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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8화 (88/184)

88화

새로운 국혼 상대가 발표되기 무섭게 샤리즈 후작가엔 선물이 쌓여 갔다. 차기 황태자비와 외척이 될지도 모르는 가문에 아첨하고 싶은 자들은 넘쳤고, 매일 밤마다 연회로 저택에 불이 꺼지질 않았다.

“좀 쉴래. 저건, 그냥 시녀들에게 확인하라고 해 줘.”

비비안은 산더미 같은 서찰과 선물에 지친 기색으로 손짓을 했다.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인 헤일리 부인이 방문해서 종일 비비안의 혼을 쏙 빼놓고 간 후였다. 트리샤는 그 곁에서 누구보다 분주하게 비비안을 거들었다. 초겨울인데도 땀이 나고 더워서 혼이 날 정도였다.

“저기, 비비안. 보석상에서 온 상자들도 안 볼 거야?”

귀금속은 포장이 달랐다. 그건 디아나의 곁에서도 자주 본 것들이었다. 작고 단단하고 고급스러운 상자. 고급스러운 리본을 풀고 딸각, 상자를 열면 반짝이는 것들이 트리샤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 트리샤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응, 나 피곤해.”

“그럼 내가 대신 확인해 둘까?”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반짝이는 것들은 어찌나 매력적인지. 트리샤는 자꾸만 보석 상자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비비안은 물끄러미 그런 트리샤를 봤다. 샤리즈 후작 내외와 달리 비비안은 무척 유순하고 차분했다. 무엇 하나 디아나보다 뛰어나진 못했지만, 크게 트리샤를 힘들게 하는 점이 없어 다행이었다.

“네가 왜?”

하지만 방금 나온 말은 트리샤의 예상 밖이었다. 디아나조차 트리샤에게 그런 질문 한 적은 없었는데, 비비안은 트리샤의 눈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응? 왜냐니, 그건 그냥 네가 피곤하다고 하니까 널 위해서…….”

지레 놀란 트리샤가 도로 순진한 소녀의 가면을 썼다. 걱정스레 비비안을 보는 눈빛과 표정은 꽤 수준급이었다. 비록 디아나를 향할 때처럼 진심이 담기진 않았지만, 그것만은 트리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리샤.”

“으응?”

비비안을 너무 얕잡아 봤던 것일까. 그 성질 사납고 까다로운 후작부인의 딸인데 트리샤가 비비안을 과소평가했던 걸지도 모른다. 무척 짧은 순간이었지만, 트리샤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나 비비안이 제 초라한 욕망을 보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바보.”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비비안이 폭 하고 트리샤를 껴안았다. 트리샤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마. 저런 귀찮은 건 어머님이나 시녀장이 해 줄 거야.”

저런. 트리샤의 속내와는 너무도 다른 비비안의 목소리에 실소가 새어 나올 뻔했다. 그러면 그렇지. 한량에 가까운 아버지와 기가 드센 어머니 밑에서 쥐 죽은 듯 살아온 비비안은 이토록 순진해 빠졌다. 가끔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날 정도로.

“날 위해서라면 다른 걸 해 줘.”

“어떤 거?”

“음…… 우리 목욕하고 실뜨기하자. 트리샤 네가 잘하잖아.”

둘의 나이는 모두 열여덟이었다. 게다가 비비안은 국혼을 앞두고 있었다. 다 큰 어른인데 저리 귀한 보석들을 쌓아 두고 하자는 게 고작 실뜨기라니 트리샤로선 이해가 안 가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목욕하고 특별히 귀한 선물만 몇 개 더 확인할까?”

종일 종종거리며 비비안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 정도 눈의 호사는 누리고 싶었다.

“그중에 특별히 너한테 어울리는 걸 찾아보자. 입궁할 때 그걸 걸치면 더 예뻐 보일 거야.”

트리샤가 비비안을 보며 특유의 달콤한 꼬드김을 시작했다. 실제로 트리샤가 온 이후 비비안의 불평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후작부인도 꽤 만족한 눈치였다.

“몇 개만 보는 거야. 그리고 오늘도 내 침실에서 같이 자.”

“그래, 알았어.”

비비안이 싱긋 웃으며 트리샤의 손을 잡았다. 트리샤는 아직 노동의 흔적이 다 지워지진 않았지만, 과거의 불고 터진 흔적이 죄 사라진 손이 꽤 만족스러웠다.

샤리즈 후작가에 온 후로 트리샤는 비비안의 시중만 들었지 노동은 모두 하녀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비비안이 졸라 대서 같이 목욕도 하는 데다 그 좋은 크림들을 나눠 발랐으니 날이 갈수록 트리샤의 피부에서도 윤이 났고 이제야 겨우 영애다운 모습이 됐다.

“얼른, 트리샤.”

트리샤는 제 손을 잡아끄는 비비안에게 마지못해 끌려갔다. 귀찮고 성가신 것은 니콜라와 마찬가지였지만, 비비안의 비위를 맞추면 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게 트리샤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맞다, 아버지께 들었는데 네가 이번에 황실에 가서 내 이야기를 아주 좋게 전했다며.”

이 순진해 빠진 영애는 트리샤가 입궁한 것이 그저 제 평판을 전하기 위한 일인 줄 알았다. 샤리즈 후작부인은 제 딸이 지레 겁을 먹을까 봐 걱정됐는지 황태자비 검증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고 했다.

“아니야, 난 그냥…….”

트리샤가 한 건, 배신이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눈을 감은 디아나를 두고서 했던 명백한 기만과 거짓말. 디아나가 그 후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차마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그렇게 믿어야 살 수 있다. 트리샤는 그날 밤 두려운 존재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 파렴치하고 지독한 배신자.’

늪처럼 자신의 발목을 옥죄고 아래로 끌어내리는 어둠은 트리샤에게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 늪의 바닥이라고 속삭였다.

‘너 같은 건, 영원히 이 밑바닥에 있어야 해.’

그건 트리샤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태어난 곳으로 끌어 내려지는 것, 그곳에서 평생을 빛 한 조각 보지 못하고 질척한 늪 일부로 보내야 하는 것. 그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을 것이다.

“난, 아무것도…….”

악몽의 상념에 사로잡힌 트리샤가 자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에이, 우린 친구니까 당연한 거잖아.”

비비안이 트리샤의 손을 강하게 끌자 겨우 상념이 끊겼다. 트리샤의 시야엔 어둠 대신 환한 비비안의 미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로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맞아, 당연한 거지.”

트리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린 친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리샤가 품었던 어둠은 이미 그 늪이 삼켜 버렸을 것이다. 타고나길 선량한 디아나는 이런 트리샤라도 이미 마음에선 용서해 줬을지 모른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아도 디아나의 인생은 이미 풍요로웠다. 어린 시절부터 지켜봤던 친구니까, 디아나도 제 처지를 내심 짐작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트리샤, 넌 정말 착해.”

그래. 트리샤는 착한 아이다. 그저, 현실이 어쩔 수 없이 트리샤를 몰아넣었던 거다.

샤리즈 후작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증언이었고, 애초에 트리샤의 자리를 없애고 곁을 내주지 않은 것도 디아나였다. 트리샤는 디아나처럼 많은 것을 갖지 못했기에 살기 위해서 제 자리를 찾아야 했던 거다.

가엾은 트리샤는 기회를 스스로 잡아야 했다. 비비안처럼 순진한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어 황실에서 제 자리를 확고히 다져야 겨우 살아갈 만한 인생인 것이다.

“고마워, 비비안.”

트리샤는 이미 제 안의 어둠이 속삭이는 소리를 죽여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착한 아이인 트리샤다. 나쁜 일 따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착하디착한 좋은 친구.

그제야 트리샤는 자신이 망가트린 거울을 보며 만족할 수 있었다.

***

날이 추워지고 때론 서리가 얼기도 했다. 디아나의 염려로 밤손님은 2층의 창문이 아닌 1층의 집사실을 통해 몰래 들어와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했다. 그레이는 왠지 낯이 간지러워서 헛기침하며 그 모습을 모른 체했고, 샬롯은 예를 갖췄으나 눈빛으로 에드윈에게 상당한 부담을 줬다. 만일 디아나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들에게 살해당할 거라는 예감이 들 정도였다.

“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참 용맹한 것 같더군.”

제 몸의 찬 기운이 가시자마자 디아나를 끌어안은 에드윈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용맹……? 평범한 시녀장과 나이 많은 집사장인걸요.”

“아니, 눈빛에서 전사의 자질이 느껴져. 루모스 기사단에 영입하고 싶을 정도라니까.”

에드윈은 진심이었지만, 그저 농담으로 넘긴 디아나는 웃음을 흘렸다. 아마 에드윈을 노려보는 샬롯의 눈빛을 봤다면 웃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는 예전에 기사였대요.”

“체격이 무예를 연마한 것 같더군. 그대의 측근들이 믿음직해서 다행이다.”

“공작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겠죠?”

디아나의 설레는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에드윈은 어째서인지 순간적으로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공작이 된다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 자유롭게 나설 수 있다는 뜻이자 바깥세상을 누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어요.”

“그래.”

에드윈은 애써 제 이기심을 눌렀다. 마음 같아선 대공비로 삼아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다른 자들과 디아나의 아름다움을 나눌 생각도 없었다. 디아나는 오로지 자신만이 보고, 느끼고 싶은 소중한 존재였다.

차라리 에드윈이 어리석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에드윈은 디아나가 새장 속의 새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제 품에만 가둬 둘 수는 없다. 한 군데 갇힌 디아나는 시들어 갈 것이고, 그것은 에드윈의 불행이었다.

“하지만 좋은 자가 아니라면 내가 베겠다.”

에드윈이 나름대로 관대한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디아나가 만날 사람들을 벌써 질투하면서도 어찌 제 소유욕과 독점욕을 이성으로 억눌러 본 것이다. 무엇보다 디아나의 싱그러운 미소를 잃는 게 싫었다.

“아직 누굴 만날지도 모르는데…….”

“우선, 그대에게 흑심을 품는 사내놈들은 좋은 자에서 제외할 수 있지.”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서슬이 퍼런 말이었다. 디아나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드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 이럴 때면 에드윈의 상식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흑심을 품는 건 어떻게 알고요?”

“눈이 제대로 달린 사내라면 그대에게 흑심을 품기 마련.”

에드윈이 너무도 당연하게 답하며 디아나를 봤다. 표정만 보면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보일 정도였다.

“전하, 그건 그냥…… 남자들을 다 베겠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내 말을 잘 이해하는군.”

흐음, 디아나가 한숨을 쉬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빛내는 이 남자를 어디에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제가 카를의 공작이 되는 건 아시죠?”

“그걸 승인하는 의회에도 있었는데, 모를 수가.”

“공작이 되면 그런 의회에 저도 가게 될 거예요.”

“그렇지, 공작이 되면…… 아.”

그제야 에드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음흉한 귀족들의 수가 족히 수십은 넘었다.

“네. 의회에 출사하고 공작의 의무와 권리를 다할 거예요.”

그뿐인가, 공작은 기사단을 거느릴 수도 있고 그들을 측근으로 둘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루모스 기사단의 혈기 넘치는 얼굴이 스쳐 갔다. 그들은 에드윈의 절친한 친우들이었지만, 아름다운 여인 앞에선 멍청하고 끔찍한 세레나데를 부르는 족속에 불과했다.

“전하처럼요.”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에드윈은 함께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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