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한차례 큰비가 쏟아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가을이 끝났다. 비가 그친 후의 추위는 사람들의 옷 틈을 파고들었고, 온 풍경을 쓸쓸하게 물들였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다행히 디아나의 공작위를 주제로 한 의회는 본격적 추위보다 먼저 열렸다.
“저, 아론 카를은 서면으로 소명했듯이 디아나 카를에게 공작령이 상속되는 것에 동의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제국 의회에 나온 아론은 예복이 너무 어색했지만, 제 신념을 밀어붙이는 것은 능숙했다. 그가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다. 상대가 이론이든, 책이든, 의회의 귀족들이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본 의회도 카를가의 요청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공작령의 상속은 곧 공작위의 상속을 의미합니다. 제국의 공작이 바뀌는 중차대한 일이니 필히 지엄한 의회를 통한 결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장의 또렷한 목소리가 돔 형태의 의회장을 울렸다. 드노아 경의 측근 중 하나로 유명한 재상 하인리히였다. 드노아 경 본인은 노환을 핑계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지만, 의회 대부분은 그의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선대 카를 공작이신 아서 카를 경의 유지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또한, 선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너무 어린 나이에 당한 디아나 영애를 생각해 주십시오. 이 상속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발언을 마칩니다.”
“수고했습니다, 아론 경.”
그제야 아론이 자리에 앉았다. 말수가 적은 그에겐 한 달 치의 말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 무척 피곤해 보였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또한, 공작위란 중대한 사명이 있지요.”
귀족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법적으로 안 될 것은 없으나 어린 여인이라는 편견은 강력했다. 게다가 공작은 최고위의 귀족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영애가 공작에 올라 자신들을 내려 보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러나 옳은 일이다.”
저마다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서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에드윈이었다.
“의회는 옳은 일을 행하는 곳이 아니었나.”
오늘따라 정복을 갖춰 입고 온 에드윈이 위압적이었다. 그는 대공이란 신분에 걸맞게 남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앉아서 새카만 눈동자로 의회를 둘러봤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시옵니다만.”
재상인 하인리히도 우선은 에드윈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다만?”
에드윈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합법적이며 옳은 일이기에 공작령의 상속은 가능합니다.”
하인리히가 바로 태도를 바꿨다. 어차피 드노아 경도 그 정도 공작위는 내어 주라고 지시했다. 공작령은 수도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고, 무심한 아론이나 어린 영애에 불과한 디아나나 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를 비롯한 귀족들은 새로운 공작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결론이 있는데 이 소모적인 의회를 계속하는 이유는?”
에드윈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의 허리에 찬 검보다 그 목소리가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것은…… 아무래도 중대사이다 보니 신중에 신중을…….”
트집을 잡기 위해서다. 조금이라도 새 공작의 출현을 늦추고 최대한 괴롭히기 위한 귀족들 특유의 심술이었다. 에드윈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몸소 이곳에 온 것이다. 실제로 하인리히의 힘겨운 변명은 끝을 맺지 못하고 흐려졌다.
“본 의회는 충분히 신중했다고, 대공인 내가 자부하지.”
에드윈이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꺼내면 대공에게 대들겠다는 것이 된다. 그럴 용기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본 의회는…… 카를가의 요청을 승인하겠습니다.”
하인리히가 패배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일어서 의회장을 나섰다. 드노아 경이 만들어 온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의회의 힘은 고작 이 정도였다. 그들은 본래 권력에 복종하는 것에 길들었고 그건 드노아 경뿐만 아니라 에드윈에게도 무척 편리한 사실이었다.
***
디아나는 사라 블랑의 거처를 옮겼다. 실제 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외진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 장소의 법적인 주인이 ‘샬롯 마스’였기에 카를가의 이름으로 추적할 수 없는 장소였다. 샬롯은 입이 무거운 하녀와 오랫동안 카를가의 후원을 받아 온 늙은 수도사 한 명을 딸려서 보냈고 그레이는 따로 감시를 붙였다.
“제롬 경에게도 알렸으니, 곧 조사에 진척이 있길 바라야지.”
디아나가 보고를 들은 후, 간단한 소감을 남겼다.
“한 가지 전갈이 더 왔어요, 아가씨.”
“의회에서?”
“네.”
샬롯의 미소를 보자 굳이 전갈을 듣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네요.”
“나도 그래.”
부모의 것을 자식이 상속받는 일이다. 그게 그렇게 힘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다고 하네요.”
“왜?”
샬롯은 대답 대신 의회의 이름으로 온 전갈을 건넸다. 당장 제국의 가장 큰 행사인 국혼이 있으니 그것을 치른 후에 디아나에게 정식으로 공작위를 인정하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제국의 황제가 부여하는 공작의 자리였기에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고 그 앞에 국혼이 있다면, 굳이 반박할 수는 없었다.
“또 국혼이네.”
루카스는 디아나의 눈앞에 있든 없든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다.
“게다가 나더러 참여하라니…… 의회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게 없나?”
디아나는 참다못해 실소를 뱉었다. 본래 황태자비 후보였던 디아나를 국혼에 초대한다는 발상 자체가 악의적이었다.
“심술이 난 거겠죠.”
디아나도 귀족들이 심술이 난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어리석었다. 이럴수록 공작이 된 디아나가 그들에게 적대심을 품을 뿐이다.
“뭐, 하객으로 참여하는 거라면 좋아. 못할 거 없지.”
그 국혼의 신부 자리에서 탈출했으니 됐다. 디아나는 기꺼이 코웃음을 치며 전갈을 구겼다.
“네, 아가씨가 원하지 않아서 내던지신 자리니까요.”
샬롯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말엔 평소보다 뾰족한 가시가 있었다. 최근 사교계에서 샤리즈 후작부인이 설치고 다닌다는 소문만으로도 이미 지친 탓이다. 제 여식을 황태자비로 만든 기쁨은 이해하지만, 정도가 과한 나머지 은근히 원래 후보였던 디아나를 비방한다는 소식에 영 괘씸했다.
“샤리즈 후작가의 둘째 영애라고 했지?”
“네, 아가씨. 비비안 영애라고 해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녀에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둘째 영애라면 첫째 영애는 어디에…….”
“아, 그건 말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첫째 영애는 결혼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사고였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비비안 영애의 양육에 샤리즈 부인의 극성이 대단했죠.”
“그래? 유감이네.”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키웠는데, 고작 루카스 따위의 부인으로 살아야 한다니 씁쓸한 일이었다. 그러나 샤리즈 후작가에선 연일 국혼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를 연다고 했다. 그 영애도 제 부모 같은 속물이라면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디아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참,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여태 잊고 있었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의 존재였다.
“공작령은…… 어떤 곳이지?”
“아, 그러게요. 실은 저도 아주 옛날에 가 본 게 전부라서요.”
디아나가 아는 카를 공작령은 전부 종이에 쓰인 글자였다. 어느 정도의 땅덩어리인지, 성벽이 얼마나 높은지, 성을 짓기 위한 대리석이 얼마나 들었는지,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얼마인지, 현실적이지만 체감되진 않는 것들에 대해서였다.
“공작이 되겠다고 나선 주제에 공작령에 대해선 무심했다는 게…… 왠지 내가 너무 바보 같아.”
“그야, 대부분 귀족은 평생을 수도에서 사니까요.”
제국의 정치는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작은 단위의 영주들은 제 영지에서 사는 것에 만족했지만, 그보다 더 위세가 좋은 귀족들은 앞다투어 제국의 의회에 출사하려 애를 썼다. 황실과 제국의 의회를 중심으로 모인 귀족들은 제 영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거대한 저택을 짓고 사교계를 누볐다. 그것이 제국의 일반적인 고위 귀족이 사는 법이었다.
“하지만 본래 공작이란 공작령의 주인이니, 그 땅을 보살펴야 하는 게 아닌가?”
“옛날엔 그런 때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수도에 모든 것이 있으니 어려워졌죠. 하지만 선대 공작님께선 유년기를 공작령에서 보내셨어요. 그 후엔 의회에 출사하기 위해 수도로 오셨죠.”
부패한 나라는 대개 비슷했다. 무능한 의회, 의회를 위해 존재하는 의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온갖 땅의 주인들이 모인다. 그들에게 의회와 정치란 연회에서 말할 화젯거리를 만들기 위한 정도에 불과했다.
“어차피 하는 일이 없는 의회에 출사하느니, 자신의 땅을 돌보는 게 더 좋을 텐데.”
“아가씨, 바깥에서 그런 말씀은.”
“알아, 안 해.”
의회를 부정하는 것은 곧 황권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둘 다 디아나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있잖아, 나…… 실은 처음 알았어. 샬롯의 성이 마스라는 거.”
“평소엔 쓰지 않아서요.”
샬롯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만, 디아나는 내심 자신을 탓했다. 그리 가까운 사람인데 성조차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제가 무심했단 뜻이다. 샬롯도 디아나에게 딸린 시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었다. 처음, 이건 책 속의 이야기라 생각했을 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다.
“미안해, 샬롯.”
“네? 아가씨가 갑자기 왜요.”
“그냥,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린 것 같아서.”
디아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푸른 눈동자엔 한층 다양한 감정이 서리기 시작했다. 샬롯은 그 변화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정말 중요한 것들은 잊을 수 없답니다.”
뜻밖의 현명한 답이었다.
“전 아가씨의 생각을 모르겠지만, 지금 떠올리신다는 건 잊은 게 아니잖아요.”
“응…… 정말 그러네.”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알아야 할 것들은 가까이 있었다. 어쩌면 지난 생에서 디아나가 번번이 실패했던 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온전히 사람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샬롯은 어련히 등장하는 영애의 측근 시녀 역할이고, 그레이는 이야기 진행에 필요할 때만 편리하게 등장하는 존재였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전부 그랬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남자이며, 루카스는 악역이다. 트리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한때, 종이에서 평면적으로 존재했으니까.
“그래. 이젠 잊어버리지 않을래.”
그 모두가 살아서 숨을 쉬고 움직이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디아나는 비로소 자신만이 주인공이라는 틀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 이미 책의 흐름은 틀어졌다. 이제 디아나가 살아가야 하는 것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