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3화 (93/184)

93화

개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치 제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젠 뒤로 물러설 곳도 없었다. 정면에는 루카스와 개들이 똑같은 짐승의 눈빛으로 디아나를 위협했다. 척추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은 본능이 경고하는 두려움이었다.

“역시, 황태자 전하의 개들은 훌륭하군요.”

그때, 에드윈이 맥을 끊고 뒤에서 나타났다. 그제야 겨우 루카스의 시선이 디아나에게서 떨어졌다.

“실은 아까 전하를 위한 열병식을 지도하다가 상처를 입었지 뭡니까.”

에드윈이 제 손에서 흐르는 피를 슬쩍 보였다.

“그게 지금은 아닐 텐데?”

“예, 오전의 일입니다만. 방금 취기가 조금 올라서 세게 쥐는 바람에 다시 상처가 터졌습니다.”

태연하고 멋쩍은 웃음과 함께 에드윈이 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이 위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재빠르게 자신의 검으로 낸 상처였다. 루카스는 잠시 그 손바닥을 보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난 또 뭐라고. 그대답지 않은 짓을 했군.”

“오늘 워낙 큰 경사인지라…… 저도 모르게 과음을 좀 했습니다.”

그런 것치고 그의 얼굴은 멀쩡했다. 오히려 술이 오른 것은 루카스였다.

“개들이 디아나 영애 뒤에 선 제 피 냄새에 이끌렸군요. 확실히 혈통이 좋은 개들답게 아주 뛰어납니다.”

제 개들을 칭찬하는 소리에 루카스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다들 사나운 개를 황실에서 기르는 것을 악취미로 여겼지만, 정작 이런 소란을 일으키고 보니 심술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래.”

하지만 루카스의 녹안은 이내 디아나에게 향했다.

“다친 데가 없다니, 다행이군?”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디아나는 똑똑히 봤다. 그 순간, 입꼬리를 비트는 루카스의 눈동자에 서린 한 점의 의심을.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아, 몸이 안 좋다고 했지. 그러도록.”

디아나가 긴장을 숨긴 채 예를 올렸다. 에드윈도 내심 마음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다시 한 번 국혼을 경하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루카스와 살짝 시선이 스쳤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루카스는 내내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게 아니었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짐승처럼 빛나며 디아나를 좇았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하는 사냥개와 같은 눈빛이었다.

“또 보지, 디아나 영애.”

간신히 루카스에게서 벗어난 디아나는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속 어디선가 뭔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황태자비가 탄생했음에도, 어쩌면…… 악몽은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디아나가 떠난 후, 에드윈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연회는 깊은 밤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디아나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조금 전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샬롯이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전하기도 했으니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나마 자신이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제 검을 슬쩍 빼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상처를 내는 것쯤은 그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루카스에게 조금 전의 일이 특별한 인상을 남겼느냐다.

“어떤가, 에드윈.”

아까보다 더 취기가 오른 루카스가 에드윈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말씀이신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내 개들은 사냥감을 정확히 잡아내는데.”

“전하, 제가 사냥감이라니 그건 너무하십니다.”

에드윈이 일부러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아니, 사냥감은 확실히 디아나 영애였다.”

“제가 뒤에서 은신하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적어도 개들을 상대해선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 루카스는 묘한 소리를 흘리곤 샴페인을 넘겼다.

“너무 과음하지 마십시오.”

“하…… 잔소리는 어마마마로 족하다.”

다행히 개들은 잊은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흘깃 눈짓으로 황태자비를 가리켰다.

“지루하기 짝이 없어.”

“그런 말씀을 하시기엔 너무 이릅니다. 대화도 안 나눠 보셨잖습니까.”

“말을 섞어 봐야 아나?”

루카스의 입꼬리가 노골적으로 비틀렸다. 물론, 황태자비가 된 비비안의 인상은 딱히 뚜렷하지 않았다. 황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는 정숙하고 온화한 여인이라는 점 외에는 특징도 없었다. 아까부터 인형처럼 같은 미소만 유지한 채로 서 있는 모습은 좋게 말하면 조화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무난했다.

“그래도…… 새신부를 상대로 그러시면 안 됩니다.”

“신부가 아니야. 황실에 필요한 정비를 들인 것뿐이지. 내가 고른 것도 아닌데, 무슨.”

그렇다고 해서 루카스의 태도가 정당할 수는 없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한, 시간이 흘러도 황태자비는 지금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에드윈에게는 조금 아쉬운 점이었다. 새로운 황태자비가 루카스의 주의를 돌려주면 좋겠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려웠다.

“곧, 자정이 되겠군요.”

에드윈이 담담하게 시계를 보며 말했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퇴장할 시간이었다. 그들은 준비된 처소로 향해서 첫날밤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이 기나긴 국혼이 끝난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미리 초야를 준비하러 들어간 것 같았다. 황후는 아직도 개들을 풀어 둔 일로 불쾌한 기색이었고, 샤리즈 후작만이 세상을 가진 듯이 웃고 있었다. 또 다른 당사자인 루카스는 지겨운 듯 술에 취해 하품이나 했다. 여러모로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결혼식이었다.

에드윈은 디아나와 고요히 맺었던 언약식을 새삼 소중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택에 돌아간 디아나가 편히 잠들었기를 바라는 것과 루카스가 술에 취해 오늘의 일을 잊는 거였다.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그렇게나 길었던 국혼이 끝났다.

***

비비안은 하얀색의 얇은 옷만을 걸친 채로 긴장에 떨고 있었다. 황실의 시녀들이 몸을 샅샅이 씻겨 줬지만, 아무도 말을 걸거나 인간적인 감정을 전해 주진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묵묵히 새로운 황태자비를 씻기고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게 한 후에 커다란 침대로 옮겼다.

사방에 기둥이 있는 침대는 호화로웠고 황실의 것이라 물건 하나도 전부 금실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촛불이 비비안을 더욱 긴장시켰다. 시녀들은 마지막으로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러가겠단 의미로 허리를 숙였다.

“저, 저기…….”

망설이던 비비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녀장이 나머지 시녀들을 내보낸 후에 한 발짝 비비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예, 전하.”

아직 너무 낯선 호칭이었다. 비비안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깐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혼자 남는 것인가?”

“예. 황태자 전하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럼 그 전까지 내 시녀라도…….”

“불가합니다.”

시녀장이 지엄하게 말했다.

“두 분 전하의 합궁은 무척이나 지엄한 황실의 중대사. 정해진 절차를 어기실 수는 없습니다.”

“아, 그래…….”

“더 하문하실 일이 없으시다면 저도 물러가겠습니다.”

“전하는…… 언제 오시지?”

시녀장이 고개를 들어 조금 낯설게 비비안을 응시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원하실 때, 오실 겁니다.”

그 말은 앞으로 비비안의 모든 인생에 영향을 줄 말이었다. 시녀장은 조금 넋이 나간 비비안을 두고 그대로 침실을 나섰다. 이젠 비비안 혼자 남았다.

그리 화려했던 결혼식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국혼 준비부터 시작해서 오늘 예식을 마치기까지 너무 몸을 혹사한 탓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긴장이 풀어지지 않아서 잠도 오질 않았다.

“트리샤라도 있었으면…….”

비비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트리샤도 어머니인 후작 부인도 모두 시녀들이 몸을 씻길 때가 되자 나가야 한다고 해서 떠밀렸다. 그만큼 국혼의 초야는 중대사였다.

시녀들은 비비안의 몸을 씻기는 동시에 꼼꼼하게 문제가 될 점이 없는지 검사하는 것 같았다. 시녀들에게 알몸을 맡기는 것은 후작저에서부터 익숙한 일이었지만, 묘하게 황실의 시녀들은 기계적이고 차가웠다.

“여긴 왜 시계가 없는 거야.”

쓸쓸하고 불안한 목소리였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귀족 교육을 받았지만, 국혼은 그런 비비안에게도 확실히 버거웠다. 게다가 오늘은 초야를 치러야 한다. 이제 겨울이라 쌀쌀한 날씨인데도 얇은 홑옷 하나만 걸치고서 무한정 황태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퍽 야속한 일이다.

“침착해야지. 난 황태자비니까.”

국혼이 결정되고 어머니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그 이야기를 했다. 실감은 잘 나지 않았지만, 오늘 예식을 치르고 전하라는 호칭을 듣자 조금씩 현실이 밀려왔다.

비비안의 남편인 루카스도 열여덟로 동갑이라 했다. 그래서 조금은 친밀하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 오히려 독이었나 보다. 따분하다는 말을 하던 루카스의 차가운 눈빛은 비비안에게 벌써 생채기를 남겼다.

“이제 시작이야…….”

비비안은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당장은 황태자도 기나긴 예식에 지쳤을 것이다. 아직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으니 서로에게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했다.

비비안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것이 고귀한 분의 반려가 되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부모님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비안은 초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내가 할 일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비안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반복했다.

‘정숙한 여인이라면 어떤 행동도 먼저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남편이 하는 행위를 가만히 받아들이면 돼.’

그건 쉬웠다. 비비안은 살면서 한 번도 뭔가를 주도적으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돼. 천박한 소리를 흘리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귀한 혈통의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비비안은 초야에 무슨 행위가 일어나는지 아주 자세히 배웠지만, 그것들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몰랐다. 모든 것이 그저 의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오늘의 기나긴 예식 동안 억지 미소를 지어야 했던 것처럼.

“막상 같이 지내보면 좋은 분일 거야.”

루카스의 용모는 가까이서 보니 꽤 수려했다. 황족은 본래 오만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는 어머니의 말도 위안이 됐다. 비비안은 순종하고 기다리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루카스가 마음을 열고 편하게 자신을 대할 때까지 항상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제 난 황태자비니까…….”

비비안은 정식으로 황족의 일원이 됐다. 그러니 루카스도 조금씩 자신을 받아들여 줄 것이다. 연회에서 디아나 영애에게 말을 건 것은 그저 흥미이거나 동정이었을 거다. 비비안에게 따분하다고 한 것 역시 루카스의 본심은 아닐 거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밤이 너무 길고 차가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