝난 일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이건 디아나가 쟁취한 자유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디아나는 이내 포근한 이불 속에서 단잠에 빠져들었다.

***

그토록 성대한 행사를 치렀는데도 휴식은 주어지지 않았다. 비비안은 동이 트기 무섭게 자신을 깨우러 온 시녀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시녀들은 일제히 예를 올리더니 비비안을 씻기고 단장시키느라 바빴다.

“저…… 어제 황태자 전하께서는 왜 안 오셨는지.”

비비안이 침묵을 깼다. 그 말에 시녀장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황태자비 전하.”

엄격한 목소리의 시녀장이 비비안 앞에 섰다. 나머지 시녀들은 계속 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저는 황태자비전의 시녀장을 맡게 된 엠마라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막 입궁하셨으니 황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드리라는 황후 폐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아, 그래?”

비비안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몰라 짧은 말로 대신했다. 엠마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게 단단히 빗어 넘긴 머리를 단정하게 하나로 올렸다. 척 봐도 무척 까다로울 것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앞으로, 절대.”

엠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문자 그대로 가르치는 태도였다.

“황태자 전하의 거동에 대해서 언급하셔선 안 됩니다. 특히나 침소의 일, 합궁에 대해서 입에 올리시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비안은 갈색 눈동자를 들어 엠마를 주시했다. 단순히 루카스의 거동을 물은 것도 아니고, 언제 오느냐고 재촉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초야에 자신의 신랑이 왜 오질 않았는지 물어보는 것조차 안 된다는 말인가.

“황태자비 전하께선 앞으로 매일 동이 틀 무렵에 기침하시어 단장을 마치고 황실의 예배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 후, 황실의 예법을 익히는 시간을 가진 후 아침 만찬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황태자비전의 시녀장을 저런 여인으로 임명한 것은 새로 입궁한 비비안의 기를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뜻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일정은 매일 같으니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렇구나.”

비비안은 담담하게 뱉었다. 어릴 적부터 잠잘 시간까지 쪼개 가며 강습을 시키던 어머니 덕분인지 크게 놀라울 건 없었다.

“또한, 아침 만찬 등의 자리에서 웃전과 함께하실 때 우선 예를 갖추시고 웃전께서 말을 걸어 주시기 전까지는 어떤 대화도 먼저 시작하실 수 없습니다.”

그 정도는 비비안도 미리 배우고 왔다. 비비안은 처음으로 제 어머니의 극성을 이해할 것 같았다.

“전하의 단장은 제가 입회하여 시녀들이 해 드릴 겁니다. 당분간의 착장은 시녀장인 제 판단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것도 황후 폐하의 명인가?”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황실에 적응하시기 전까지이니 노여워 마시길 바랍니다.”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려온 시녀 중에 트리샤라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불러 주겠어?”

“불가합니다.”

비비안이 다시 엠마를 주시했다. 유순한 인상과 잘 어울리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햇빛에 빛났다.

“어째서?”

“위에 말씀드린 일정에 참여하기엔 신분이 너무 낮습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트리샤는 비비안이 직접 데려온 시녀였다. 황태자비의 개인 시녀더러 신분이 낮다니, 비비안의 권세란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비비안의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식 일과를 제외하고, 내게 주어진 휴식 시간은?”

“오후에 티타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주간 일과를 일찍 마치시는 경우도요.”

“그럼 그 시간에 트리샤를 불러와 줘.”

엠마의 표정이 다시 엄하게 굳어졌다.

“전하, 그것은.”

아무리 황태자비가 데려온 시녀라고 해도 출신이 너무 낮은 데다 앞으로 황태자비전은 자신이 이끌어 나갈 곳이었다. 황태자비의 개인 시녀는 필요 없었다.

“그것은?”

비비안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선량하고 고왔다.

“설마 황태자비인 내게 개인 시녀 하나 부를 힘도 없다는 가르침도 있는 건가?”

유순하고 차분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엠마는 맑은 갈색 눈동자에서 어떤 힘을 읽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싱긋, 비비안이 미소를 지었다. 냉혹한 황실에서의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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