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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6화 (86/184)

86화

다음 날, 디아나는 일부러 주목받지 않을 만큼 소박한 마차를 타고 공작저의 뒷문을 나섰다. 수수한 드레스 위에 로브를 걸쳐서 쉬이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울 차림도 잊지 않았다.

예전부터 카를가의 후원으로 활동해 온 아르텔 수도원의 원장은 디아나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목적은 그가 아니었다. 아르텔 수도원은 번잡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요양원을 운영했다. 고작 열 명 남짓한 인원이 머물 수 있는 조용하고 쾌적한 시설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요양원 건물 앞에 내리자 미리 나온 수도사가 디아나에게 예를 갖추고 안내했다.

“그녀는?”

“지시하신 대로 혼자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별채에 모셨습니다.”

과연, 요양원의 본 건물 옆에 작은 별채가 보였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시지만…….”

“아, 그 아이 말인가.”

샬롯이 수도사의 말을 끊었다. 수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자 금세 별채가 나왔다. 단정한 하얀색의 건물은 겨울이 다가오는 잡목림을 배경으로 퍽 쓸쓸하게 보였다.

“세상에, 못 살아! 방금 옷을 갈아입혀 놨더니 또 저렇게 흙을 묻히면 어떡해!”

요양원에서 일하는 하녀인지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여인이 끌탕을 했다. 디아나를 안내하던 수도사가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디아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하녀는 디아나를 미처 보지 못한 채로 낙엽 사이에서 뒹굴던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작고 왜소한 소년이었다.

“그럼, 저 아이가?”

샬롯이 낮게 묻자 수도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잠깐 그쪽을 바라보더니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한창 하녀가 아이를 혼내고 있었지만, 인기척을 느끼자 깜짝 놀라서는 꾸벅 예를 갖추며 소년을 끌어당겼다. 하녀의 끌탕대로 옷은 온통 흙투성이에 소년의 꼴이 엉망이었다.

“잠깐.”

디아나가 하녀를 멈추고선 소년을 자세히 봤다. 칙칙한 노란색의 머리카락은 정돈된 흔적이 없었고, 갈색에 가까운 눈동자는 한순간도 집중할 수 없는지 이리저리 또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트리샤를 닮은 곳은 찾기 어려웠다. 굳이 따지자면 이목구비 조금과 왜소한 체격, 뺨의 주근깨 정도였다.

“네가 니콜라니?”

“응, 내 이름 니콜라예요.”

디아나의 질문에도 소년은 산만하게 손을 주물럭거렸다.

“……여덟 살이라고 했나?”

이건 샬롯을 향한 질문이었다. 샬롯이 확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발육이었다. 하는 짓만 보면 거의 다섯 살의 수준이나 겨우 될까.

“아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영애님.”

수도사가 무거운 입을 뗐다. 트리샤가 샤리즈 후작가에 채용됐을 땐 분명 하녀를 보내서 집을 돌봐주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냥 여덟 살도 돌보기 힘든데 아이 상태가 저 모양이니 학을 뗐을 테고, 뻔뻔한 블랑 남작은 사라를 받아 준 요양원에 아이를 보내 버렸다. 그것도 마치 물건처럼 짐마차에 삯을 주고 태워서 말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그레이는 당황했지만, 디아나는 일단 내버려 두라고 했다. 당시엔 황태자비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일단 직접 보고 판단할 작정이었다.

“예쁜 누나야! 나랑 놀아요. 나랑 나무랑 돌이랑 같이.”

그 증오스러운 트리샤의 동생이었다. 디아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소년을 응시했다.

“어딜 영애님께 감히!”

하녀가 니콜라의 어깨를 강압적으로 꾹 누르자 오히려 역효과가 났는지 니콜라가 발작하듯 발을 구르고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 만지지 마! 니콜라 때리지 마!”

찰싹, 하녀가 반항하는 니콜라의 뺨을 때렸다. 이 시대엔 친부모도, 심지어 귀족도 아이에게 손찌검하는 일이 빈번했으니 하녀가 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아나의 눈에는 뺨을 맞는데도 반사적으로 배를 감싸는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영애님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녀가 거듭 사과하곤 니콜라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부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훈육 차원에서 저 정도의 체벌만 할 뿐,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습니다. 수도원의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수도사가 곤란한 듯 말을 덧붙였다. 고작 요양원의 며칠로 저렇게 본능적인 방어를 하는 건 이상했다. 역시, 그건 부모가 남긴 흔적일 것이다. 정확히는 블랑 남작이겠지. 디아나는 속으로만 트리샤의 그 난폭하다던 아비를 떠올리고 쓴 표정을 지었다.

“샬롯. 사라 블랑은 나 혼자 만나 볼게.”

“문 앞에 있을 테니, 언제든 부르셔요.”

“응.”

디아나는 긴 숨을 내쉬고는 사라 블랑이 머물고 있다던 방의 문에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녀가 머무는 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차분한 분위기와 청결함이 느껴졌다. 침대는 바로 창가에 있었고 여인은 침대에 앉은 채 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디아나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

쇠약한 사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디아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트리샤와 같은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였다. 비록 병마에 쇠약해지긴 했어도 그 강렬한 색은 바래지 않았다. 그것이 디아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디아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반짝이는 풍성한 백금발이 드러났다.

“아, 카를가의 영애셨군요! 제가 무례를…….”

사라가 황급히 똑바로 앉으려 했지만, 디아나는 됐다고 손짓하곤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영애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어찌나 큰지…… 제가 갚을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니콜라까지 거두어 주시니, 이리 염치없는 목숨을 부지해도 되는지…….”

비굴할 정도의 감사였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트리샤가 떠올라 쉬이 방심할 수 없었다.

“감사를 받으려 한 일이 아니에요.”

겨우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확실히 트리샤를 닮았다. 특히 디아나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과 눈짓이 그랬다.

“카를 영애께선 소문대로 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우십니다.”

굳이 트리샤의 모친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제 못난 여식이 영애같이 귀한 분을 만난 것은 축복이어요.”

그리고 디아나에겐 저주였다.

“오늘…… 트리샤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사라가 두리번거렸다. 디아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트리샤는 지금 아주 바쁜 것으로 아는데요.”

“아, 그렇군요. 하긴, 당연히 영애님을 위해서 애를 써야지요.”

사라가 딸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을 얼버무렸다.

“어찌, 트리샤는 영애님을 잘 모시고 있나요? 아직 모자란 아이라, 영애님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셔요.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고 해서 관대하게 대하지 마시고 엄히 분수를 지키게 가르침을 주시면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트리샤는 지금 샤리즈 후작가에 있었다. 그러나 사라 블랑은 그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확실히 트리샤가 요양원에 찾아왔단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교류가 없을 줄이야.

“……걱정 마세요, 부인.”

디아나가 사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트리샤는 잘하고 있어요. 그것도 제 기대보다 훨씬 더요.”

그래. 제 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멋대로 샤리즈 후작가에 매수되어 디아나를 위한 결정적인 증언까지 해 줬다. 디아나의 인생에서 트리샤가 이토록 잘해 낸 적은 처음이다.

“이런…… 이렇게 기쁠 데가.”

사라의 야윈 얼굴에 환희가 찼다. 쇠약한 와중에도 모정은 그대로인지 그 뭉클한 마음이 얼굴의 잔주름까지 세세하게 퍼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는 디아나는 의외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트리샤에게도 모친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정도였다. 이런 모친을 두고서, 디아나의 자식을 살해한 트리샤가.

“오늘 찾아온 건 여러 소식을 대신 전하기 위해서였어요.”

“어찌, 영애처럼 귀한 분이 몸소 이런 누추한 저를 보러.”

“아니에요. 트리샤는 제 친구이니까요.”

다시 한 번 분명히 해 두지만, 친구라는 무기는 트리샤만의 것이 아니었다.

“조만간 요양원을 옮기게 될 거예요. 수도원의 사정이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곳이니 안심하세요.”

“저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 니콜라도 데려가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염치가 없지만…… 날 때부터 조금 부족한 아이라서,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습니다.”

“물론이죠, 앞으로는 니콜라도 제가 돌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영애님, 이런 자비를 베푸시다니. 세상에, 트리샤가 이런 복이 있을 줄이야.”

“이건 자비가 아니에요.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디아나는 사실을 말했다. 그게 사라에게 더 깊은 감격을 줬다.

“실은, 트리샤가 저와 함께 황실에 갔다가 좋은 인상을 드렸나 봐요.”

“……예?”

“트리샤 본인이 원하기도 했고, 워낙 좋은 시녀 자리가 있어서…… 공작가의 추천으로 입궁했어요. 그래서 여기에 못 온 거예요. 확실해지기 전엔 걱정만 끼칠 것 같다고 주저하더라고요.”

“아니, 황실이라니. 어떻게 우리 아이가 그런.”

물론, 지금 트리샤는 샤리즈 후작가에 있었다. 하지만 곧 후작가의 둘째 영애가 황태자비로 입궁할 때 따라갈 것은 분명했다. 즉, 이건 기정사실이다.

“트리샤가 워낙 똑똑하잖아요.”

디아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입궁하면서 제게 어머니와 동생을 부탁했어요. 친구로서 당연히 그래야죠.”

사라 블랑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디아나와 세상에 감사를 표했다. 디아나는 그녀에게 따스한 미소와 희망, 그리고 위안을 전하고 방을 나섰다.

“아가씨, 대화는 잘 나누셨나요?”

디아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입가엔 묘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샬롯.”

요양원의 별채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서 둘만 남자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트리샤에게 보답을 해야겠어.”

“네?”

“내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줬잖아.”

그제야 샬롯도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 그랬었죠…….”

쥐새끼처럼 기어 나와서 발발 눈치를 보는 체하며 할 말은 다 하고 사라졌던 그 꼬락서니를 보는 순간 누구보다 열화가 치민 것은 샬롯이었다. 그것이 디아나가 베푼 온정에 대한 행동이라니, 샬롯이 가장 경멸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런 고마운 친구에게 보답을 잊으면 안 되지.”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사라가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어떻게 보답하실 건가요?”

그런 디아나 곁에선 항상 같은 곳을 봐 주는 샬롯이 있었다.

“글쎄. 우선은 블랑 부인의 건강을 생각해서 더 고요하고 정양을 위한 장소를 찾아야겠어.”

“그렇죠. 가능하면 인적이 드물고, 아주 고요한 곳이 좋겠어요.”

디아나는 사라와 니콜라의 신변을 손에 쥐기로 했다. 샬롯은 몰랐지만, 디아나는 트리샤에게 가족을 향한 사랑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디아나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단절이었다. 그들이 서로 교류하지 못하는 동안, 디아나는 붉은 마녀의 핏줄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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