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85화 (85/184)

85화

제법 바람이 쌀쌀해졌다. 그 바람은 두 개의 카를 공작저를 그대로 관통하는 변화의 바람이기도 했다.

현재의 카를 공작인 아론은 기어이 카를 공작의 인장을 꺼냈다. 짧은 시간 동안 몰라보게 야윈 실비아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간 실비아는 어린 자식을 앞세워서 동정에도 호소해 보고 죽어 버리겠다며 협박까지 했지만, 아론의 의지는 굳건했다.

“하…… 결국, 그 아이에게 공작위까지 넘기는 건가요.”

계단의 난간을 짚고 선 실비아의 눈에 생명력이라곤 없었다. 얼마 전, 디아나의 국혼이 파기됐다는 것을 듣자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 황태자비 후보일 때도 유산으로 분쟁을 걸어온 디아나다. 이젠 입궁하지 않게 됐으니 재산과 작위를 찾으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

아론은 묵묵히 대답했다.

“내 형님이 돌아가신 그 불행한 사고 당시 디아나가 성인이었다면 내게 공작위가 넘어왔을까?”

제국은 유산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다.

“이제 디아나가 성인이 되었으니 돌려주는 게 당연해. 그동안 디아나의 것을 잠시 빌려서 살았던 거야.”

“그래요, 나도 포기했어요. 나중에 당신 자식들이 출세에 뒤처지는 것을 보며, 왜 우린 더는 공작가가 아니냐고 물으면, 그때도 그렇게 성인군자처럼 대답해 주세요.”

아론은 실비아를 잠시 노려보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서로의 입장은 좁혀질 수 없었다.

아론을 기다리던 마차는 또 다른 카를 공작저로 향했다. 얼마 후면 유일한 카를 공작저가 될 것이다.

“어서 오세요, 숙부님.”

디아나가 차분하게 아론을 맞이했다. 제롬은 이미 도착해서 디아나의 뒤에서 예를 갖췄다.

“그래. 그…….”

아론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입궁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니까.”

서툰 위로였다. 디아나는 그런 아론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론이 제 연구밖에 모르는 무심한 사람이었던 점은 어렸던 디아나에게 나쁜 요소였지만, 성인이 된 디아나에겐 좋은 점이 됐다. 그는 실비아처럼 영욕에 눈이 멀지 않았고, 물욕이 없었다. 무엇보다 심성이 바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유산 분쟁은 진흙탕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제롬이 나섰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한 서류와 아론이 직접 작성한 소명서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사이 샬롯이 차를 내왔고 모두 응접실에 앉은 채로 제롬을 기다렸다. 그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각각의 봉투에 서류를 분류해서 넣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여태까지 유산을 나누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공작령은 일개 토지가 아니다. 공작령의 주인이 곧 공작이 되니 작위에 대한 민감한 건이었다.

“하지만 아론 공작님께서 큰 협조를 해 주셨고 사유 또한 타당합니다. 준비는 잘 마친 것 같으니 이제 제국 의회의 승인을 기다리죠.”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가 달린 문제는 제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모두가 환영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일에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꽤 우스운 일이었지만, 황실은 이번 파혼으로 디아나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국 의회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진 에드윈의 존재까지 생각하면 승인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요.”

디아나가 차분히 말했다. 아론은 그런 디아나를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다가 불쑥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가죽 주머니엔 카를가의 문장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제롬은 그 물건의 품새만 보고도 내용물을 눈치채고 조용히 자리를 비켰다.

“이걸 주마.”

아론이 무뚝뚝하게 주머니를 디아나에게 건넸다.

“카를 공작가의 인장이다.”

“하지만, 아직 의회의 승인이 난 것은…….”

“그래도 난 네게 공작위를 넘기기로 했다. 의회가 받아들일 때까지 내 결정을 소명할 거고.”

참으로 아론다운 언행이었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뚝심은 이런 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아론은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이기도 해.”

디아나가 가죽 주머니를 꾹 쥐었다. 가죽의 촉감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카를가의 역사였다.

“이제부터 네가 카를가의 가주다.”

아론이 건네는 것은 단지 도장이 아닌 가주의 권위였다. 디아나도 그것을 이해한 듯이 잠시 아론의 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

우아하고 차분한 한마디였다. 결코 공작위나 가주의 권리를 넘겨주어 고맙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것은 본래 디아나의 것이었기에 감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막 가문의 인장을 손에 쥐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통찰력이었다. 어쩌면 타고난 지배자의 기질일 수도 있다.

“이제야 제 주인을 찾은 기분이군.”

아론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카를가에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다.

***

제롬이 디아나의 법정 대리인으로서 의회에 정식 요청을 하러 떠났다. 물론 아론은 본론만 전달한 후에 차가 식기도 전에 제 집무실이자 연구실로 향한 후였다. 하지만 디아나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었지.”

디아나가 어렴풋이 정해 둔 길은 있었지만, 황태자비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예상보다 더 끈질긴 황실의 트집과 선대공비의 배신 탓에 너무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완전히 끝내는 게 더 나았다.

“트리샤…….”

또로록, 디아나의 입안에서 가장 익숙하고도 먼 이름이 굴렀다. 처음엔 그게 친구라는 사탕인 줄 알고 머금었다가 그 안의 맹독으로 몇 번을 죽어야 했던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피했지만, 트리샤는 여전히 디아나와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넌 항상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지.”

이번에도 그랬다. 황태자비 검증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상상치도 못했던 트리샤가 나왔다. 연신 웃전과 디아나의 눈치를 번갈아 보면서도 조금이라도 제가 이득을 볼 수 있도록 거짓말에 망설임이 없던 그 아이, 트리샤 블랑.

“그래, 그래야 트리샤 너다워.”

담담한 디아나의 목소리와는 달리 하얀 손이 빈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전의 생에서 제 뺨을 치고 수치심을 줬던 황후의 경우엔 상황이 달라지자 대수롭지 않은 한심한 여인으로 느껴지고 그만이었다.

하지만 트리샤가 준 분노는 달랐다. 그 분노는 상실감과 절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는 마찬가지로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넌 너이기 때문에…… 날 이길 수 없어.”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주시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이젠 무엇도 잃을 수 없었다. 드디어 찾은 자유와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을 알려 준 에드윈의 품을 빼앗기지 않을 거다. 소중한 게 늘어날수록 상실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디아나에게서 일말의 망설임마저 지워 냈다. 두려운 것은 트리샤보다 사악해지는 게 아니다. 그런 것 따위 조금도 거리낄 것 없었다.

디아나는 진짜 두려움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마는 것. 그 두려움을 생각하면 디아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래, 뭐든지.

***

그레이가 탁자 위에 트리샤에 대한 조사 자료를 내려놨다.

“여기, 제가 정리한 일지입니다.”

제롬에게 맡긴 부분도 있었지만, 그레이도 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참으로 배은망덕하군요. 아가씨의 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감히…… 그 순간, 얼마나 치가 떨리던지.”

샬롯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동안 디아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이 공작저에서 얻은 은혜가 얼마인데 도대체 무슨 염치로 황태자비 검증에서 디아나를 해치는 증언을 했는지 가증스러웠다.

“결과적으론 내게 득이 됐으니 괜찮아.”

샤리즈 후작가에 고용된 트리샤는 죄책감 어린 눈동자로 흘끔흘끔 디아나를 보면서도 황후 앞에서 디아나의 몸에 문제가 있다고 증언했다. 디아나도 바란 결과였다는 것은 몰랐겠지만, 어쨌거나 트리샤가 태연히 디아나를 배신한 건 사실이었다. 별로 놀랍지 않은 사실이었다.

“이젠 두 사람에게도 말해야겠어. 내가 트리샤 블랑을 멀리하기 시작한 것도, 이토록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도…… 날 해칠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야.”

그 뻔뻔한 증언을 목격한 샬롯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조사를 하다 보니, 그리 가까이할 품행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레이의 의견도 같았다. 그건 트리샤가 가진 배경이나 편견을 주는 머리카락 색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뒤집듯 하는 트리샤의 행적은 평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샤리즈 후작 영애의 시녀이고, 아가씨와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샬롯. 하지만 트리샤 블랑에게선 뭔가…… 다른 적의가 느껴져. 가끔 그런 악몽을 꿀 때도 있어.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집착으로 날 해치는 꿈을.”

그건 악몽이자 과거였다. 디아나는 잠시 괴로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전 아가씨의 예감을 믿어요. 예전에도 꿈에 마님이 나오셔서 아가씨가 지금 지니고 다니시는 단검이나 선대 공작님의 편지를 알려 주셨잖아요.”

그때는 회귀의 기억을 쉽게 이용하기 위해 꿈을 가장했다. 그때 샬롯은 디아나에게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믿게 됐다. 하긴,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트리샤에게 살해당하던 순간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세상엔 이유 없는 악의를 품은 자들이 많지요.”

그레이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과거 기사단에 소속됐던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남자였다. 인간의 악한 면을 이해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만큼의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아가씨의 마음에 걸릴 만한 사람이라면, 아예 매듭을 지어 두는 게 좋습니다.”

든든한 그레이의 말에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디아나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지만, 그 이전에 자신들이 길러 낸 카를가의 마지막 후예라는 특별한 감정이 컸다. 달리 가족이나 자식이 없는 두 사람에겐 디아나의 존재는 그들의 인생을 통해 기대와 사랑을 준 미래 그 자체였다.

“좋아. 지금 트리샤는 샤리즈 후작가의 국혼 준비로 무척 바쁘다고?”

“예, 후작 영애의 시중을 드느라 아예 저택 밖으로 나올 시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잘됐군.”

디아나가 다른 일지를 집어 들었다.

“그 뿌리를 파헤치기 좋은 때야.”

그 일지엔 사라 블랑이 요양하는 수도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질적으로 디아나 카를이 소유한 수도원이었다. 씨앗을 뿌렸으니 거둘 때가 됐다.

0