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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9화 (89/184)

89화

국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디아나는 그곳에 하객으로서 참가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기존의 후보였던 디아나를 초청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들의 뜻이 그렇다면 오히려 자리를 빛내 줄 마음도 있었다.

“역시, 이 원단을 남겨 두길 잘했어요.”

헤일리 부인이 은은한 푸른빛의 드레스를 입은 디아나를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헤일리 부인이 너무 바쁠까 걱정했는데, 애써 줘서 고마워요.”

“샬롯 부인은 무슨 말씀을, 디아나 영애가 드레스를 입어 주셔야 제 꿈이 현실에 그려진답니다.”

샤리즈 후작가에서 국혼을 준비하며 엄청난 양의 드레스를 주문했고 덩달아 다른 귀족 부인들의 주문이 쇄도했지만, 한 명의 디자이너로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뮤즈였다. 드레스에 있어서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장인다운 자세였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요.”

지금 헤일리 부인과 샬롯은 같은 마음이었다.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들어와서 디아나를 비췄다. 푸른 눈동자와 같은 빛의 드레스에는 목의 라인을 따라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장식이 깃처럼 돋아 있었다. 디아나의 기품과 우아함, 무엇보다 나이에 맞춘 성숙미를 살린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머지 장식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국혼 때문에 바쁜 와중에 와 줘서 고마워요.”

샬롯이 헤일리 부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히려 헤일리 부인은 국혼이란 단어가 나오자 슬쩍 디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밖에선 말할 수 없지만, 제게 있어선 국혼보다 중요한 고객이 디아나 영애인걸요.”

사교계에선 디아나가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 중심에서 사는 헤일리 부인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헤일리 부인은 소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도 잘 알았다. 그녀는 단박에 지금 사교계에서 도는 무려 ‘비참해진 공작 영애’에 관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요? 그건 내가 고마운 일이군요.”

“천만에요, 영애.”

헤일리 부인의 눈앞엔 여전히 도도하고 아름다운 디아나만이 있었다. 내막은 모르지만, 디아나에겐 이번 사건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헤일리 부인은 이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이다. 디아나만큼 완벽한 뮤즈를 만나는 것은 예술가의 축복이었으니까.

“참, 헤일리 부인. 국혼이 끝나고 나면 드레스를 한 벌 더 지어 줄래요?”

“물론이지요. 어떤 드레스가 필요하세요?”

“역시, 나도 푸른색이 마음에 들어요.”

디아나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아직은 공작 영애에 불과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흐린 푸른빛이 아니에요. 더 진하고, 더 위압감을 주는 푸른색이 좋겠어요.”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었다. 디아나가 새로 지으려는 것은 고작 파티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한 옷이 아니었다. 하지만 색만 바꾸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디아나는 더 큰 변화를 보여 주고 싶었다.

“영애껜 어떤 색이든 잘 어울리시겠지만, 마침 제게 떠오르는 원단이 있군요.”

헤일리 부인의 눈빛이 영감으로 가득했다. 디아나는 거울에서 돌아서 헤일리 부인을 봤다.

“그리고 아주 과감했으면 해요.”

“과감함……!”

“네, 이젠 어른이 됐다는 걸 세상에 보여 주고 싶어요.”

반짝, 디아나의 눈빛이 빛났다. 디아나는 이미 세상을 향한 데뷔 장소를 정했다. 황실과의 결혼식 따위가 아닌 자신의 공작위 수여식이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디아나 카를로서 이 세상에 내딛는 첫걸음이었다.

***

최근 대공저가 부쩍 긴장감에 휩싸였다. 국혼에 관한 일련의 사건이 지난 후로 선대공비가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다. 최대의 피해자는 역시 에드윈이었다.

“국혼, 국혼…… 온 세상이 다 그 소리뿐이다.”

“그야 실제로 국혼이 며칠 안 남았으니까요.”

에드윈은 뭐라 더 말하려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초리에 시선을 피했다. 그레이스는 황후에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지병인 편두통이 도로 도졌고,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에드윈의 집무실을 찾곤 했다.

평소 늦게까지 집무실에 머무는 에드윈의 습관을 알기 때문이었는데, 바로 이 부분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지면, 그만큼 디아나를 보러 갈 기회가 줄었다.

“그래도 주무셔야죠.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니.”

“저는…… 어머니와 달리 건장하잖습니까. 그리고 전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는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퍽 잘 나왔다.

“정말 날 염려한다면, 국혼이 끝난 후에 애써 보렴.”

“저는 늘 대공가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네 의무가 남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익숙한 화제였다. 에드윈이 제 어머니를 살짝 노려봤다.

“이렇게 된 이상, 국혼이 완전히 잊힐 정도로 성대한 결혼식을 우리 대공가에서 여는 수밖에.”

그는 디아나를 만나기 전부터도 그런 목적으로 결혼을 이용하는 것을 혐오했다. 다행히 에드윈은 황실의 소속이 아니었으며 누구의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는 어엿한 대공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를 만났을 때, 떳떳할 수 있었다.

“결혼은 제가 사랑하는 여인과 서로 원하는 때에 할 겁니다.”

에드윈의 마음 안에선, 예배당의 맹세 이후로 이미 반려를 들인 셈이다. 아직 선대공비에게 알리진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디아나와 준비를 마쳤을 때 결혼할 결심이었다.

“그건 네 선택 이전에 있는 의무다.”

스물하나나 된 대공에게 아직 비가 없다는 건 의아한 부분이었다. 루카스의 국혼도 늦었다고 하는 판국에 세 살이나 많은 에드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 아들의 성정을 잘 아는 그레이스가 여태는 참았지만, 이번 국혼으로 그 심기가 무척 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처리할 의무는 아니겠지요?”

에드윈이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오늘 밤은 충분히 늦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에드윈, 나는…….”

“제가 있는데, 더 걱정이 있으십니까.”

에드윈의 또렷한 시선은 제 아버지를 빼닮았다. 그레이스는 이미 장성한 아들을 두고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만 주무시지요. 어머니께서 절 걱정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요.”

무뚝뚝한 제 아들치고는 제법 다정한 말이었다. 그레이스는 새삼 에드윈이 어엿한 성인이 됐음을 깨달았다.

“언변이 늘었구나.”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니 저런 살가운 말도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착각도 함께 했다. 그건 어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사랑을 아는 남자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으로선 그레이스가 모르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이다.

“오늘은 그만해야겠다. 곧 국혼에 가서 억지웃음을 지으려면 건강을 돌봐야 하니까.”

그레이스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지만, 에드윈은 모른 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주무십시오.”

“……그래, 너도 이만 자라. 아무리 젊다 해도 무리하면 못쓴다.”

최근 에드윈의 얼굴이 핼쑥해 보일 때가 있었다. 일시적인 착각인지 대공저의 업무가 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로선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에드윈은 대공저의 희망이자 그레이스의 전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전하께서도 고생이 많으시군요.”

선대공비가 시녀장과 함께 집무실을 나가자 그것을 본 딜런이 불쑥 들어와 짓궂은 말을 건넸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공이라도 어머니에겐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 것이다. 그 속내를 잘 아는 에드윈이 딜런을 노려봤다.

“무리하면 못쓴다는 말씀은 저도 같은 의견인데요.”

딜런이 말하는 뉘앙스는 선대공비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에드윈이 어느 부분에서 무리하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한다.”

에드윈이 서늘하게 선을 그었다. 딜런은 입을 다물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에드윈이 루모스 기사단과 아무리 격의 없이 지냈다고 해도 군주와 기사단 사이엔 엄연한 선이 있었다. 무엇보다 에드윈은 제 여인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무는 고집스러운 사내였다. 그게 그의 신사적인 면모인지, 지나치게 강한 독점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벌써 새벽 3시가 넘었습니다.”

“안 물어봤다.”

“……그분도 주무실 겁니다.”

그러나 딜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에드윈이 서랍에 숨겨 둔 암행용 로브를 걸쳤다. 검은색의 로브는 에드윈의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를 담아 적당히 낡고 적당히 평범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에드윈의 생각이었다. 고작 로브 한 장으로 감추기엔 그의 체격이 너무 건장하다는 것을 간과한 거다.

“내일은 이른 오전부터 국혼 때 있을 루모스 기사단의 열병식 준비가…….”

“아침까지 돌아오겠다.”

딜런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에드윈이 사뿐하게 창틀을 넘었다. 딜런이 할 수 있는 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

집사실을 지키며 졸고 있던 그레이가 외부의 기척에 눈을 떴다. 새벽 3시가 넘었으니 밤손님을 포함해서 더 올 손님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밤손님의 열정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기사 출신이라더니, 반응이 빠르군.”

그 반응을 이끈 장본인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레이는 조금 황당한 눈으로 그를 봤다. 에드윈과 단둘이 이렇게 가까운 공간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는 주무십니다.”

“그럴 시간이잖나.”

너무 태연한 발언에 그레이는 잠시 에드윈을 응시했다. 비록 노장이라고는 해도 그레이의 체구는 에드윈 못지않게 건장했다. 이른바 실전 근육이라는 것이다.

“샬롯 부인의 말로는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고 하는군요.”

에드윈은 드물게 자신과 눈높이가 맞는 사람을 만났다. 루모스 기사단에서도 가장 큰 게 에드윈이니 그레이도 꽤 드문 장신이었다.

“그대가 젊었다면 우리 기사단에 발탁했을 텐데, 아쉽군.”

“지금도 공작저를 지킬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그레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에드윈도 무예를 연마한 자로서, 집사장의 정복 아래 가려진 몸은 바위처럼 단단할 것이란 걸 척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다행이군. 그럼, 난 이만.”

에드윈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디아나의 침실로 향하려 걸음을 틀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예를 갖추던 그레이가 앞을 막아섰다. 에드윈은 눈썹을 꿈틀하는 것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오늘 아가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푹 주무셔야 한다는 샬롯 부인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알았대도.”

후, 그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이 혈기 넘치는 젊은 대공은 지금 뭘 모르고 있었다.

“푹 주무셔야 한다는 것은 침실에 다른 이를 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도?”

그제야 한 박자 늦게 에드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도.”

잠깐, 건장한 두 남자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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