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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2화 (92/184)

92화

평소와는 사뭇 다른 에드윈의 태도에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특별한 건 아니고.”

에드윈은 여전히 디아나의 시선을 묘하게 피했다.

“그…… 나보다 먼저 가 버린 괘씸한 손님은 언제쯤 다시 돌아가는지.”

잠깐, 디아나가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에드윈이 언제 다시 제 침실로 들어와도 되는지 묻는 거라는 것을 깨닫자 뺨이 달아올랐다.

“……확실히는 잘 몰라요.”

“그런가.”

무척 괴롭겠지만, 손가락 하나도 건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대화를 나눌 장소가 아니었다. 에드윈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디아나에게 앞길을 터 줬다. 어서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서 쉬라는 배려였다. 디아나는 고갯짓으로 에드윈에게 마음을 전하고 연회장의 상단으로 향했다.

“이런.”

그런 디아나의 뒷모습을 보던 에드윈이 작게 끌탕을 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새로운 황태자 내외가 황후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 반갑고, 예복을 입은 디아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시간을 끌었더니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셈이 됐다.

디아나도 그 광경을 보고 낭패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차피 성사된 국혼이니 당당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루카스에게 디아나가 아닌 정비가 있음을 보고 싶기도 했다.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또한,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 축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우아하게 예를 갖추며 말하는 디아나를 보고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걸음을 해 줬구나.”

“아닙니다.”

새로운 황태자비는 아직 모든 것이 얼떨떨한지 어색하게 굳어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인 만큼 한껏 꾸민 모습이 아름다웠다. 갈색 눈동자에 온유하고 앳된 인상이 두드러지는 미인이었다. 디아나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동정심을 애써 눌렀다.

“하오나 제가 병약하여……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을 듯싶사옵니다.”

디아나의 본론에 황후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무릎을 굽혔다.

“잠깐.”

그 순간, 루카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날아들었다.

“누군가 했더니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였군.”

“그렇사옵니다.”

디아나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지만,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집요하게 디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바로 옆에 제 신부를 두고도 거침이 없는 시선이었다.

“이왕 내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불꽃 점화는 보고 가야지?”

곧 정원에서 불꽃을 쏘아 올릴 때였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기도 했고 앞의 예식이 너무 길었던 탓도 있어서 어둠이 벌써 내렸다.

“어찌 보면, 그대는 정직함으로 이 황실을 위한 충성을 보이지 않았나.”

루카스는 달빛 아래에서 어렵게 제 사정을 고백하던 디아나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듣던 소문과 달리 고고함은 없었고 그저 여느 영애들처럼 루카스를 어려워하며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이었다.

“달빛 아래에서 내게 어려운 사실을 고하던 그대의 모습이 선하군.”

그땐, 그랬다. 그러나 오늘 루카스가 본 모습은 전혀 달랐다. 특히나 에드윈과 대화를 나누는 디아나의 모습은 생기가 가득해서 꽃처럼 싱그럽게 빛났고, 이 연회장의 누구보다 고아하고 우아한 몸짓을 했다. 그날, 제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던 영애는 없었다. 그 점이 루카스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정원에서 불꽃 점화를 보고 가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여기서 거절하는 건 역효과를 낳는다. 디아나는 지난 경험으로 루카스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불안했다. 루카스가 왜 자신의 신부를 곁에 두고서도 디아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속내를 숨긴 채 침착하게 예를 올리고 물러섰다.

“아가씨, 표정이 왜 그러세요.”

샬롯이 다가와 속삭였다. 디아나는 심호흡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불꽃 점화를 보고 가라셔.”

“저런…….”

“왠지 느낌이 안 좋아. 저택에 돌아가기 전까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어.”

“네, 그렇게 해요.”

샬롯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디아나에게 귀엣말했다.

“전하께도 그리 전할게요.”

“응. 그게 좋겠어.”

연회장 밖의 정원에 어둠이 본격적으로 깔리고 있었다. 이제 한고비만 넘으면 된다. 무척이나 길고 긴 하루였다. 디아나는 남은 힘을 긁어모아서 남은 한고비를 바라봤다. 오늘이 지나면 루카스와 가까운 자리에 있을 일은 없다. 즉, 이게 마지막이다.

“그래…… 이제 진짜 끝이야.”

디아나가 작게 혼잣말했다.

***

정원에 인파가 모여들었다. 샬롯의 전언을 들은 에드윈은 의식적으로 디아나와 거리를 유지했지만, 그녀의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곧 시종장이 나와서 몇 가지 알림을 하더니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축포는 오전에 예배 때와는 달리 하늘에 반짝이는 꽃이 되어서 피고 졌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 축복을!”

샤리즈 후작이 기세등등하게 외치자 저들끼리 샴페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연회가 그렇듯이 귀족들은 샴페인을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오늘은 국혼이란 퍽 흥미로운 화제가 있으니 그 열기가 상당했다.

“장관이군.”

루카스가 픽, 실소했다. 하객조차 지칠 정도의 예식이니 그가 느끼는 피로감도 상당했다. 루카스는 연신 샴페인을 들이켰고, 황태자비는 어디서 가져온 석상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가엾은 비비안의 입가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느라 경련이 일 정도였다. 새로운 황태자비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선 것은 자신의 남편인 황태자였다.

“그럼 난, 이 지겨운 예식이 끝나 가는 것에 건배하지.”

황태자인 루카스의 냉소적인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황후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고 일부러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건배.”

그러자 귀족들도 일제히 잔을 부딪쳤다. 정작 루카스 본인은 누구와도 잔을 부딪치지 않은 채로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황태자비의 잔은 계속 가득 찬 채였다. 비비안은 술을 입에 대 본 적도 없었고,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술을 마신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루카스는 그런 비비안의 얼굴을 불만스럽게 응시했다.

“술도 못 마시는 건가.”

“전하, 저는…….”

“됐다. 어차피 그대의 얼굴을 본 순간 따분할 거라고 예상했어.”

기나긴 예식 동안 루카스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 주나 싶었는데 그 내용이 아팠다. 여태 잘 유지해 온 비비안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송구……합니다.”

“기대도 안 했다.”

루카스는 꽤 술이 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 귀족들의 가식적인 축하나 즐기는 모후의 모습은 꽤 한심하고 불만스러웠다. 주인공인 자신은 지겨워 죽겠거늘 남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거슬리는 것이다.

“시종장.”

“예, 전하.”

“개들을 데려와라.”

“……예?”

시종장의 반문에도 루카스가 채근하듯 손을 내저었다. 이 지겨운 황실에서 루카스의 흥미를 그나마 붙들고 있는 것들이 황실의 정원과 기르는 개들이었다. 그 개들은 처음 드노아 경이 기르던 사냥개의 새끼를 데려온 것인데 특히 모후인 스텔라는 그 개들이라면 아주 질색했다.

“하오나, 이런 자리에서는…… 개들이 워낙 사나워서.”

“데려와라.”

루카스가 물러서지 않았다. 이 연회장에 개들을 풀어놓으면 아주 볼만한 광경이 연출될 것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따위는 그에 비하면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시종장은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개들을 데리고 왔다. 황후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루카스가 개의 목줄을 풀어 둔 후였다.

“웬 검은 개가…….”

“꺄악!”

잘도 시시덕거리던 귀족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루카스는 그 꼴을 보며 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직접 기르는 아이들이다. 내 결혼식에 아끼는 아이들이 빠지면 섭섭할 것 같아서.”

루카스가 그리 말하니 대놓고 거부를 할 수도 없었다. 거의 송아지만 한 덩치의 검은 개들이 정원을 누비자 소란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모처럼 거금을 들여 쏘아 올린 불꽃은 이미 모두의 눈 밖이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아주 훈련이 잘 된 아이들이거든.”

실제로 개들이 하객을 위협하진 않았다. 개들은 주인인 루카스가 즐거워할 정도로만 소란을 일으킬 줄 알았다. 황후는 조용히 시종장에게 눈짓을 했지만, 한번 풀어 둔 개들은 루카스의 명령이 아니면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어디…….”

루카스가 하객들 사이로 모습을 감춘 개의 행방을 쫓았다. 술에 취한 그의 걸음이 살짝 비틀거렸다. 뜻밖에도 개들은 어느 한 사람에게 모여 있었다. 루카스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었다. 킁킁 코를 땅에 묻고 냄새를 맡던 개들이 디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파고들려고 했다.

“허어. 이건 뜻밖이군.”

당혹스러운 디아나의 표정보다 개들의 행동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전하, 개들을 거둬 주시지요.”

디아나는 소란을 피우면 개들이 흥분할까 봐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그러나 개들은 집요하게 디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물어 당기고 앞발까지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댔다. 그것도 하필 디아나의 하반신이 중점이었다. 그 원인을 알고 있는 디아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기이한 일이다.”

루카스가 휘파람을 불자 개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개들의 무서운 시선이 디아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은 피 냄새가 나는 곳에만 달려들거든. 내가 그렇게 가르쳤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주시했다.

“어디 다친 데라도?”

섬뜩한 목소리가 디아나의 귓가를 울렸다. 상처 따윈 없었다. 임기응변으로 상처를 낼 틈도 없다.

“사람이 많아서 개들이 착각했나 봅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 개니까 잘 알지. 저 아이들은 살아 있는 피 냄새만 쫓거든.”

루카스가 성큼 디아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서 피가 나는 모양인 건 확실한데, 상처는 없고…….”

오소소 디아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디아나는 월경이 없다는 증상을 고하고서야 황태자비 후보에서 풀려났다. 즉, 디아나가 정상적으로 월경을 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그것은 반역이다.

“조사를 해 봐야겠다.”

“예? 그러실 필요는.”

“아니. 황실의 연회에서 살아 있는 피 냄새가 풍긴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잖나.”

루카스의 녹안이 사냥감을 좇는 것처럼 집요하게 디아나를 봤다. 디아나가 잘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루카스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영애도 모르게 출혈이 있을 수도.”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루카스가 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피할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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