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90화 (90/184)

90화

초겨울의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에드윈은 그저 말없이 제 앞을 묵묵히 바위처럼 막아선 그레이를 넘지 못하고 허탈한 걸음을 돌려야 했다.

무려 대공이 이슬을 맞아 가며 얻은 거라곤 그레이의 성이 셔먼이라는 것과 그가 제국에서 명망 높은 벨루아 기사단 출신이라는 눈곱만큼도 궁금하지도 않았던 사실뿐이었다.

“딜런이 알면 평생을 놀릴 일이군.”

고작 집사장이다. 왕년에 얼마나 전장을 날고 기었든 에드윈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에드윈을 막아선 그레이의 눈빛은 무척 지엄했다. 그 표정이 좀 다르긴 했지만, 눈빛은 샬롯과 똑같았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디아나의 선친이 살아 있었다면, 그리고 에드윈의 밀회가 들켰다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국혼 때나 볼 수 있는 건가.”

그래도 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은 한숨을 쉬곤 지겨운 대공저로 걸음을 돌렸다.

***

디아나가 에드윈의 방문을 알게 된 것은 늦은 오전이었다. 샬롯은 뜨거운 물을 담은 가죽 주머니를 건네며 그 소식을 전하곤 살짝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샬롯이 그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목석같은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을 보면 꽤 통쾌한 장면이었으리라.

“새벽 3시에……?”

“그러니까요. 전하도 참.”

아무리 밀회라고 해도 늦은 시각이었다. 최근 에드윈의 발걸음이 뜸해서 바쁜 줄은 알았지만, 그만큼 초조한 모양이다. 디아나는 내심 그게 싫지 않았다.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갔을 에드윈이 안쓰럽긴 해도 그 또한 애정의 증거였다.

“당분간은 오지 마시라고 할 걸 그랬나.”

“글쎄요, 굳이 아가씨가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는 없죠.”

샬롯은 아직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디아나에게 이불을 더 끌어다 덮어 줬다.

“그래도…….”

“대공 전하가 눈치가 없으신 거예요.”

단호한 말투였다.

“그런 걸 어찌 여인이 직접 입으로 말해야 아나요? 어련히 눈치를 채셔야지, 원.”

디아나에겐 달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이미 찾아온 상태였다. 시아 수녀원의 검증을 끝낸 후, 샬롯이 비밀리에 월경을 미룰 수 있다는 약초를 달여다 먹인 것이 천운이었다. 오래 쓰면 독이 되지만, 며칠만 쓰는 건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번엔 유난히 몸이 불편하네.”

디아나는 검증을 받기 위해 입궁하던 날 마지막으로 약초를 달여 마셨고, 복용을 끊자 며칠 후에 월경이 찾아왔다. 다만, 약초의 부작용인지 평소보다 복통이 심했고 영 기운이 없었다.

“큰일이네요. 이래서 국혼에 참석하셔도 될까요? 몸에 무리가 갈 거예요.”

“빠질 수도 없잖아.”

“아가씨가 편찮으시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사실이다. 어쩌면 황실에서도 그런 반응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황실에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초대장을 보냈고, 그것을 디아나가 병을 이유로 거절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어쩌면 국혼에 있어서 디아나는 불편한 손님이 될 수도 있다. 황족들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황태자비가 될 영애에겐 좀 미안한 일이다. 모든 주목이 디아나에게 쏠릴 테니 말이다.

“아니, 난 갈 거야.”

디아나의 표정이 단호해서 샬롯은 더 말릴 수 없었다.

“지금쯤, 다들 국혼에서 밀려난 내가 비참한 신세를 한탄한다고 떠들고 있을 텐데.”

아무도 디아나에게 소문을 전하지 않았지만, 그런다고 모를 수도 없었다.

“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아니, 보여 줘야 해.”

국혼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영애가 공작이 된다면 그 누가 두려워할까. 자신이 디딜 자리는 자신이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국혼은 정해졌고, 상대는 바뀌지 않는다. 디아나는 이제 병약하고 처연한 영애를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국혼은 서막이야.”

디아나의 뜻을 읽은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헤일리 부인에게 주문한 드레스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평소 즐겨 입던 푸른빛보다 한층 짙은 빛의 과감한 드레스를 주문한 것은 디아나의 의지를 보여 줬다.

그뿐 아니라 샬롯에게 미리 보석을 전부 꺼내어 보수해 둘 것을 명령했다. 디아나는 자신에게 가장 찬란하고 빛날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요. 이제 아가씨라고 부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샬롯, 또……!”

최근 툭하면 눈물을 글썽이는 샬롯을 보며 디아나가 곱게 타박했다. 늘 병약했던 디아나가 어느샌가 이렇게 자라서 스스로 서는 모습을 보는 건 그 꼿꼿한 샬롯마저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보다, 내가 부탁한 건?”

평소라면 직접 움직였겠지만, 이번 월경의 여파는 상당했다. 아무래도 약초가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디아나는 그레이에게 제롬 경을 만나고 오라고 지시했다. 좀처럼 디아나의 침실엔 발을 들이지 않는 그레이니만큼 샬롯이 대신 전할 것이다.

“네. 트리샤 블랑이 비비안 영애, 그러니까 차기 황태자비와 함께 입궁하는 게 맞더군요. 황태자비의 정식 시녀 자격이래요.”

“그래? 무척 기쁘겠어.”

디아나의 어조가 신랄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제 어머니를 찾을 여유도 없는 것 같아요. 성가신 동생은 물론이고요.”

지금 트리샤는 비비안의 입궁을 돕느라 정신이 없었다. 블랑 남작은 매달 샤리즈 후작에게서 돈만 받을 수 있다면 제 처나 자식 따윈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었다. 디아나가 사라와 니콜라의 거처를 옮겼을 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누구도 그들 모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그들의 가족조차도.

“우리로선 편한 거지.”

디아나는 불필요한 동정은 버리기로 했다. 사라와 니콜라를 외면한 것은 그들의 가족이지 디아나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서 디아나가 알고 있는 마녀 트리샤의 정체를 끄집어내는 것뿐이다.

“그 니콜라라는 아이는 몰라도, 사라 블랑에겐 뭔가 비밀이 있어.”

“전 아가씨의 판단을 믿어요.”

샬롯이 디아나를 보며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트리샤와 함께 떠올렸던 불쾌감을 눌렀다. 방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도 문제가 된다. 지금 디아나는 자신의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디아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앞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우선, 그 책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 디아나의 의지가 책의 큰 흐름을 바꾼 것은 처음이었다. 그건 무수한 가능성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지금 디아나는 혼자가 아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국혼 전야가 다가왔다. 샤리즈 후작가는 밤이 저물었는데도 분주했고, 황실에서 예식을 전담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와 에드윈은 비슷한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달을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국혼의 당사자이자 주인공인 루카스는 이 상황이 꽤 지겨운 모양이었다.

“전하, 내일이 국혼이니 이만 쉬시지요.”

시종장이 점잖게 권유했지만, 루카스는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루카스의 손엔 시침 시녀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시녀의 뒤통수를 제 중심에 대고 꾹 누르는 행동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크……읍, 흡!”

루카스가 무자비하게 시녀의 머리를 누르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시침 시녀의 흔들리는 가슴은 여기저기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루카스에게 시침 시녀란 새로운 방면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시녀의 머리채를 잡은 손길이 빨라지더니 이내 우뚝 멈췄다. 루카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녀의 고개를 제 중심에 꾹 누르고 비벼 대더니 만족감이 밀려오자 아무렇게나 시녀의 머리를 팽개쳤다.

“……커억, 후우…… 후…….”

시녀가 입 주위로 침과 정액이 섞인 탁한 액체를 줄줄 흘리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옷도 반쯤은 헤쳐진 채로 넋이 나간 표정이 더해지니 처참한 느낌마저 풍겼다.

시종장은 그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 시녀에게 물러가란 눈짓을 했다. 시녀는 그 와중에도 루카스에게 예를 갖추고 모습을 감췄다.

“이젠 이 짓거리도 따분하군.”

시침 시녀가 나가는 것을 봤는지 어느샌가 시녀들이 다가와서 젖은 수건으로 루카스의 몸을 닦아 냈다.

“황태자비 전하를 맞이하시면 다를 겁니다.”

“왜, 샤리즈가의 딸은 젖가슴이나 구멍이 다른가?”

적나라한 루카스의 말에도 시종장은 평정을 잃지 않았다.

“시침 시녀는 겨우 귀족의 작위만 있을 뿐, 전하를 받아들이기엔 한미한 신분입니다. 고귀한 정비와는 비교할 수 없지요.”

“그러길 바라지.”

처음엔 강렬하게 다가왔던 육체적인 쾌락도 점차 시시해졌다. 새로운 시도를 몇 가지 해 본 적도 있지만, 그때뿐이었다. 천한 것들이 눈치를 살펴 가며 억지로 온몸을 핥아 대고 빨아 대는 꼴은 꽤 우스웠다.

루카스가 아래의 구멍을 찾아 페니스를 꽂으면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참아 냈다. 그런 정사에 존재하는 쾌락은 오직 루카스의 배설감 뿐이었다. 정서적 교류도 서로를 위한 전희도 없는 관계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상을 내리고 싶은 아이가 있으십니까.”

시침 시녀를 들이는 목적은 국혼을 앞두고 정사와 여인의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곧 이 황실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거다. 그것을 배려한 시종장의 말에 루카스가 픽 실소를 뱉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것들인데, 있겠나?”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올렸습니다. 이만, 침소로 드시지요.”

시녀들이 루카스의 몸을 다 닦고 옷까지 입힌 후에 물러났다. 루카스는 흘깃 시선을 돌려 창밖의 달을 봤다.

“정원이나 한 바퀴 돌겠다.”

아무리 루카스라도 제 결혼 앞에선 여러 생각이 드는 것일까. 시종장은 만류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개들도 데려와라.”

시종장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늘은 루카스의 뜻대로 해 주라는 황후의 전언이 있었다.

“곧 대령하겠습니다.”

루카스가 두툼한 옷감으로 만들어진 로브를 걸쳤다. 조금 전의 일방적인 사정으로는 아직 욕구가 다 해소되지 못했다. 루카스에겐 국혼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황태자비가 생긴다는 것은 앞으로 지겹고 귀찮은 일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하나같이 따분하군.”

황태자비에 대한 기대는 진작 접었다. 어차피 모후를 위시한 세력이 고른 여인이고 세월이 흐르면 자신의 모후처럼 될 여인이었다. 최소한의 존중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선 시침 시녀보다 더 성가신 존재기도 했다.

“이젠 후사에 대한 독촉까지 생기겠지.”

내일 루카스와 결혼할 영애는 반드시 후사를 낳아서 이 황실의 대를 이어야 했다. 충분한 후사를 보기 전까진 루카스도 함께 시달릴 테다. 수줍음이 많고 뻣뻣한 귀족 영애로 자랐을 여인의 위에 올라타서 씨앗을 뿌리기 위해 허리를 흔들어 댈 제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 루카스에게 제 신부는 딱 그 정도의 존재였다.

디아나는 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