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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1화 (91/184)

91화

드디어 국혼의 날이 밝았다. 황실의 주관으로 행해지는 국혼은 일반 결혼식과는 차원이 다른 살인적 일정을 자랑했다.

그 시작은 교황청의 주관으로 열리는 예배였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예배였기 때문에 국혼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모두 새벽의 이슬을 맞으며 어두울 때 저택을 나서야 했다. 물론, 디아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시겠어요?”

샬롯이 몇 번이나 디아나의 안색을 살폈다. 본래도 월경 때마다 힘들어하는 디아나였지만, 이번에는 월경을 미루는 약초를 쓴 탓인지 평소보다 안색이 훨씬 창백했다.

“어쩔 수 없지. 오늘만 버티면 되잖아.”

디아나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안색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바른 장밋빛 화장품을 덧칠해서 감출 수 있었지만, 약간의 어지럼증과 복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샬롯.”

디아나의 예복 여기저기를 다시 매만져 주는 샬롯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게다가…… 예배할 때 여인들은 베일을 쓰니까 그 틈에 좀 졸면 돼.”

샬롯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을 하는 디아나다.

“아무튼, 아가씨는.”

샬롯이 곱게 타박하는 사이, 마차가 황실의 예배당 앞에 멈췄다.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에겐 각자 지정석이 있었고, 샬롯처럼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입궁한 이들은 대기하는 자리가 따로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안내를 위해 다가오는 시녀를 본 디아나가 말했다. 거의 마지막에 도착한 덕분인지 디아나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가 시작됐다. 노쇠해서 거의 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교황이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제단에 올랐다.

“오늘은 제국의 경사이자, 신의 축복을 받은 날입니다.”

교황의 목소리가 예배당을 울렸다. 디아나는 베일을 쓴 채로 에드윈의 모습을 찾았지만, 보이는 것은 먼 곳의 등뿐이었다. 어차피 국혼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종일이 걸릴 예정이니 에드윈을 만나는 것도 금방이다. 그렇게 생각한 디아나는 베일 아래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샬롯에게 한 말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

디아나가 잠깐 잠들었던 사이, 예배가 끝났다. 국혼이라는 경사를 기리고 신의 축복을 간구하는 1부 예배였다. 황실의 위엄을 보여 주듯 국혼에선 숨을 돌릴 틈조차 없었다. 이런 고통을 견디는 것도 귀족의 의무였다. 디아나 주위의 하객들도 약간 지친 표정을 우아한 미소로 숨기고 있었다.

“이제부터 교황청이 집전하는 황실의 결혼 예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여태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 그러나 디아나를 포함한 귀족들의 표정엔 한층 생기가 돌았다. 비록 그 식순이 너무 길어서 고통을 줬지만, 황실의 결혼식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헤렌 제국 교황청은 신의 이름으로 유구하고 고귀한 황실의 후계자, 루카스 파렐과 비비안 샤리즈의 성혼을 이루고자 합니다.”

제국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이 국혼의 위엄이 빛나리라. 교황의 기나긴 축사가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각각 새로운 황태자비와 결혼으로 어엿한 성인으로 거듭날 황태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 교황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지쳐서 정신을 놓을 때쯤, 파이프 오르간이 다음 식순을 알렸다.

“헤렌 제국의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쿵, 예복을 입은 기사 둘이 예배당 입구에서 들고 있던 봉을 내리찍자 문이 열리고 하얀 예복을 입은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고요했던 예배당이 낮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열린 문 사이로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져서 루카스의 금발이 반짝였다.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루카스는 오만하고 당당했다.

“그럼, 이 영광된 국혼의 신부를 맞이하겠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국혼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곡이었다. 곧 멋들어진 예복을 갖춰 입은 샤리즈 후작이 먼저 보였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는 정작 면사포를 써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복만큼은 두고두고 이야기가 나올 만큼 대단했다.

“샤리즈 후작은 아버지 된 자격으로 신부를 인도하십시오.”

그러자 후작이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신부가 입은 드레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뒷자락이 길었다. 그 드레스 자락을 들기 위해서 둘씩 짝을 지은 화동이 무려 8명이나 동원됐을 정도다.

면사포의 길이도 그만큼 길어서 한 걸음마다 시간이 꽤 걸렸다. 샤리즈 후작은 서두르지 않고 제 딸의 손을 잡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엔 승리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천천히 버진 로드를 따라 걷는 신부의 모습이 어느새 디아나의 앞까지 왔다. 신부가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교황청의 주교들이 은 막대기 끝에 추처럼 달린 향로를 흔들며 축복했다.

참으로 고귀하고 엄중한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실의 격에 맞춰 우아했다. 디아나는 그녀가 느린 걸음으로 제 앞을 지나갈 때 조금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디아나만이 이 길의 끝에 놓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대신해서 비비안이 이 길을 걷게 됐다. 어설픈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저 씁쓸했다. 디아나가 모르는 한 여인이 불행을 향해서 걸어가는 이 길이 아름답고 영광될수록 그 씁쓸함은 짙어졌다.

“이제부터 결혼 서약을 하겠습니다. 본 교황은 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묻겠으니, 두 분도 신의 자식으로 답하고 맹세하십시오.”

샤리즈 후작이 비비안의 손을 루카스의 손에 넘기자 교황이 바로 말을 이었다. 모두 선망의 눈빛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교황은 국혼의 의무를 신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늘어놨다. 디아나에겐 아픈 기억이 살아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우연이었을까. 그 순간, 에드윈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꽤 먼 거리였지만, 디아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로써, 본 교황은 성스러운 국혼이 성사되었음을 공언합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또한, 새로운 황태자비 전하의 즉위를 경하드리며 교황청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처음으로 디아나는 루카스의 정비가 되는 미래를 피했다. 지금은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

성혼을 알리는 축포가 온 수도를 울렸다. 황실에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배가 끝났고 피로연이 시작됐다. 그제야 귀족들도 한숨을 돌리며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아마 오늘 가장 고생이 많았을 신부, 아니 새로운 황태자비도 무거운 예복을 벗고 물 한 모금이나 겨우 마셨을 것이다.

“아가씨, 많이 힘드셨죠.”

샬롯도 다가와서 디아나의 시중을 들었다. 디아나는 길어도 너무 길었던 예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평생 해야 할 기도를 다 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신부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그녀의 처지에서 제 과거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하지 않을지.”

샬롯이 하는 말의 의미는 지금 예복을 갈아입자는 뜻이 아니었다. 월경 중인 디아나를 배려해서 돌려 말한 것이다.

“……아니, 그냥 웃전에 인사만 드리고 그만 돌아가자.”

“그게 더 좋겠네요.”

디아나는 제 역할을 잘 해냈다. 아무리 까다로운 황후라도 이만 물러가겠단 요청을 무시할 정도로 비상식적이진 않았다. 디아나가 흘깃 연회장의 상단을 올려다봤다.

황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 주위로 꽤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디아나는 드물게 신분제도가 있는 세상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공작 영애인 디아나가 다가가자 그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은 알아서 눈치껏 길을 텄다. 그러나 황후에게 도달하기 전에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선대공비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디아나가 그레이스 앞에서 예를 갖췄다. 자연스럽게 선대공비 뒤에 서 있던 에드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대공 전하도 계셨군요.”

디아나의 입에 은은한 미소가 묻어났다. 에드윈도 그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시선이 스쳤다. 예복을 입고 선 에드윈은 오늘의 주인공인 루카스 따위는 갖다 댈 수도 없이 확고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까 예배당에서도 곧은 그의 등만 보였을 정도다.

“오랜만이군, 디아나 영애.”

에드윈의 말이 퍽 짓궂었다. 며칠 전에도 제 침실에 찾아왔으면서 지난번 새벽에 헛걸음한 것을 빗대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 결국 딜런에게 그 모습을 들킨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디아나가 자신을 마다한 이유를 알게 됐지만.

“예…….”

디아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딜런의 여인학개론을 듣지 않았다면 조금 서운할 뻔했다.

“공작 영애는 이 상황이 불편하지도 않은가 보군.”

선대공비의 말이 두 연인의 사이를 끊었다.

“나라면 이 자리에 나올 생각도 못 했을 텐데.”

노골적인 힐난이었다. 사실, 디아나가 입궁했을 때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바로 전 황태자비 후보였던 디아나가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이 맞냐는 말도 있었고 오히려 디아나의 모습이 의연해서 헛소문을 불식시키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무척, 쉽지 않은 길이지 않나.”

그러나 선대공비는 디아나의 결정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찌 됐든,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지 않냐는 우회적인 말이었다.

“예. 황실의 경사이니만큼 조금 무리를 했습니다.”

디아나가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웃전께 인사를 올리려던 참입니다.”

“아, 그래. 영애는 몸이 좋지 않았지.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선대공비가 끝까지 말꼬리를 붙들었다.

“어머니, 저쪽에서 샤리즈 후작부인이 찾으시는군요.”

에드윈이 둘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후작부인은 이제 황태자비의 모친이었다. 에드윈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선대공비가 다가가면 무슨 대화라도 일어날 것이다. 선대공비는 디아나를 흘깃 보고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돌아섰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사과하지.”

“괜찮아요, 전.”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디아나를 보는 에드윈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배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았을지 몰라도 에드윈의 눈엔 디아나가 무척 피곤하고 안색이 한층 창백한 게 다 보였다.

“그…… 몸이 좋지 않다지.”

“예? ……아, 네.”

디아나의 월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둘은 처음 맞이하는 어색한 화제에 약간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웃전에 인사만 올리고 돌아가 쉬도록 해. ……아, 그 전에 내가 질문이 하나 있는데.”

에드윈이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도 어려운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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